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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그날의 당혹감을 서술하는 건축적 스토리텔링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


성미산 자락 조용한 주택가 골목에 들어서면, 짙은 회색 전벽돌 담을 마주하게 된다. 사진 왼쪽 끝에 보이는 작고 좁은 문이 입구다. ©김두호 

1992년 1월 8일 수요일,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작된 집회는 오늘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수요 집회가 11년째 이어지던 2003년, 집회에 뜻을 함께하는 이들 사이에서 할머니들을 위한 기념관을 짓자는 움직임이 일었고, 2004년 정식으로 박물관건립위원회를 꾸렸다. 역설적이게도 기념관이 헤쳐나갈 난관은 할머니들의 처지와 꼭 닮아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금 5억에, 일본과 우리나라 시민의 모금액 15억 원을 간신히 모아 20억의 빠듯한 자금으로 시작한 프로젝트는 원래 서대문 독립문 옆 독립공원 부지에 들어설 것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부 보수 단체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감 정을 추스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마포구 성산동 주택가에 위치한 100평 남짓한 30년 된 주택에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이 들어섰고, 2012년 어린이날 문을 열었다. 당시 신진 건축가 그룹 중 일찌감치 주목을 받던 장영철, 전숙희 소장의 와이즈건축이 젊은 건축가를 대상으로 한 설계 공모에서 당선돼 프로젝트를 맡았다.

“보통 너른 공터에 기념비적 장소로 건립하는 추모관 대신 우리는 건축적 스토리텔링을 통해 은근히 이야기를 끌고 가는 서술적인 공간을 생각했다. 커다란 제스처를 취할 수 없던 물리적 제약도 있었지만, 직설적이기보다 생각할 여지를 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봤다.” 와이즈건축의 건축가 장영철은 말한다.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측에서는 역사를 아카이브하는 전시 공간을 최대로 확보하고자 했고, 건축가 입장에서는 사이사이 추상적인 빈 공간을 두어 은근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흐름을 이어가고자 했다. 이 부분의 조율이 난관이라면 난관이었다. 결국 최대한 외벽과 동선 사이에도 중요한 해석을 담은 디자인을 군데군데 심어놓는 것으로 의견의 격차를 좁혀갔다. 




2층 테라스에서 본 전벽돌 스크린 안면. 건물과 스크린 벽 사이의 통로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벽돌이 쌓인 틈새에 사람들이 헌화를 하거나 메모를 올려두기도 한다. ©김두호 

 1층에서 2층 전시관으로 올라가는 표면을 걷어낸 계단 벽면은 벽돌 구조 자체가 패턴이 된다. 할머니들의 메시지를 새겨 넣어 전시공간이자 조형 예술적 공간을 마련했다. ©김두호 

짙은 회색 전벽돌 건물 아래 나 있는 좁은 대문을 지나면 또다시 좁은 통로가 나온다. 어딘지 잘 모르는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내러티브가 육중히 건물을 감싼다. 웅장한 상징물은 없지만 외벽 하나도 의미와 기능을 꼼꼼히 활용했다. 듬성듬성 여백이 있게 벽돌을 쌓은 스크린 벽은 틈새로 밝은 빛을 통과시키는 동시에 작은 선반, 비석 혹은 제단으로 기능해 헌화나 메모 등 방문객의 흔적을 기록한다. 좁고 낮고 어두운 내부 공간, 축축함이 느껴지는 지하 공간이 이어지고 계속 기분은 무겁다. 2층 일반 전시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들어서야 밝은 빛이 들어오는데 길목의 벽돌 중간중간 새겨진 할머니들의 분노와 회한을 담은 문구들이 다시 한 번 발걸음을 잡는다.

중정처럼 천장이 뚫려 1층과 2층을 관통하는 벽에는 이 기념관에 마음을 보탠 8000여 명의 이름이 빼곡하다. 마지막 동선을 따라 야외로 나오면 가든 디자이너 권춘희의 손길이 닿은 야생화 뜰이 나온다. 최근 개봉한 영화 <귀향>에서 14살 정민이 나비를 따라 걸어가던 흙길에 피어 있을 것 같은 야생화가 사계절 꽃을 피운다. “추모 기념관은 분명 희생자를 추모하는 곳이지만 방문객이 스스로를 성찰하게 하는 여백을 주는 공간이어야 한다” 고 말하는 건축가 장영철의 의도가 잘 드러나는 곳이다.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은 와이즈건축의 포트폴리오에서도 의미가 깊다. 처음 시도한 공공 건축물이자, 와이즈건축 하면 떠오르는 ‘전벽돌’ 스타일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박물관과 같은 공공 건축물은 사회적 의미는 물론, 일반 건물에서 쉽게 하지 못하는 새로운 디자인을 과감히 시도할 수 있기에 건축가와 디자이너가 선호하는 프로젝트다. 부디 이들의 숨길 수 없는 실험 정신과 크리에이티브가 정치적, 감정적 사안을 만나 비통함은 중화시키고 잊지 말아야 할 이성적 판단을 지극히 감성적인 부드러움으로 상기시키길 바랄 뿐이다. www.wisearchitecture.com, www.womanandwar.net / 사진 제공: 와이즈건축



“추모 기념관은 분명 희생자를 추모하는 곳이지만
방문객이 스스로를 성찰하게 하는 여백을 주는 공간이어야 한다.” - 장영철(와이즈건축 공동 대표) 





 건물 바깥, 뒷집과의 사잇길에 난 길고 좁은 통로에는 철조망에 갇힌 검은 실루엣의 소녀벽화가 있다. ©김두호 

마지막 전시 시퀀스에 해당하는 1층 마당은 가든 디자이너 권춘희의 손길이 닿은 야생화 뜰로, 할머니들의 유년 시절 동구 밖 한가한 풍경을 표현한 치유의 공간이다. ©김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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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김은아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16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