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Design News
한국 영화의 미학을 진보시킨 디자이너 류성희 미술감독
영화 미술에 대한 개념조차 흐릿하던 2000년대 초, 프로덕션 디자이너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영화계에 출사표를 던진 이가 있다. 올해 칸 영화제에서 한국인 최초로 벌칸상을 수상하며 주목받고 있는 류성희 미술감독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영화 <아가씨>를 비롯해 <암살> <괴물> <박쥐> <달콤한 인생> <올드보이> 등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화제를 모은 대부분의 영화가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어릴 적 우연히 본 영화로 인해 설레고 꿈을 꾸던 자신의 경험처럼, 다른 이에게도 희망이 되는 영화 미술을 하고 싶다는 그는 지금 한국 영화의 미학적 발전을 위해 누구보다 힘쓰는 선배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한정된 예산이 오히려 영감이 되고 현장에서의 노동을 좋아한다는, 그야말로 진정한 크리에이터이자 실무형 디자이너인 류성희를 만났다.


1968년생. 홍익대와 같은 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했다. 학창 시절 우연히 영화 <엘리펀트 맨>을 보고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되기를 결심했다. 미국 아메리칸 필름 인스티튜트에서 영화 미술을 공부했으며 2016년 영화 <아가씨>의 프로덕션 디자이너로 제69회 칸 영화제에서 한국인 최초로 벌칸상을 수상했다. 1999년 <꽃섬>으로 데뷔해 <피도 눈물도 없이> <달콤한 인생> <괴물> <마더> <고지전> <변호인> <국제시장> <올드보이> <쓰리, 몬스터>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등 미장센으로 화제가 된 많은 영화의 미술을 맡았다.

영화 <아가씨>로 한국인 최초로 칸 영 화제 벌칸상을 수상했습니다. 어릴 적 부터 동경하던 상이라고 했는데, 수상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벌칸상은 1951년부터 칸 영화제에서 테크니컬 분야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룬 팀에게 주는 상이에요. 장뤼크 고다르의 영화를 찍은 전설의 촬영감 독 라울 쿠타르,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촬영감독 스벤 닉비스트 등 대부분 비주얼적 성취를 이룬 촬영감독들이 이 상을 받았고 2000년에 존경하는 장숙평 미술감독이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로 크리스토퍼 도일 촬영감독과 함께 이 상을 받았죠. 영화를 꿈꾸던 시절부터 칸 영화제의 수상작을 찾아보며 공부하고 꿈을 키웠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저 상을 받겠다’는 것을 감히 목표로 한 적은 없어요. 그저 동경하고 자극을 받은 것뿐이었죠. 2003년 이후 팀이 아닌 개인에게 주는 상으로 바뀌었는데, 주로 촬영 부문이 수상하고 미술감독이 단독으로 받은 적은 없어요. 그래서 제가 그 상을 받았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요.

영화 <아가씨>의 제작 배경이 궁금합니다.
영화 <올드보이>를 맡아 진행했을 때처럼 <아가씨>의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부터 영감을 받은 작품이에요. 많은 것을 시도해볼 수 있을 거라는 설렘이 있는 한편 위험한 매력을 느끼기도 했죠. 이전에 했던 <암살>이나 <국제시장>은 시대를 재현하는 것, 이를 장르화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어요. 반면 <아가씨>는 시대적 재현을 넘어서 당시의 정서적, 심리적 상황을 캐릭터와 공간 안에 내면화하고 시각화하는 작업이 중요했죠.

이 영화에서 특별히 공을 들인 장면이 있다면요?
낯설지만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디자인하는 것이 중요했어요. 일본인이 되고 싶어하는 조선인이면서 유럽을 동경하는 코우즈키의 집이 주요 배경인 만큼 유럽풍의 요소와 일본 문화의 요소, 한국적인 요소를 적절하게 조합하고자 했어요. 특히 히데코의 방과 코우즈키의 서재가 캐릭터의 내면을 함축적으로 시각화한 곳이에요. 관객이 잘 눈치채지 못하는 부분인데 겸재 정선의 산수화와 청자, 백자, 분청사기 등의 소품을 군데군데 배치했어요. 일본 특유의 장식성과 강렬한 색감의 미학, 그리고 이와는 또 다른 분위기의 유럽풍이 충돌하면 보는 이들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이미지가 강하고 불편하기만 했을 거예요.

