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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담론 없는 디자인은 불행하다
디자인 담론이 왜 중요한가? 디자인 담론이 없어도 디자이너는 잘 먹고 잘 살지 않았나? 디자인 담론이 활발해지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가? 잘난 사람들의 쓸데없는 말장난이 아닐까? 골치 아픈 담론이니 하는 것들이 정말 필요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다. 탄수화물은 아니지만 비타민이다. 미묘한 차이에서 미와 추가 결정되는 디자인의 속성을 알고 있노라면 이론 무장을 제대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디자이너의 뇌는 결국 남의 것에 지배되고 만다. 한국 디자이너 치고 서양 콤플렉스를 겪지 않은 이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남의 얘기를 줄줄 암송하는 디자이너가 칭찬받던 시대는 끝났다. 그렇고 그런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가? 아니면 정말 훌륭한 디자이너로 남고 싶은가? 선택은 디자이너 자신에게 달려있다.

김신 디자인 담론이 왜 중요하죠? 담론과 실행의 관계란 무엇인가요?

최범 먼저 한국 디자인이 실행(practice)은 과잉한 반면, 담론(discourse)은 굉장히 빈곤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이러한 주제를 설정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담론의 기능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하고 싶습니다. 첫째로 담론은 실행이나 현상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설명은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명으로서의 담론은 곧 이해로서의 담론이라고 해도 되겠죠. 두 번째로는 평가가 있죠. 담론이란 대상을 설명하지만 설명에는 불가피하게 평가가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설명이란 있을 수 없고, 거기에는 어떤 식으로든 평가가 이루어지게 마련이죠. 결국 ‘가치 있다, 없다’ ‘좋다 나쁘다’라는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죠. 이는 평가로서의 담론이 되겠죠. 세 번째로 담론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러니까 담론은 현상의 설명을 넘어서 그것을 가치평가하고 나아가 비전도 제시해주는 것이죠. 저는 먼저 이러한 연쇄로서 담론을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디자인에 담론이 없다는 것은 결국 디자인 실행에 대한 설명과 평가와 방향 제시가 모두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한국 디자인의 현실은 실행은 있으나 담론이 없는 상태, 즉 한마디로 ‘행하되 알지 못한다’,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조현신 담론이 왜 필요한가 물으면 목적 달성의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 봅니다. 무엇을 만드는 행위는 계획을 하든 안 하든, 행위 자체의 목적 달성에서 끝나는 거죠. 여기서 나오는 게 ‘how’죠. 어떻게 해결을 하나? 가장 효과적으로, 실질적으로 어떻게 문제 해결을 하나? 그래서 문제 해결이 끝나면 다 끝나는 것. 저는 이것을 도구적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길게 보면 이런 도구적 인간이 끝나는 시대를 문화시대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목적달성의 의미를 물어보는 행위가 곧 디자인 담론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인간의 이성은 흔히 도구적 이성과 사변적 이성 혹은 성찰적 이성으로 나누어집니다. 도구적 이성은 목적 달성을 위해 이성을 쓰는 것이고, 이러한 목적 달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성찰적 이성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찰적 이성의 대표적인 예는 철학과 역사이고, 이러한 인간은 곧 인문적 인간이죠. 그래서 저는 인문적 인간이 살아가는 시대가 곧 문화의 시대라고 봅니다.

왜 이 단계에서는 실행만 있고 의미를 따지지 않았나, 그것을 집어봐야 할 것 같아요. 

정병규
" 특히 대학 타이포그래피 교육의 이런 점은 답답합니다.
<훈민정음>을 시각문화적으로 제대로 읽는 학교가 몇이나 될까요? "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를 거쳐 고려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파리 에콜 에스티엔에서 타이포그래피를 연구한 후, 1975년 민음사 편집부장이 되었다. 1993년까지 민음사 북디자인을 했고 현재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VIDAK) 회장이다. <정병규의 북디자인>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정병규 한마디로 우리 디자인계가 디자인 행위의 총체적 의미를 살피는 데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쉽게 말하면 의미를 외면해도 디자인 장르가 존재하고 먹고살만 해서 그런 거 아닌가요?

