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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사람을 이해하는 디자이너 이경미
음식물 처리기 루펜으로 중소기업 루펜리의 성공 신화를 이끌며 일약 스타 디자이너로 떠오른 이경미. ‘눈떠보니 스타가 된’ 줄 알았는데, 그는 이미 25년 경력의 베테랑 디자이너다. 수 많은 역경을 헤쳐온 그의 내공이 어느 누구 못지 않았고, 지난 세월은 그를 독하기보다 더욱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 냄새 나는 진짜 디자이너로 만들어 주었다.

profile
1986년 홍익 대학교 미술대학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현대자동차에 입사했다. 4년 동안 자동차 디자이너를 거친 뒤 LG전자로 옮겨 10년을 근무했다. 현재 2000년 설립한 제품 디자인 전문회사 사이픽스를 이끌며 아이리버, 루펜리 등 여러 기업의 디자인 아이덴티티 구축을 도왔고, 다양한 제품을 통해 단순하고 세련된 스타일을 가미한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처음 들어간 곳은 어딘가요? 1986년에 현대자동차에 입사했어요. 학교에서 기업설명회가 있었는데, 그때 참석했던 박종서 당시 현대자동차 디자인연구소 소장(현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 교수)에게 반해서 입사를 결심했습니다. 현대자동차 디자인연구소는 울산에 있었기 때문에 집을 떠나 자연스럽게 독립할 수 있는 부분도 매력적이었고요. 더욱이 기숙사 생활을 언제나 해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곳에서 4년 근무했는데, 저에게는 자동차의 생산 과정과 디자인의 역할에 대해 배운 소중한 시기였습니다. 인생의 롤 모델이 된 박종서 교수를 만난 것은 특히 행운이었죠.

이후 어디로 옮기셨나요? 현대자동차에서 나와 1990년에 LG전자에 입사했습니다. 중간에 대학원에 입학해 공부도 했고요. LG전자에 10년 근무했는데, 처음엔 오디오 팀에 있었어요. 시장이 점차 가족 전체가 사용하는 ‘가전 제품화’에서 개인이 사용하는 ‘개전 제품화’로 변하면서, 이전에 잘나가던 분야가 사장된 시장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오디오 부문입니다. 당시 오디오 디자인 팀은 LG전자에서 제일 잘나가는 곳이었죠. 그 밖에도 비디오 팀, 휴대폰 팀, 기획팀도 거치며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재미있게 많은 것들을 배웠던 시기입니다.