그래서 유려하면서도 편안한 선과 색을 지닌 한국적 요소를 적절하게 섞어 중화시켰어요. 코우즈키의 서재에 있는 실내 정원은 4월 말 일본에서 장소 헌팅을 하던 중 떠오른 아이디어를 적용한 거예요. 코우즈키의 내면을 표현하기에 뭔가 1%부족하다고 느꼈는데,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한국의 정원과는 달리 일본식 정원은 상징적이고 인공적으로 꾸며놓은 방식으로 코우즈키의 이상과 욕망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이를 서재에 응용한 거죠. 실외의 정원을 서재 안으로 들여놓는 그의 지독한 탐미가 결국 자신을 타락시키고 붕괴될 것을 바라면서요.



<아가씨>의 서재 장면. 일본인이 되고 싶어 하는 조선인이면서 유럽을 동경하는 코우즈키의 욕망을 함축적으로 시각화한 공간. 

유럽풍의 서가와 일본식 정원에서 모티브를 얻어 디자인한 낭독회 공간 렌더링. 

일본과 유럽의 건축 양식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설계한 렌더링과 실제 무대 세트. 

일본과 영국의 문화를 대변하는 소품과 장식적 요소가 한데 잘 어울릴 수 있도록 과감한 색은 배제하고 묵직한 톤을 사용했다. 청자나 백자 등 유려한 선이 돋보이는 한국적 요소를 슬쩍 넣어 동서양의 상반되는 문화를 중화시켰다.

“좋은 예술가가 되려면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다녀라’라는 말이 있잖아요. 영화 속 주인공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으니 계속 공부하고 경험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미장센이 아름다운 영화는 줄거리와는 별개로 영화를 기억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방법인 것 같아요.
미국이나 이탈리아, 프랑스 등은 영화 미술을 위한 시대별 소품 창고가 따로 있을 만큼 자료가 풍성하고 체계적인 반면 국내 환경은 아직 그렇지 못해요. 항상 예산에 신경 써야 하고 시대적 고증이 필요한 소품을 만들어야 할 때면 그때마다 제작해야 하는 수고로움도 있어요. 이러한 사정을 구구절절 다 얘기하면 아마 눈물 없이 듣지 못할 거예요.(웃음)

영화 <올드보이>의 경우 이우진이 사는 펜트 하우스에 수로를 설치한 이유가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요.
예산이 적어서 항상 스트레스를 받지만, 예산이 많았다면 이러한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했을 거예요. 시나리오에는 이우진이 사는 공간이 상위 1%가 사는 펜트 하우스라고 명시되어 있었어요. 반대로 생각하면 99%가 그러한 집에 살아본 적이 없다는 말이잖아요. 저 역시 상류층이 어떤 집에 사는지 모르고요. 그래서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친 거죠. 좋은 가구로 꾸미는 방법도 있겠지만 근친상간의 내용이 있는 영화에 협찬을 해주겠다는 브랜드는 없거든요. 이우진의 과거에 누나가 댐에서 죽는 장면이 있잖아요. 이를 모티브로 물과 연관시켜 이미지화한 거예요. 파도를 출력해서 작품처럼 벽에 액자를 걸고 근사한 가구로 공간을 채우는 대신 집 안에 수로를 설치했죠. ‘집 안에 이런 것이 있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를 가능케 한 이우진의 재력과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이기도 해요. 가끔 이 같은 제한적 요소가 영감으로 이어질 때가 있어요.