행위 자체의 목적을 어디에 두었나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행위 자체의 목적이 산업화와 부가가치의 창조에만 치중되어 있으면 그것이 곧 가치입니다. 다른 무엇을 물어볼 필요가 없었지요. 경제적으로 잘살자 하나만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의미가 외부에서 주어줬죠. 모든 디자인이 잘 팔려야 된다, 시선을 자극해야 한다, 기능적이어야 한다 외에는 아무 논리가 없었던 것이라고 봅니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 그 자체, 방금 지나온 우리 삶 자체가 그러했으니까 디자인 역시 그 범주에서 창조되었던 것이라고 봅니다.

조 교수님이 지적하신 잘살자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에만 기대어 디자인을 바라보는 것이 오늘의 현실임을 부인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 디자인은 경제, 산업화와의 친연성 외에는 다른 생각을 못하고 있고… 경제제일주의지요. 경제는 앞만 보고 달려가는 속성이 있지요. 한국 디자인은 아직도 산업화라는 경제제일주의의 자장 속에서 스스로를 살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인 자체의 역사도 외면하고 있고 디자인이 발 딛고 서 있는 오늘의 삶의 다양성도 체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깊은 망각의 늪에 빠져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우리 디자인계의 현실을 한마디로 말하는 것이 담론의 부재가 아닌가요?

망각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에 존재했던 것을 잊는다는 의미인데,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무사유, 즉 생각하지 않음이라고 해야겠죠. 심지어 생각할 필요 없음, 생각하지 않아도 됨, 거기서 더 나아가 생각하지 않을수록 유리함, 뭐 이런 것이겠죠.