대기업에서도 꽤 자리가 잡히셨을 것 같은데, 독립은 어떻게 결심하게 되셨나요? 렌더링의 표현방법이 2D에서 3D로 넘어 가던 시기가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좀 더 경쟁력을 갖고 싶어 3D 프로그램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는 사람 소개로 3D관련 프로그램을 배우고자 찾아간 사람이 지금 저희 박철주 팀장이에요. 당시 박 팀장은 홍대에서 3D 프로그램을 잘 다루기로 유명했어요. 그렇게 배우기 시작했는데, 문득 ‘저렇게 잘하는 친구랑 같이 일하면 되지, 굳이 이 어려운 것을 공들여 배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침 대기업 안에서가 아니라 제 나름대로의 꿈을 펼치고 싶다고 생각하던 시점이어서 2000년에 박 팀장 그리고 다른 멤버와 함께 사이픽스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주로 어떤 작업을 하셨나요? 2D가 아닌 3D로서의 제품 디자인을 사이버상에서 구현해보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그런데 그 당시는 인터넷 환경이 이를 뒷받침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쉽지 않았지요. 사실 인생에서 큰 실패를 경험하지 않았던 저로서는 그때 참 많이 힘들었어요. 원하는 학교와 회사에 들어가 만족할 만큼의 성과를 내면서 다니다가 사회에 나왔는데,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거예요. 그때의 당혹감이란….
대기업이라는 간판이 사라지니 인간 이경미 하나밖에 안 남았던 거죠. 어쨌든 작은 일이라도 하나 들어오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신뢰가 쌓여 그 고객이 다음 일을 또 부탁하고,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기도 했고요. 이렇게 하나 둘씩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이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제품 디자인계에서 사이픽스의 디자인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는데, 2007년 루펜을 디자인하며 좀 더 이름이 알려졌지요. 그래도 그때의 마음고생
했던 기억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약이 됐기 때문에, 지금 도 그때를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기업에서 독립한 사람은 그 인맥으로 많은 일을 하던데, 잘 안됐나요? 아니요.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는 생각이었어요. 저는 그런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 자체로 보면 그 기업의 문화와 방향, 철학을 알고 있기 때문에 좋은 파트너가 될 수도 있지만, 문제는 거기에 의존해 다른 일들을 안 하게 된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다 보면 그 일만 받아서 하게 돼 변화하는 환경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죠. 클라이언트도 거래하던 디자인 업체와 어느 정도 일을 하고 나면 다른 곳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게 마련이거든요. 그렇기에 다른 클라이언트를 만들지 못한 업체들이 모기업과의 프로젝트가 끝난 뒤 회사의 운명도 같이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습니다. 야전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은 다음 자기가 잘 알고 있는 모기업 회사와 철학을 공유하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가는 게 더 바람직한 관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루펜 이야기를 해보고 싶네요. 사이픽스를 세상에 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한데, 시장 반응은 어느 정도였나요? 저희가 루펜을 디자인하기 전에도 국내에 음식물 처리기 시장이 존재하기는 했었어요. 그런데 시장의 크기도 굉장히 작았고,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도 별로 없었죠. 저희가 기존의 루펜을 새롭게 디자인해 시장에 내놓았는데, 처음 홈쇼핑에 등장해 1시간에 2000대가 매진됐고, 홈쇼핑 방영 두 달만에 100억 원의 매출을 올린 거예요. 이후 1년 만에 100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고요. 루펜 디자인에는 이희자 루펜리 대표가 갖고 있던 친환경 철학을 담고자 했어요. 음식물이 쓰레기일까요? 전 쓰레기가 아니라 재생산되는 자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음식물 쓰레기통’이라는 이름을 ‘음식물 처리기’라고 바꿨죠. 자원을 담는 그릇을 의미하는 네모난 형태에, 재생산한다는 의미를 담은 원을 아이코닉하게 디자인했어요. 좋은 제품이란 ‘소리 없는 비명에 귀 기울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전 제품들은 설치하기도, 사용하기도 불편했고, 너무 컸고 또 음식물 처리기 비용으로 지불하기에는 너무 비쌌습니다. 우리 삶이 음식물 처리기라는 제품을 받아들여 좀 더 상쾌해지기 위해선 많은 부분을 바꾸어야 했죠. 루펜은 외형상의 스타일뿐 아니라 기획에 있어 모두 새로 디자인한 예입니다. 싱크대 밑에 설치하던 방식을 프리 스탠딩 방식으로 바꿔서, 자기가 원하는 위치로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고, 45만원 정도 하던 가격을 절반 이하로 낮추었어요. 가격도 디자인의 전략 중 하나라고 생각했거든요. 전체적으로 일반적인 프로젝트와는 접근 방식 자체가 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3 아이리버 유니트2 시스템 미래의 홈 유비쿼터스를 이끌 홈 네트워크 멀티미디어 시스템. 심플한 리모컨은 펼치면 사용하기 편한 키보드 입력장치로, 접으면 IP 전화기로 쓰인다.
2 아이리버 웨이브홈(Wavehome), KT 스타일, 2009년 출시
‘쿡하세요!’의 주인공으로 기존 집 전화기에 인터넷 선을 이용한 서비스 플랫폼으로 전화기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기존의 집 전화기 이미지에서 탈피해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한 제품이다.


아이리버와도 많은 작업을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이리버하고는 올해까지 4년 정도 함께했습니다. 당시 최문규 아이리버 부사장과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그분은 제가 만난 모든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 중 가장 탁월한 감각과 디자이너 정신을 갖고 있는 분이라고 생각해요. 디자이너보다 더 디자이너 같다고 할까요. 미키마우스 MP3 플레이어를 개발할 때 일이 생각나네요. 어느 무더운 날로 기억되는데 사이픽스에 최 부사장이 회의하려고 오셨어요. 그때 미키마우스를 모티브로 한 외국 회사의 휴대폰을 보고 있었는데, “우리도 디즈니에게 MP3를 팔아볼까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바로 그 자리에서 찰흙을 동글게 말아 미키마우스의 얼굴과 귀를 만들고, 박 팀장이 바로 3D로 구현했죠. 우리는 이를 ‘5분 프로젝트’라고 불러요. 처음에는 아이리버 내 반발이 굉장했어요. 심지어 사장이 1000개, 부사장이 1000개 사면 더 이상 안 팔린다고 했대요. 그런데 결국 그 제품이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월트디즈니 관련 제품 중 매출액이 10위 안에 들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죠. 담당 직원 말로는 80만 개쯤 팔렸다고 하더군요. 대부분의 임원들이 반대했던 일을 당시 아이리버 양덕준 사장과 최 부사장은 확신을 갖고 추진하셨어요. 그때 최 부사장이 중국이 가격 경쟁으로 밀고 오는 이 시장을 더 이상 뺏겨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나는데, 어떤 사명감을 느낄 수 있었어요. 루펜리도 그렇지만 아이리버는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클라이언트입니다.