캐릭터의 세계관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나요?
답은 하나예요. <아가씨>의 코우즈키 같은 변 태나 <살인의 추억> 연쇄 살인범의 마음을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몰입하지 않으면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어요. 그 사람이 되어 생각해보는 동시에 객관적으로도 바라봐야 해요. 이 두 가지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해요. 만약 순수 예술가라면 어느 한 감정에 치우쳐 몰입하고 파고들어 표현할 수 있겠지만, 제 일은 상업 영화이기에 관찰자의 시각에서도 바라봐야 해요. 그 간극을 조절하는 일이 재밌어요. 좋은 예술가가 되려면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다니라’라는 말이 있잖아요. 영화 속 주인공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으니 계속 공부하고 경험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서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영화 <암살>의 백화점 장면은 코우즈키의 저택을 짓는 것만큼 어려웠어요. 우리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일제 시대가 배경인 데다 자료도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백화점을 세워야 했죠. 일제 시대, 식민지 정책,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대해 공부하고 백화점이 모던 지식인이 다니던 곳이라는 정보까지 수집되자 당시 백화점은 조선인에게는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저항할 수 없게 만드는 고도의 식민지 정책의 일환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너무 매혹적인 악의 현신 그 자체였던 거죠. 매년 작품을 하면서 이처럼 계속 공부하고 상상해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비결이라면, 돈을 받으며 공부하는 기분이랄까? 너무 식상하고 모범적인 답안일 수 있지만 그 방법뿐이에요.

미술감독의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영화감독의 안목이 많은 영향을 미칠 것 같아요. 서로 어떠한 방식으로 의견을 나누는지 궁금합니다.
박찬욱 감독, 봉준호 감독, 김지운 감독 등 많은 감독이 워낙 취향도 좋고 비주얼에 대한 욕심도 많아서 함께 작업하면 즐거워요. 감독마다 개성이 제각각인데, 미술감독이라면 영화감독의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이 가장 우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고 디자이너의 취향대로만 작업하면 항상 비슷한 결과물이 나올 거예요. 저는 감독의 세계를 해석하고 변형해 나온 결과물 자체에 흥미를 느끼거든요.



<아가씨>의 주인공 히데코의 방 렌더링. 

히데코의 외롭고 차가운 성격을 반영해 블루톤을 메인 컬러로 사용했다.

<아가씨>를 비롯해 <올드보이> <쓰리, 몬스터> <박쥐> <피도 눈물도 없이> <달콤한 인생> <괴물> 등 화제를 모은 많은 영화의 미술 작업을 하셨는데, 특히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킨 영화를 꼽는다면요?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키거나 무언가 배울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해요. 장훈 감독의 <고지전>은 전쟁터의 무대가 된 산 하나를 디자인한 거예요. 사실 전쟁 영화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는데 시나리오를 보며 지옥도가 떠올랐어요. 전쟁 다큐멘터리 사진을 보면 싸우기 위해 매일 땅을 파고 쌓고, 다음 날 아침 눈뜨면 또 싸우고, 이러한 모습이 지금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잘못된 정책과 권력의 싸움에 희생되는 젊은이들이 느끼는 지옥도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 거죠. 그리고 당시 저는 사무실에 앉아만 있다 보니 흙을 밟으며 일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는데 <고지전>을 통해 장소를 헌팅하고 산을 깎아 세팅하면서 노동의 숭고함과 건강함을 제대로 맛봤죠.(웃음)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은 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해준 영화예요. 한국 영화가 점점 블록버스터급으로 변화하고 있는데, 소규모로 움직이 던 영화 미술팀이 이제는 영화 시장의 몸집만큼 체계적이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도예를 공부하고 27살에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어요. 당시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지금은 종교가 없지만 학창 시절 성당에 다닐 때 항상 이렇게 기도했어요. ‘하느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지치지 않게 찾아가길 바랐죠.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TV에서 영화 <엘리펀트 맨>을 봤어요. 사회와 개인의 문제, 아름다움과 추함에 관한 영화 내용도 좋았지만 시각적 질감에 압도당했죠. 대부분의 영화를 이야기나 배우의 매력에 홀려서 봤는데 ‘만듦새’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한 영화였어요. <엘리펀트 맨>을 보며 영화가 불특정 다수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인생을 바꿔줄 수 있는 희망적 매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 이후 막연히 영화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이러한 개념조차 없었어요.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모르니 무언가 만들 수 있는 학과인 공예과를 선택한 거예요. 하다 보니 도예가 재밌어서 대학원에 진학해 개인전을 열었어요. 세상 사는 것에 힘들어하는 자신을 의인화한 작품을 만들었는데 어떤 분이 예쁘다며 거실에 걸면 좋겠다고 사 가셨어요. 너무 고마웠지만 그보다 적극적인 소통에 대한 갈증이 시작됐어요. 갤러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사람을 만나는 것도 갑갑했고요.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고민하다가 <엘리펀트 맨>이 다시 생각난거죠. 그리고 28살이라는 조금 늦은 나이에 미국 AFI(American Film Institute)에 진학했어요. 이 길로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요. 