디자인 자체의 속성에 그런 면이 있습니다. 디자이너는 디자이너가 생산한 사물에 가려 스스로를 보지 못하는 측면이 있지요. 이 점은 대량생산, 강력한 클라이언트의 등장 등 현대 디자인의 역사적 맥락에 디자인을 놓고 보면 더욱 선명해 지지요. 그러나 서구 디자인사를 살펴보면 그들은 고비고비마다 이 문제에 대해 갈등을 느낍니다. 디자인 자체에 대한 성찰적 반성을 시도하지요. 아마 그 첫 장에 윌리엄 모리스가 놓일 것 같습니다. 그런 디자인과 시대에 대한 성찰적 태도가 바로 디자인 담론의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디자인은 이러한 담론의 층위를 외면 한 채 앞만 보고 달립니다. 열심히 주문대로 만들기만 한다고 할까요. 우리는 한국 디자인을 담론의 장에 놓고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국 디자인의 의미성, 총체적 의미성을 살피는 담론적 행위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정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이 바로 실행의 과잉과 담론의 빈곤이라는 현상으로 바꿔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디자인이 한국적 근대성의 산물로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에 그동안 자신을 돌아보지 못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죠. 그런데 담론이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단순히 담론이 부재했던 것은 아니고 그 공간을 사이비 담론이 채우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한국 디자인의 담론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는데, 다만 그것은 담론이라기보다는 명령어나 구호에 가까운 것들, 그러니까 담론이라고 할 수 없는 담론이었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미술 수출’, ‘디자인 경쟁력’, ‘21세기는 디자인 혁명의 시대’ 같은 것들이죠. 이러한 것은 사실 내용적으로는 매우 빈약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해온 담론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결국 그동안 한국 디자인을 지배해온 것은 이러한 담론이었다는 거죠.
이제는 이러한 담론에 대해서도 반성적 성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만 ‘67년 체제(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 장려를 위해 ‘미술 수출’이라는 구호를 만든 것을 말함)’의 극복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사이비 담론의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담론으로서 갖추어야 할 설명력이나 성찰성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면서 결국 한국 디자인의 사유를 상투화시켰다는 점입니다. 제가 현실에서 항상 뼈아프게 느끼는 점이 이런 것입니다. 사실 한국 디자인계가 많이 성장했고, 다자인 전문가들의 사회적 지위도 높아지고 그만큼 사회적 발언력도 커졌지만,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렇다 할 디자인계 인사들이 내놓는 담론이 지극히 상투성이고 판에 박힌 것이라는 점입니다.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어려워요. 누가 됐든 한결같이 앞서 이야기한 그런 상투적인 담론을 반복해서 재생산하고 있다는 거죠. 사실 오래전부터 매스컴을 통해서 쏟아지고 있는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도 겉으로는 대단히 화려하고 풍부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몇 개 안 되는 단어 조합의 무한 반복에 지나지 않아요. 과연 이러한 것을 제대로 된 담론이라고 봐야 할 것인지. 아무튼 이로부터 빨리 벗어나는 것, 담론의 진정한 기능을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 디자인계의 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최 선생님이 방금 말씀하신 ‘없진 않았다’라는 말처럼 디자인에 대한 추상적인 명령어 등은 정부기관이나 공공기관에서 많이 사용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디자인 21세기’라든지, ‘창조성의 시대’라든지.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단어가 가리키는 내용은 어디에서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실천 없이 디자인에 대한 말이 무성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교육 현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볼 때 그동안 이런 언어로서의 디자인, 행위 자체만을 의미하는 디자인을 실천하는 책은 많았던 것 같아요. 일종의 하우투(how-to) 북, 디자인 이론서, 디자인 제작서, 디자인 참고서. 그래서 흔히 디자인 이론이라 하면 그것이 이론인 줄 알고, 어떻게 하면 디자인을 잘 하는가 하는 목적 달성을 위한 것만을 떠올리는 것이 주된 경향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디자인 담론과 이론을 구분되는 점이 아닌가 생각해요.
물론 이론서에 대한 문제도 담론에 포함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우투(how-to) 이론, 목적 달성을 하는 이론 자체가 담론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어떻게 만드느냐는 제작 이론 자체도 수입이 되었기 때문에 만들거나 디자인하는 감각, 방법, 과정 등이 다르거든요. 그래서 좀 과격한 단어를 쓰면, 이런 태도에는 문화 식민지라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식민지적 감각으로 서구의 하우투(how to)를 들여오기 때문에 생산하는 물건 자체가 담론으로 변화되는 거죠. 그래서 엄격히 말하면 이론과 담론은 사실 구분될 수 없다고 봅니다.

하우투 영역은 보편성이 강한 영역이지요. 아무래도 우리는 선진 하우투를 무시하고 비켜 갈 입장만은 아닙니다. 디자인이 다루는 조형적 속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디자인은 이 보편적 영역만으론 존립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오늘의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현실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타이포그래피는 결국 언어적 표현 행위인데 지금의 우리 타이포그래피는 우리의 문자언어인 한글만의 특수성, 독창성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한글을 다루더라도 하우투의 관점만 강조합니다. 서구의 타이포그래피 이론을 보편성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양 경배의식 같은 것이 무의식적으로 통용되고 있다고나 할까요. 특히 대학 타이포그래피 교육의 이런 점은 답답합니다. <훈민정음>을 시각문화적으로 제대로 읽는 학교가 몇이나 될까요? 이 문헌에는 하우투가 없습니다. 단지 하우투 입장에서 보면 별로 재미가 없지요. 한국 시각 디자인의 출발은 <훈민정음>이라는 문헌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막무가내로 구호로만 ‘한글, 한글’해서는 이제는 곤란합니다. <훈민정음>을 보는 관점도 국어학의 성과만을 바탕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새로운 <훈민정음>에 대한 디자인적 담론이 필요하지요. 그리고 하우투에만 치중하다 보면 ‘디자인은 아이디어다’라는 편향적 고정관념도 생기지요. 이렇게 되면 ‘디자인은 문화적이고 체계적’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직관에 의존하는 장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지요. 이런 디자인관은 디자이너의 행위를 일회적이며 개인적 감수성의 놀음에 귀속시키게 합니다. ‘좋다, 나쁘다’란 가치 관념이 설 자리가 없지요. 단지 ‘재미있다, 없다’란 유희성만 강조됩니다. 결국은 작품에 대한 평가가 불가능해집니다. 분명 이러한 디자인에 대한 인식은 담론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지요.

