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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20세기 다지안의 정신적 지주 에토르 소트사스 영면에 들다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는 1917년 생으로 2007년 12월 31일 꼭 90세에 돌아갔다. 돌아가기 일주일 전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했다고 하니 그는 거의 70년 정도를 일선에서 활동했던 셈이다. 게다가 말이 70년이지 그가 관통한 70년은 만만한 세월이 아니었다. 2차 대전의 아픈 추억과 전후 어려웠던 이탈리아의 사정, 1960년대 이후 이탈리아 디자인의 전성기, 그리고 새로운 세기. 이 역사의 마디마다 수많은 등장인물이 단역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져갔지만 에토레 소트사스는 그 긴 시간 동안 주연을 뺏긴 적이 없었다. 이 정도만으로도 그는 살아 있는 전설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자신의 이름을 세계 디자인계에 새기기 시작한 시기가 남들이 다들 은퇴하고 손자나 볼 60대부터였다는 것이다. 에토레 소트사스가 이때 보여준 디자인은 그 어떤 젊은이도 넘지 못할 신선함으로 디자인의 중심을 강타해왔다.

사람들은 보통 에토레 소트사스 하면 1980년대 ‘멤피스(Memphis)’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을 떠올리기 쉽다. 그래서 에토레 소트사스를 둘러싼 이미지는 대개 ‘반골적인’ 혹은 ‘실험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 인상은 대개 1970~80년대, 그가 거의 60대에 이르러 만들어낸 것이다. 보수가 되어도 골수 보수가 되어야 할 나이에 반항아 이미지를 갖게 된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덕분에 이탈리아가 완전 초토화되었던 2차 대전 직후부터 그가 활동했다는 사실은 종종 간과되곤 한다. 연합군에게 크게 패한 세계대전 이후 그를 맞이한 것은 초토화된 국토와 산업이었다. 이런 무의 상태에서 이탈리아를 부흥시킬 수 있는 것은 남아 있던 수공업 전통과 디자인이었다. 그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1947년 스튜디오를 열었다. 에토레 소트사스뿐 아니라 당시 활동했던 대부분의 이탈리아 디자이너에게는 제한된 자원과 기술로 나라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절박한 의무가 있었다. 그 역시 다른 이탈리아 디자이너처럼 국가 경제의 최전선에서 활동하게 된다. 그가 디자인한 올리베티(Olivetti)사의 발렌타인(Valentine) 타자기를 보면 당시의 사회가 필요로 한 디자인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그는 포스트 모던한 디자인만 했던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디자인이 형성되어가는 초기부터 깊숙하게 개입하고 있다.

에토레 소트사스가 하와이에 디자인한 집 카사 올라부에나가(Casa Olabuenaga).

여기서 놀라운 점은 이탈리아 경제와 디자인이 회복하기 시작하는 1960년대부터 새로운 시도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의 활동만으로도 충분히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에토레 소트사스는 나이에 무색하게 ‘알키미아(Alchimia)’나 ‘멤피스’와 같은 집단을 통해 이탈리아 디자인의 새로운 전형을 실험한다. 그것은 그가 한창 활동을 하던 시기의 디자인에 많은 부분 위배되기도 하고 실패할 수도 있는 실험이었다. 하지만 이순의 나이에 그는 전혀 두려움 없이 자신의 신조를 밀고 나갔다. 그 결과 1980년대 디자인의 세계적 아이콘이 되었고, 그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디자인은 단박에 세계의 정상에 선다. 포스트모던의 열풍이 잠잠해진 이후에도 그는 세월에 부식되지 않고 더욱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디자인을 하면서 새로운 세기로 전화해갔다.