최근에는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셨나요? TV에서 ‘쿡하세요!’라는 광고를 본 적 있죠? 그 광고에 나오는 삼각형으로 된 심플한 전화기를 디자인했어요. 아이리버에서 제조를 맡고 KT에서 ‘스타일폰’이란 이름으로 판매하는 제품이에요. 이 제품은 원래 인터넷 선을 기반으로 하는 전화기라서 컴퓨터 옆에 놓여야만 했어요. 그런데 저희는 뒤에 나온 선을 깨끗이 정리하고 싶었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사용자가 원하는 곳 어디든지 놓고 쓸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이례적으로 KT 측에서 디자인 의도를 살리기 위해 큰돈을 들여가며 그 제품을 위한 기술(전력선 통신-PLC) 개발을 해주었어요. 한번 시장이 구축되면 이에 맞춰 더 다양한 제품들이 계속 개발돼 나올 수 있을 거예요. 나중에 들은 얘긴데 KT에 새로 부임한 사장님이 저희 디자인을 무척 마음에 들어하면서, KT 제품은 앞으로 이렇게 나와야 한다고 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클라이언트의 신뢰가 대단한 것 같아요. 신뢰를 얻기 위한 비결이 있나요? 처음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그 회사가 지향하는 방향부터 알려고 해요. 왜냐하면 그 회사가 가려는 방향을 알아야 제품의 방향도 알 수 있고, 그래야 제품 디자인 전략이 세워지기 때문이에요. 새로운 제품을 창출하는 부분은 클라이언트의 고민일 뿐만 아니라 저희에게도 고민입니다. 스타일을 만드는 작업 과정의 후반부는 저희가 들이는 에너지의 30%도 되지 않을 거예요. 고객 입장에서는 스타일이 눈에 띄기 때문에 그것으로 사이픽스를 평가하겠지만, 그 스타일을 만들어내기 이전의 과정이 더 중요하고 더 많이 공을 들이고 있어요. 그리고 갑과 을의 자세를 취하려는 분들의 의뢰는 가급적 받지 않습니다. 오만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진행하는 프로젝트 결과는 뻔하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에요. 거기에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가 더 크죠. 루펜의 경우 이희자 대표가 제안서를 받고 나서 저희에게 “작품에 가격을 매길 수는 없습니다. 무조건 제시하는 방향으로 따르겠습니다”라고 단 두 줄만 적어 메일을 보낸 적이 있어요. 이런 메일을 받고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클라이언트가 그렇게 디자이너를 대하면 디자이너로서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어요. 저희는 그저 스타일만 “예쁘게 디자인해주세요”가 아닌, 사이픽스와 함께 사업 전략을 짜기를 원하는 분들은 언제든지 환영해요.

이쯤에서 사이픽스의 디자인 철학에 대해 묻고 싶은데요. 저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더욱 마음을 쏟는 부분은 ‘유니버설(universal)’인데, 저희는 끝에 영문 L을 하나 더 붙여 ‘uni-vers-all’이라고 표현합니다. ‘모두’의 의미를 더 강조한 것이죠. 소외되는 이 없이 누구나 함께 사용할 수 있게 디자인하는 것. 어린이, 여성, 노인은 물론 장애를 가진 분들까지도 말이죠. 장애인이 가장 싫어하는 말은 ‘장애인용’이라는 거래요. 인식의 차별이 없는 제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런 제품이 결국 비장애인에게도 더 편리한 제품일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장애인들은 일반인보다 죽음에 대해 예민합니다. 아마도 죽음에 더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렇기에 우리가 보지 못한 부분을 볼 수도 있죠. 장애의 유무를 떠나 함께 생각을 나누면서 공통적으로 불편한 점들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해명하고 고쳐나가는 것. 그 과정이 바로 인간이란 생명체를 조명하는 법이며, 그것이 디자인의 시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반기에는 성공회대학교 성베드로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과 함께 작업할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이 이렇다 보니 아무래도 회사 직원들은 더 힘든 면이 있을 거예요. 조금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저 때문에 더 힘들게 하곤 하니까요. 그래도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면 그런 부분은 앞으로도 계속 고집할 생각입니다.