조 교수님은 ‘하우 투’ 그 자체가 이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담론이라는 것이고, 정 선생님은 실무 경험에서 담론이 어떻게 물질적으로 존재하는지를 말씀해주신 것 같아요. 그리고 담론이라는 것이 일단은 언어의 차원이지만 물질로 구현되는 측면도 있죠. 담론이라는 것도 결국은 제도화되고 물질화되게 마련이니까요. 이는 담론의 존재 방식에 대한 것으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고, 또 보다 심층적이랄까, 어려운 것이기도 한데요. 아무튼 담론에 대해서는 언어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차원까지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런 담론이 없이 지금까지는 잘 살아왔잖아요. 일단 우리나라는 디자인 업계 종사자에게 미안하지만 잘 살아왔잖아요. 결론으로 담론을 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담론이 없음으로써 발생하는 폐해 같은 것에 대해서도 말씀을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디자인계의 현실은 사실 지금 우리가 한 이야기 속에 귀납적으로 녹아 있어요. 디자인적 담론이 왜 필요한지를 뒤집어보면 담론 없이도 유지되는 디자인계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요?

최범
" 디자인 실행이 실행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미로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


디자인 평론가.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역임했다.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계약교수 등을 거쳐 현재는 희망제작소 부설 간판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평론집으로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이 있다.

담론이 필요한 이유로 담론이 없으면 디자인계가 망한다든지 그런 차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죠. 물론 장기적으로는 디자인계의 경쟁력이 떨어지겠지만. ‘담론이 왜 필요한가’는 ‘디자인이 왜 필요한가’와 같이 단순한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어요. 그것은 좀 고급한 욕구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죠.

그런 담론적 욕구와 관련해서 디자인 측면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지요. 결국은 디자인과 가치, 디자인의 문화적 가치를 얘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최선생님께서 앞에서 말씀하신 ‘실행의 과잉과 담론의 빈곤’이란 얘기는 결국 디자인과 가치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가치는 다른 말로 질과 관계되지요. 그러니까 수적 과잉과 질적 빈곤으로 이해하고 싶어요. 질이란 말 속에는 시대와 역사성이 노출된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인은 이제 양적인 교환가치를 포괄하면서 질적인 차원의 사용가치를 담보하는 차원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디자인을 질적 디자인이라고 불러보지요. 디자인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디자이너도 클라이언트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클라이언트, 시장이 디자인의 질을 말해준다고 착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소비자본주의 맥락에서 디자인의 계량 가능한 측면만 보는 것이지요. 디자이너의 행위의 결과인 생산품이 스스로 주어가 되어 우리 삶 속에 살고 그것이 우리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때 질적 디자인이 탄생하는 것이겠지요. 디자인적 담론의 욕구가 지향하는 것은 이런 질적 디자인이 아닐까요?

한국 디자인에 담론이 없다는 것은 결국 한국 디자인에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니죠. 아까 말했듯이 행하되 알지 못한다, 이거예요. 자기가 행하는 것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행한 것 아닌가요? 물론 의미가 없는 삶도 아무런 문제 없고 불행하지 않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어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죠. 이 세상에 절대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담론 없이도 살 수 있습니다. 다만 담론 없는 삶은 불행하다는 것이죠. 우리는 절대로 있어야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적으로 좋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요즘 같아서는 담론은 생존에까지 관련된다고 생각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환경 문제인데 이 환경 문제를 고려하지 않으면 요즘에는 디자인 행위 자체가 거부당하기도 하고, 소비자에게 비판받기도 합니다. 현재 유럽에서는 일정한 환경 기준에 적합하지 않으면 생산이나 수입 자체가 불가능한 법규를 지속적으로 제정해 나가고 있습니다. ‘디자인 담론이 왜 필요하냐’라는 질문에 대해 한마디로 답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가치의 공유를 위해서’라고 정리하고 싶습니다. 산업화 시대의 디자인은 단순히 기능을 실현하는 오브제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했지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디자인은 사인과 스타일 디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의 가장 극한적인 예는 브랜드라고 총칭할 수 있는데요, 이는 브랜드에 담긴 일종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와 너의 이야기가 다름으로써 차별화되는 그것을 파는 시대예요. 일종의 브랜드로 차별화되는 개별적인 정체성을 파는 것이지요. 하지만 현재 디자인은 새로운 가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스타일로 차별화 되는 것이 아닌, 무언가 다른 가치를 지닌 디자인. 이것은 윤리적인 소비자의 등장 등으로 미루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소비가 이제는 정체성 추구나 기능의 만족이 아닌 어떤 윤리적인 가치와 연관되기를 바라는 것이고, 이것의 반영을 디자인 전 분야에서 요구하고 있다고 봅니다.