당시 미국 영화 산업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한국과 비교해 어땠나요?
시스템이 전혀 다르죠. 미국은 100년 가까운 역사를 쌓으며 조합도 생기고 권익과 저작권에 대한 체계가 확실히 잡혀 있어요. 반면 한국에서는 영화 일 하면 어느 날 길거리에서 밤이슬 맞다 입 돌아가서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열악했죠.(웃음) 미국 영화 산업은 인디 영화와 메이저 영화 두 갈래로 나뉘어 있어요. 각각 시스템도 다르고요. 메이저 영화를 예로 들면 무대 세트 디자이너, 소품 담당, 의상 디자이너 등이 있고 그 안에 도면만 작업하는 사람, 장식만 하는 사람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어요. 30~40년 차는 기본이고요. 각자의 전문 분야를 서로 존중해줘야 하기 때문에 기획 단계에서 잡힌 방향대로만 진행해야 하는 단점이 있긴 해요. 좋은 아이디어가 생겨도, 거장 감독이라고 해도 도중에 마음대로 바꿀 수 없거든요. 반면 한국은 이러한 체계가 없기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데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려요. 그 대신 좋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촬영 도중에라도 스스럼 없이 의견을 나누고 반영할 수 있는 융통성이 있죠. 서로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영화 <아가씨>의 상업적 성공이 단순히 ‘흥행’이라기보다 관객이 다양한 미학을 즐길 줄 알게 되었다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영화 미술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 어떻게 미술감독으로 데뷔했나요?
류승완 감독의 입봉작인 <피도 눈물도 없이>를 통해 상업 영화에 데뷔했어요. 이전에는 소품, 세트, 의상, 분장, 조명 등의 담당자가 영화감독과 바로 의견을 나누고 끝냈다면 좀 더 명확하게 영화의 톤 & 매너를 이끌어가기 위해 이를 총괄하는 한 사람이 상징적으로 필요했어요. 비주얼을 담당하는 모든 것이 한 창구에서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거였죠. 배우가 예쁜 초록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벽지가 초록색이고, 누아르 영화인데 파스텔 톤의 소품이 들어오면 원하는 톤 & 매너를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요.

그러면서 국내에서 처음으로 미술감독이라는 말 대신 프로덕션 디자이너라는 말을 사용했어요. 기존에 없던 생소한 포지셔닝이 갑자기 생기니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권력이나 권위 있는 자리를 뜻하는 게 아니라 모든 제작자를 존중하면서 일관성 있는 분위기로 나아갈 수 있도록 책임지는 사람일 뿐이에요. 지금은 내로라하는 분들이지만 류승완 감
독도 당시엔 처음 영화를 찍는 분이었고 의상을 담당했던 조상경 의상감독은 학생이었고, 학교 선후배들이 모여 세트팀을 이루어 무데뽀 정신으로 용감하게 했기 때문에 그나마 쉽게 프로덕션 디자이너라는 개념을 받아준 것 같아요.