다양한 클라이언트를 만날 것 같은데, 클라이언트를 잘 상대하려면 어떤 기술이 필요한가요? 저는 골프를 치는 사람도, 술을 잘 마시는 사람도 아니에요. 그렇기에 고객을 만났을 때 고객의 얘기를 듣는 것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죠. 음식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잖아요. 내가 이 사람한테 정말 맛있는 음식을 주고 싶다고 생각해야 진짜 맛있는 음식이 된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세상 이치가 똑같기에 디자인도 결국 같다고 생각해요. 내가 들인 마음의 정도껏 결과도 나온다고요.


1 사이픽스 가습기 하나의 오브제처럼 보여 인테리어의 한 요소처럼 잘 어울리게 한 디자인 제안이다.
2 루펜 물방울 가습기, 2008년 출시 물방울을 모티브로 디자인해 감성적 직관성을 높인 제품. 인테리어 오브제로도 부족함이 없도록 디자인해, 매년 바꿔야 하는 제품이 아니라 몇 년 동안이라도 한 모델로 고객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3 루펜 LF07, 2007년 출시 음식물 처리기 회사 루펜리와 사이픽스를 세상에 알린 제품이다. 자원을 담는 그릇을 의미하는 네모난 상자와 음식물을 재활용한다는 의미를 원으로 아이코닉화해 디자인에 적용했다. 홈쇼핑 1시간 만에 2000대 매진, 방영 1년 만에 1000억원의 매출을 올린 히트 상품으로 미미했던 음식물 처리기 시장 자체가 커질 만큼 크게 성공했다.


오랜 세월 디자이너로 살면서 여성으로서 받은 불이익은 없나요? 여성이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 기억은 없는 거 같아요. 오히려 여성이기 때문에 디자인하기 더욱 좋다고 생각합니다. 골프를 치거나, 술을 마시는 행위는 사실 ‘시간을 함께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와 소통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그런 시간을 갖기 위해 수단이 필요한 것이죠. 저는 단지 골프나 술이라는 수단을 취하지 않았을 뿐이고요. 그 대신 맛있는 음식을 먹기도 해요. 방법에 대한 차이지, 그것 때문에 안 된다라는 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클라이언트에게는 디자인으로 만족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비정상적인 술이나 골프접대의 문화를 만든 것이 기성 세대인 만큼 우리 문화를 건강하게 바꾸는 것 또한 기성세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인문학 공부에 빠져 있다고 하던데요? 인문학 공부를 시작한 지난 몇 달 동안 참 행복했습니다. 어느 수업 시간에 신영복 선생께서 저한테 ‘통할 통’ 글자를 손수 써서 선물로 주셨어요. 제가 디자이너니까 사람하고 소통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에서 주신 것이죠. 디자인은 인간을 위한 것이니만큼, 사람을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해서 인문학을 공부합니다. 인간은 인생에 있어서 한번은 공부할 마음이 생긴다던데, 지금 제가 딱 그 상태인 것 같아요. 이 나이에 공부 때문에 가슴이 떨릴 줄 누가 알았겠어요? 역사는 기록이잖아요? 인간의 경험, 기록을 탐구하고, 평가하고, 지금 시대에 맞춰서 다시 평가하고…. 또 그 부분을 나름대로 다시 정리하면서 제 삶의 경험까지 포함해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드는 것 같아요. 지금이 저에게는 디자인의 가치관을 새롭게 확립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위한 디자인을 한다면서 이제야 사람 사는 공부를 하고 있으니 떨릴 수밖에요. 한국적 주제의 세계화를 더 공부하기 위해서 심화 과정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어요. 하반기에는 더 재미있게 공부할 계획입니다.