조 교수님이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담론의 창조적 가치예요. 담론은 매우 창조적인 것이에요. 우리 디자인계에서 담론을 무시하고 무관심한 것은 담론을 쓸데없는 것, 비창조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담론의 창조적인 가치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담론에 대한 속류화된 이해가 ‘담론이란 쓸데없는 말장난’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거죠. 담론이 의미의 차원이라는 이야기는 결국 우리가 행한 것을 의미화하는 것, 그러니까 디자인 실행이 실행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미로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한국 디자인에 담론이 없다’라는 것은 결국 디자인 실행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그랬을 때 결국 남는 것은 실행의 적나라함 그 자체, 일차원성 같은 것이겠죠. 이는 미술평론가 성완경의 표현을 빌리면 ‘찬란한 현금 박치기 정신’, 바로 그것이죠. 어디에서든 의미가 증발해버리고 나면 남는 것은 현금 박치기밖에 없죠. 과연 한국 디자인에 이것 말고 다른 게 있나요?

이런 말로 정리하면 어떨까요? 디자이너가 자기 스스로의 담론의 세계에 발 딛고 있지 못하면 결국은 타자의 담론 속에 휘말릴 수밖에 없지요.

그것이 결국 구호와 명령의 세계를 담론으로 착각하는 것이고….

그런 사이비 담론에 휩싸이는 오늘의 한국 디자인의 기형적 현실과 부딪힐 때마다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한국 디자인과 역사라는 문제입니다. 역사적 의식을 늘 따져가면서 살 필요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우리가 어떤 담론적 문제나 이슈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은 늘 역사적 인식을 근거로 하지요. 역사적 의식은 어떤 점에선 무의식적인 층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푸코의 에페스테메적 층위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국 디자인의 담론 부재 현상은 한국 디자인 역사 의식의 부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국 디자인이라는 돛단배가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기름이 떨어질 때까지 그냥 열심히 가는 것 아닌가 하고 심란해 질 때가 있어요. 나를 비롯해서 디자이너들은 자전거 페달을 밟지 않으면 넘어지니까 열심히 앞만 보고…. 실행의 과잉과 담론의 부재이지요. 오늘도 그런 기분입니다.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존재 이유를 자본주의적인 타율성에 부화뇌동해서는 찾을 수가 없지요. 시대와 함께, 문화와 함께 디자인이 가야 하는 곳을 가르쳐주는 것이 담론이라 생각합니다. 담론이라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죠. 여러 가지 관점, 가치와 자기 스스로를 교환해서 보는 것이 담론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디자인 담론 없는 디자인 행위는 시대와 호흡하는 자격을 우리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덴티티 문제와 관련이 많은 것 아닌가요?

당연히 아이덴티티와 관련이 있죠. 주체의 문제인데. 물론 우리는 주체가 아니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을 무슨 자연법칙, 물리법칙처럼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죠. 다만 불행하다는 것이죠. 지금 우리는 자연법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의 세계, 의지의 세계, 정신의 세계에서 ‘좋다, 바람직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담론으로 경쟁력을 확보하자는 이야기는 아닌거죠.