세상에는 여러 유형의 예술가가 있는데, 에토레 소트사스처럼 자신의 스타일을 자기 생에 시작하고 마감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가우디의 건축이나 정선의 진경산수, 김정희의 추사체 정도가 그러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지만 대개는 여러 사람 혹은 여러 세대를 거쳐서 하나의 장르가 완성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에토레 소트사스는 근래에 보기 드문 천재적인 행보를 걸었던 디자이너다. 사망하기 전까지도 그는 이탈리아 디자인 그 자체였으며 수많은 젊은 디자이너를 이끄는 수장이었다. 또한 이탈리아 현대 디자인을 직접 만들고 전성기로 끌어올린 르네상스적 인물이었다. 하지만 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그만큼 어둡다고 했던가. 안 그래도 영향력이 주춤한 이탈리아 디자인계가 그를 잃음으로써 영광스러운 디자인 제국의 면모를 추억으로만 간직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대개 이런 예술가는 자신의 죽음과 동시에 자신이 만든 영광도 함께 수거해 가기 때문이다. 아무튼 에토레 소트사스는 거의 한세기를 통치했던 디자인의 황제로서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오른쪽) 올리베티사에서 의뢰받아 디자인한 발렌타인 타자기. 빨간색 플라스틱으로 만든 본체와 열고 닫기 쉬운 케이스를 갖춘 휴대용 타자기로 1969년 디자인했다.

최경원
건국대, 명지대, 성신여대, 숙명여대 등에서 미술의 이해와 디자인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디자인 입문서 <좋아 보이는 것들의 비밀, 굿 디자인>과 20세기 위대한 디자이너 10인을 묶은 <그레이트 디자이너 10>을 저술했다.

*멤피스 그룹 1981년 ‘알키미아’에서 나온 소트사스가 미켈레 데 루키(Michele de Lucchi), 마테오 툰(Matteo Thun), 마르코 자니니(Marco Zanini), 알도 치비크(Aldo Cibic) 등과 함께 밀라노에 만든 스튜디오다. 이들이 그해 밀라노 가구 박람회에 출품한 작품은 기능적인 모더니즘의 교훈에 숨 막혀 하던 디자이너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며 1980년대 가장 중요한 디자인 현상으로 주목받았다. 이들의 장난기 어린 포스트모던 디자인은 대담하고 밝은 색상, 무늬가 있는 플라스틱 박판, 자유로운 형태 등을 특징으로 한다. 거기에 고전주의 건축에서 1950년대 키치(kitsch)까지 다양한 원천을 받아들였다.

**알키미아 스튜디오 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 안드레아 브란치(Andrea Branzi)같이 급진적인 디자이너로 구성된 자유로운 그룹이다. 이 그룹은 ‘굿 디자인’에 대한 바우하우스식 교의를 거부하고 재치 있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디자인을 옹호했다.(편집자 주)
 
누구에게나 공평했던 거장

한국 시간으로 새해를 맞이한 순간 믿기지 않는 소식을 받았다. 소트사스 아소시아티(Sottsass Associati)에서 만난 이탈리아 동료의 문자 메시지. 마에스트로가 2007년 마지막 날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직원 모두의 휴가 중 부인 옆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고인의 뜻에 따라 2일 비공개로 화장을 치르고 나서야 부인인 바르바라 씨는 사무실에 그의 부고를 알렸다. 디자인사를 처음 읽던 순간부터 그는 나의 영웅이었다. 60대에 갓 스물을 넘긴 제자들과 함께 멤피스를 만들어 세계 디자인 흐름을 바꾼 디자이너답게 그에게서 권위주의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처음 뵙던 날 극존칭을 쓰던 내게 등을 다독거리시며 괜찮으니 말을 놓으라고 하실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연령*신분*지위를 막론하고 모든 이를 동등하게 대했으며 사무실 직원 모두에게 본인과 동일하거나 더 큰 책상과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젊은 디자이너의 좋은 작품을 보면 ‘네가 나보다 낫다’는 칭찬도 서슴지 않으셨다. 약 3년을 마에스트로와 함께 일하며 왜 그토록 수많은 디자이너가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지 알 수 있었다. 그를 만난 것은 내 생애의 큰 행운이다. 글/ 여미영

여미영
이탈리아 도무스 아카데미와 웨일스 대학에서 디자인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에우로페오(Instituto Europeo di Design) 인테리어 공모전에서 1위를 수상했다. 삼성디자인센터 밀라노지사에서 일하다가 2005년부터 소트사스 스튜디오에 적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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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글 최경원, 담당 임나리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08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