데뷔작은 송일곤 감독의 영화 <꽃섬>으로 알고 있어요.
1999년에 귀국해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온갖 제작사를 다 찾아다녔어요. 아는 사람이 없으니 직접 발로 뛰는 방법밖에 없었죠. 프로덕션 디자이너라고 하니까 신기한지 관심은 갖는데 아무도 절 고용해주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미국에서 영화 미술 공부하고 온 애가 있는데 당신네 회사에도 갔느냐며 제작사들 사이에서 소문이 난 거예요.(웃음) 그러던 중 송일곤 감독의 영화 <소풍>을 좋아해서 그분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잘 통했어요. 예술 영화에 대한 경외와 로망을 가지고 송일곤 감독의 <꽃섬>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작가주의 영화는 보통의 내공과 결단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았죠. 그리고 도예를 하면서 고민했던 소통에 대한 갈증이 다시 한 번 찾아왔어요. 많은 대중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측면에서 직업인으로서는 상업 영화가 적합하겠다고 판단한 거죠. <꽃섬>을 찍는 사이 어떤 분이 다른 누군가에게 저를 소개하고 연락이 이어져 지금에 이르게 된 거예요. 다행히 작가주의 영화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상업 영화라는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는 감독들을 만났고 제가 하고 싶은 것과 잘 맞아서 하고 있어요.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하는 일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신다면?
크게 공간 세트 디자인, 소품, 데커레이션 파트로 나눠요. 영화의 콘셉트를 각 파트와 공유하고 조율해나가는 일이에요. 그리고 분장, 의상, 촬영, 조명 등의 감독과 대표로 의견을 나누죠. 외국에서는 아트 디렉터라고 불렀는데, 프로덕션 디자이너라는 단어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를 통해 등장한 거래요. 외국은 영화 촬영을 진행하는 중이라도 제대로 일을 하지 않거나 분량만큼 해내지 못하면 가차 없이 잘라요. 영화감독도 잘려요. 이러한 와중에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이 아트 디렉터 윌리엄 캐머런 멘지스(William Cameron Menzies)였어요. 제작자였던 데이비드 셀즈닉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성공한 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콘셉트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한 윌리엄의 역할이 컸다며 그의 공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다가 프로덕션 디자이너라고 부르게 됐죠.

존경하는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있나요?
학창 시절에는 영화 <졸업>으로 유명한 리처드 실버트(Richard Sylbert) 미술감독을 존경했어요. 능력이 뛰어나 파라마운트의 제작 담당 부사장을 역임했고, 미국 영화 미술에 대한 공헌을 기려 미국 할리우드 영화제 중 화제의 미술감독에게 주는 상의 이름을 ‘할리우드 리처드 실버트 최고 프로덕션 디자인상’이라고 지었죠. 그분의 행보가 롤모델이 되었어요. 유학 시절에는 두 명의 스승이 있었는데 알프레도 히치콕의 영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싸이코> 등을 디자인한 로버트 F. 보일(Robert F. Boyle)과 <현기증>을 디자인한 헨리 범스테드(Henry Bumstead)였어요. 당시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활동하셨으니 너무 멋있는 분들이죠.

그분들이라면 수업 자체가 무척 영화 같았을 것 같아요.
현역 미술감독이었으니까 현장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좋았어요. 어느 날 선생님을 따라 현장을 방문했는데 영화감독과 배우들이 직접 학생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며 ‘당신이 지금 공부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해주더라고요. 제 직업에 소명의식을 심어준 날이었죠.



동네를 현실감 있게 표현한 영화 <박쥐>의 무대 세트.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감금당한 방. 우울한 분위기를 어두운색과 낮은 채도로 표현했다. 

무대의 사실적 묘사가 중요했던 <국제시장>의 세트 스케치. 

적은 예산 덕분에 오히려 창의적인 공간을 연출할 수 있었던 <올드보이> 이우진의 펜트 하우스. 이우진의 누나가 자살한 장소인 댐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했다.