그거야 말로 담론을 모욕하는 것이죠.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잖아요. 디자인 또한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여야 하고요. 제 자신이 디자인 담론을 생산하는 사람이지만, 담론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요. 다만 담론은 우리가 디자인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고, 또 그런 과정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디자이너들은 자기가 만드는 것에만 관심을 가져왔어요. 그 만드는 것에 대해 사용가치를 넘어 활용과 사용, 가치까지도 생각해야 시대적 담론을 기반으로 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디자인이 가지고 있는 패턴 중 하나가 주문생산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디자인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어요. 디자이너 스스로가 자기를 열고 세계로 나아가 세상과 만나는 능동적 자세가 필요합니다.

디자인 담론이 만들어질 수 있는 조건으로 저는 한국 디자인계에 분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봐요. 한국 근대성 일반이 그렇지만 디자인계는 특히 더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몇십 년간 한국 디자인계가 생산한 것은 디자인 기술자, 즉 ‘디자이너’ 한 가지밖에 없잖아요. 이건 뭐 소품종 대량생산도 아닌, 거의 단품종 무한생산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한국 디자인계가 엄청나게 성장했다고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결국 단 하나의 주체만을 무한생산한 것이거든요. 아무리 한국 사회가 획일적이라고들 하지만, 저는 디자인계처럼 이렇게 획일화된 영역은 한국 사회에서도 드물다고 봐요. 일 년에 3만 몇천 명이 졸업하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단 한 종류의 디자인 전문가만 생산한다고 봐야죠.

조현신
" 디자인이론, 그것을 담당하는 전문적인 강사나 교수를 양성하는 기관이나 프로그램은 없습니다. "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시각디자인대학원 석사를 마쳤다. 영국 미들섹스 대학교에서 디자인 역사 석사 취득했고, 영국 포츠머스 대학교의 미디어 앤 아트 박사과정 중이다. 국민대학교 테크노 디자인 전문대학원 디자인학 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전국 대학에서 한 학기에 개설하는 이론 과목은 평균 3.5과목입니다. 학생들이 한 학기에 한 과목씩 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커리큘럼의 제목을 보면 디자인 이론, 디자인 역사, 디자인 비평, 디자인 문화, 디자인 사회사 등 제목 자체에서도 디자인 행위나 결과물의 의미 자체를 묻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담당하는 전문적인 강사나 교수를 양성하는 기관이나 프로그램은 없습니다. 실기하는 사람, 미학 하는 사람, 예술 하는 사람, 문화사 공부하는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공부해서 가르치다 보니 어떤 합의된 디자인 개념이나 디자인에 대한 시각, 정리된 용어도 없습니다. 즉 디자인 자각이 없어요. 두 번째로 느끼는 것이 담론의 자세와 담론의 방법이 바뀌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디자인 비평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근대성의 성격에 대한 논의가 디자인계에서는 안 되어 있는 것도 문제이고, 또한 그나마 나오는 여러 가지 번역서나 비평서 등을 살펴보면 그 방법론이 너무 무겁고 서구 위주의 담론 중심으로 편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세대를 위한 담론은 그 방법이 무겁고 당위적인 담론에서 세대 감각에 맞는 논의 방식과 글쓰기와 관련된 형식적 고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로 바꾸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의료계, 문화계, 법학계 등 디자인계 외의 여러 분야와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소통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동안 감각과 몰입된 창조 행위로만 디자인 결과물을 생산해서 그것으로 사회와 대화를 하다 보니, 가장 보편적인 대화 수단인 언어 능력이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디자인 행위나 결과물에 대해 설득력 있고, 생활상에서 공감할 수 있는 담론을 만들어 다른 분야와 통섭을 할 능력을 지니는 것, 이는 사실 디자인 박사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야 할 과제라고 봅니다.

담론이 생산되는 것이 중요하지, 담론이 대중화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요?

담론의 대중화는 물질로 구현되었을 때 궁극적으로 가능하겠지요. 거의 담론으로 의식되지 않는 담론의 상태죠.

이것을 하는 이유가 모든 디자이너가 담론적인 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죠?