사회 초년생일 때와 지금 디자인에 대한 생각에 변화가 있나요? 이전에는 디자이너로서의 제 작업을 즐겼다면, 지금은 ‘디자인의 힘’을 믿게 된 게 가장 큰 차이입니다. 디자인은 ‘사람을 생각하는 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디자이너가 의사보다 못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사람을 위한 디자이너의 많은 배려들이 결국 우리의 생활을 바꿀 뿐만 아니라 사회를 긍정적으로 바꾸고 개선할 수 있는 것이죠.

1 아이트로닉스(iTronics) ITE 200, 2008년 출시 톨게이트를 통과할 때 사용하는 하이패스 전용기기로 두께는 기존과 같으나, 외각 형태 라인의 미묘한 변화로 더 얇아 보인다.
2 아이트로닉스 ITB 70, 2009년 출시 주행 정보를 기록하는 데 쓰이는 블랙박스로 자동차 앞 유리 부근에 놓여 쓰인다.
3, 4 아이리버 NV, 2007년 출시 카메라가 달려 있는 신개념 내비게이션으로 하이엔드 오디오 볼륨에서 느낄 수 있는 고급스러운 조작감을 내비게이션에 적용했다. 감성 시그널 듀얼 디스플레이의 휠 클릭 시스템을 탑재했고, 내비게이션 뒷면을 깨끗이 정리해 밖에서 보이는 부분에도 신경 썼다.


회사 운영의 철학이 있으신가요? 외부에는 주로 대표들이 노출되잖아요? 프로젝트에 대한 기사가 나와도 함께 일한 디자이너 이름은 잘 나오지 않죠. 디렉팅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기는 한데 그 사람이 모두 작업한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작업한 사람들로서는 성취감을 느끼기 힘들 수 있습니다. 사이픽스 역시 개인 회사가 아니라 여러 디자이너가 유기적으로 함께하는 살아 있는 공동체라고 생각해요. 오늘 같은 인터뷰는 대표의 역할에 대해 조명받는 것이라고 생각되고요.

쉴 때는 무엇을 하시나요? 주말은 거의 휴대폰을 꺼놓고 지낼만큼 제 필름을 끊어놓는 시간이에요. 경기도 양평에 작은 촌집이 있어서 밭도 일구고요. 서울 태생으로 줄곧 서울에만 살아서 그런지 자연을 잘 몰랐는데, 자연을 접하면서 배우는 게 정말 많아요. 겨울에 땅이 얼고, 봄에 새싹이 돋잖아요? 이때 언 땅이 부드러워져서 새싹이 올라오는 게 아니더라고요. 새싹이 자신의 힘으로 언 땅을 들어 올리고 땅 위로 나오는 거예요. 에너지가 부족하면 거기서 고꾸라져 죽는 거죠. 또 고추 옆에는 고춧잎하고 비슷한 풀들이 살아요. 허브 옆에는 허브와 비슷한 종류의 풀들이 자라고요. 그 생존의 치열함에 숙연할 때도 있습니다.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한 해에 사회에 진출하는 디자인 전공 학생 수에 비해 그들이 일할 환경이 너무 적은 것 같아요. 우리나라만큼 디자인 인력을 많이 배출하는 나라도 드물잖아요. 이 엄청난 디자인 에너지를 어떻게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친구들을 위한 놀이터를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분기별로 한 번씩 아이디어를 모을 예정이에요.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 심사위원까지 모셔 공정하게 심사할 것이고요. 그렇게 뽑힌 디자인을 사이픽스가 생산과 유통・영업을 맡는 것입니다. 물론 누가 디자인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표시할 거고요. 거부감이 없는 정도에서 제품에 디자이너의 이름을 새겨 넣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어요. 콘셉트는 물론 이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이 느꼈으면 하는 생각도 함께 담을 거고요. 우리나라 국민의 유전자에는 굉장한 창의력이 들어 있다고 믿어요. 그런 창의력 있는 디자이너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제가 선배들이 갈고닦아놓은 놀이터에서 이만큼 성장했듯이, 이제 저도 후배들을 위해 장을 마련하려는 것입니다.

디자인을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살면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새롭게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죠.


5 통할 통 디자인하는 사람은 사람과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뜻을 담아 성공회 대학교 신영복 교수가 이경미 대표에게 친필로 써준 글로 사이픽스 사무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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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김신 편집장, 최태혁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09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