본인이 좋아하는 영화가 궁금하네요.
최근에는 스웨덴 출신의 영화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팅거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재밌게 봤어요. 과감한 시각적 시도는 없었지만 정말 선수가 만든 영화 미술이랄까? AFI에 다니던 시절에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어요. 그의 영화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잖아요. 특히 <시계태엽 오렌지>는 가학적, 폭력적 표현이 보기에 불편했지만 세련된 디자인을 통해 관객의 뇌리에 강렬하게 심어주면서 시각적 메시지를 적합하게 전달해주었다고 생각해요.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외침과 속삭임>은 우아하면서도, 강렬한 붉은색이 인상적이고요. 예나 지금이나 부동의 1위인 영화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순응자>입니다. 27세의 아티스트들이 만든 이 영화는 제 디자인 철학에 많은 영향을 줬어요. 시대의 파시즘을 담고 있는 이 영화를 보며 우아하면서도 용감한 디자인을 하겠다는 신념이 생겼어요. 용감하다는 의미는 우리가 느끼는 익숙하고도 편안함과는 달리 낯설면서도 다양한 관점의 가치를 영화내용 안에 세련되게 녹여 대중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의미예요. 조금 불편하게 표현되는 이미지도 그 세계에서는 의도가 분명히 있으니까요.물론 영화마다 그 수위나 방식은 다릅니다.

영화 미술이 흥행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나요?
글쎄요. 영화 안에서 스토리텔링은 배우나 대사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게 아니라 음향, 촬영, 조명, 미술 등 많은 요소가 기여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아가씨>의 상업적 성공이 단순히 ‘흥행’이라기보다 관객이 다양한 미학을 즐길 줄 알게 되었다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아가씨>의 미술이 관객에게 영화를 즐기는 요소 중 하나로 인식되어 데이터를 통해 움직이는 투자사들이 좀 더 다양한 소재의 영화에 지원하게 된다면, 우리나라에서도 기획 단계부터 비주얼에 중점을 둔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팀버튼 감독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영화 <해리포터>, 마블과 같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판타지물도 제대로 제작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직접 영화를 연출해볼 계획은 없나요?
지금은 미술감독이라는 직업인으로서 풀어야 할 숙제가 많아요. 그럼에도 상상을 해본다면 조너선 글레이저의 <언더 더 스킨>이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랍스터>,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같은 영화를 해보고 싶네요.

대부분의 영화 관계자들이 독립적인 형태로 일을 하는 것 같아요.
전 세계적으로 영화 관련 종사자들이 대부분 프리랜서예요. 저희는 고정 인원 외에 영화 규모에 따라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해요. 외국의 경우 프리랜서라도 시스템이 안정되어 있지만 한국에서는 젊은이들이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프리랜서가 안고 가야 하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이겠죠.

요즘 영화 산업에서도 4대 보험 제도를 도입하며 개선되고 있긴 하지만 좀 더 체계적인 시스템을 위해 회사나 조합 형태를 조직해 보다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 모색하고 있어요. 할리우드에서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젊은 감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느 디자인과 달리 영화 미술은 현장을 직접 경험하며 노하우를 쌓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돌발 상황이 일어났을 때 대처하는 능력이나 예산에 맞춰 제작하는 방법 등이 창의력과 연결되기도 하니까요.

해외에서는 노장 감독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고 했는데, 먼 훗날 감독님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하네요.
저 역시 오랫동안 이 일을 하며 진정한 전문가가 되고 싶어요. 영화라는 대중 예술 문화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어요.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아등바등한다고 잘되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걱정을 안 하는 편이에요. 그런 성격이었다면 아마 이 일을 못 했을 것 같아요. 그저 너무 좋고 아직도 나를 흥분하게 하는 일이니까 하는 것뿐이에요. 노자의 말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우울한 사람은 과거에 사는 것이고 불안한 사람은 미래에 사는 것이고 평안한 사람은 이 순간에 사는 것이다.”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순간을 즐기면서 열심히 사는 거라고 생각해요. 계획한 대로 사는 게 무조건 옳고 재밌는 삶일까요? 세상 사람 모두에게는 각자 태어난 이유와 역할이 있다고 믿어요. 영화 미술도 결국 제 삶의 일부이고 저는 궁극적으로 계속 그 질문에 따라 답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Share +
바이라인 : 인터뷰 전은경 편집장, 정리 박은영, 사진 김정한(예 스튜디오), 장소 협조 미디어 카페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16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