담론을 의식하지 않아도 우리는 담론적 장 안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담론의 장이 어떤 것인지가 문제지요. 위에서 말한 사이비 담론의 장도 있는 거고, 서양 팝송 같은 담론의 장도 있고….

결론적으로 우리의 디자인은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거죠. 최근 우리 사회에 디자인 담론이 또다시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언제 한번 다루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이것이 ‘67년 체제’ 이후의 또 다른 단계의 시작이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최근의 새로운 지배 담론에 대해서도 비판적 점검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디자인의 스펙터클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 디자인이 제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실행의 과잉과 담론의 빈곤이라는 현실을 넘어서 실행과 담론이 상호 작용하면서 균형을 맞추어가야 하는데, 최근의 현상을 보면 이제는 디자인이 실행을 넘어서서 아예 사회적 스펙터클화되고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전혀 새로운 국면의 전개이고 매우 주목해야 할 문제인데, 저는 이런 현상을 매우 우려하고 있습니다.

담론의 총체성이 중요합니다. 어차피 지구적으로 사회라던가 역사 속에서 행위를 하는 의미를 묻는 최종적인 질문으로서 자기 주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가라는 아주 간단한 질문을 하나 주기 위해서 어렸을 때는 그냥 지나칠 수 있겠지만, 특정적으로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의미를 두는 해결점을 주는 것이 담론의 역할이지요.

디자인이란 의미를 생산하는 행위이다. 담론은 디자인이 생산해내는 그러한 의미를 밝혀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디자인 담론은 디자인이 생산해낸 의미를 독해하고 창조적으로 해석해냄으로써 우리를 의미로 충만한 존재, 즉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의미와 관련해서 미닝(meaning)과 센스(sense)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미닝은 상투화된 창조성이 고갈된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화폐에 비유하자면 수량적 기능에 비유할 수 있겠지요. 그것을 끝까지 밀고 가면 센스와 만나지요. 센스라는 것은 굉장히 자기 파괴적이면서 사회적인,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의미를 말합니다. 최선생님이 말한 의미를 이렇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디자인적 담론의 의미를 이렇게 볼 때 디자인은 인문학과 만납니다. 디자인 담론은 인문과의 만남을 피 할 수 없지요.

그동안은 감각을 체험화시키거나, 자기의 체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감각을 습득하고 집어넣었잖아요. 근래에 교육 이론에서 표방하고 있는 구성주의적 교육이 아니라, 밖에서 이미 이루어진 이론, 그것도 환경과 역사, 체험이 다른 서구의 이론을 중심으로 교육을 시켰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있는 곳의 현실과 역사성, 사회성 등 총체적인 정서 구조까지 반영한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국 디자인의 담론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은유적인 표현을 하자면 스님이나 수도사 같은 사람들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진리 추구 방법을 보여줍니다. 이런 자세, 즉 배우거나 외부에서 습득을 중심으로 한 디자인이 아닌 구체적인 생활의 장을 고려하고 배우고 이해하면서 디자인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결국 성찰적인 자세와 몰입적인 자세가 자연스럽게 혼재되어 있는 디자인 행위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사실 우리나라 교육 과정의 체제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디자인 행위는 한 디자이너에게 감각이 첨예한 일정 시기와 그 시기 이후 자신의 디자인관이나, 행위에 대한 의미를 묻는 과정으로 연결되면서 더욱 성숙된다고 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 디자이너 프로페셔널이 거의 40세에 끝나는 이유는 결국 감각이 밖에서 투입되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앞에서 정 선생님이 말한 아이디어 편향의 디자인관에 대한 언급과도 통합니다. 그러한 감각은 일정 기간 지나면 자연히 사라지지요. 하지만 체험과 생활에 대한 관찰, 이해를 바탕으로 한 감각은 성찰을 통해서 밖으로 다시 끄집어내는 과정을 거친다고 봅니다. 이러한 과정이 없기 때문에 감각이 바닥나면 디자인 행위도 끝난다는 의식이 퍼져 있다고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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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강철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08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