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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Special Talk 서울로 7017이 우리에게 남긴 것
도시의 죽은 부위를 되살려낸 명민한 집도술이었을까, 아니면 허울 좋은 도시 재개발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일까? 서울로 7017(이하 서울로) 개장은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논의를 함축적으로 드러낸 하나의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를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거나 편협하게 바라봐선 안 된다.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감독을 맡게 된 정림건축문화재단 박성태 상임이사와 만리동에 사무실을 낸 리마크프레스 이재준 소장을 통해 서울로의 의미와 문제, 그리고 가능성을 살펴 보았다.


리마크프레스 이재준 대표(왼쪽)과 정림건축문화재단 박성태 상임이사. 장소는 통의동 정림건축문화재단
서울로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건축물에는 동시대의 총체적인 문화적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치 지역의 토양과 그곳에 사는 구성원들의 생각을 빨아들여 만든 것처럼 말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1970년의 서울역 고가도로도, 2017년의 서울로도 모두 우리의 자화상이다. 과연 서울로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우리는 그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재준(이하 이) 솔직히 서울로에 대한 첫인상은 좋았습니다. 길을 걷는 경험 자체가 분명 이전과는 달랐죠. 하루의 절반 이상을 만리동에서 생활하는 사람으로서 자꾸 보다 보니 나름 애정도 생기더군요. 누가 뭐래도 고가와 쓰레기 집하장으로 점철되어 있던 지역이 말끔한 공원으로 변신했으니까요. 현재 서울로를 향해 쏟아지는 미디어의 집중 포화는 개인적으로 아쉽게 느껴집니다. 이제 갓 한 아이가 태어났고,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벌써부터 나쁘다고, 못생겼다고 공격하는 건 잘못된 것 같아요. 준공 이후 40여 년이 흐른 지금 비로소 서울역 고가도로의 의미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듯 서울로에 대한 의미를 정립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성태(이하 박) 저 역시 서울로에 대한 첫인상은 좋았습니다. 문제는 그 좋다는 감정이 정말 좋아서 좋다고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없었던 것을 처음 경험하기 때문에 좋다고 느끼는 것인지는 좀 더 면밀히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만리동 인근에는 퇴계로와는 또 다른 형태의 수많은 문화적 자산이 있었는데 그동안 서울역 철로에 가로막혀 이를 경험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서울 중심부와 서쪽 지역 사이에 일종의 물리적 장벽 같은 게 있었던 것이죠. 서울로가 그걸 연결해준 거잖아요. 그 위를 걷는 것 자체가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으니 사람들 눈에 신선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역 주민들에게도 ‘아, 우리 지역이 달라지겠구나’ 하는 기대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했고요.

다른 공간과 장소를 경험하게 해준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DDP와 청계천이 그러했듯 우리에게는 그런 공간과 장소가 더 필요하다고 봐요. 서울로의 흥미로운 점은 길을 걸으며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시간의 레이어를 모두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부역과 만리동, 서계동 인근에는 전히 1970년대의 맥락이 보존되어 있고, 고가를 넘어서는 순간부터는 198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시대적 맥락을 죽 훑을 수 있죠. 다시 말해 서울로는 서울의 공간과 장소를 다르게 바라보게 만들어주는 도구입니다. 기존 서울의 도시계획에서 늘 간과된 부분 중 하나가 앉을 곳을 조성하는 데 충분히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거리 활성화나 상가 활성화에만 집중하다 보니 앉아서 쉬는 곳은 카페나 상점, 백화점밖에 없었죠. 해외의 공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요, 물론 늘 주변에 자연이 있는 서울과 달리 인공적으로 자연을 만들어야만 하는 나름의 사정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공원의 의미는 머무르고 앉아서 쉬는 공간을 제공한다는 데 있어요. 서울도 그런 공간을 충분히 제공할 필요가 있는데 이건 공공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실용적, 미학적, 윤리적 차원으로 나눠 서울로를 바라볼 필요가 있어요. 실용적 차원에서는 무척 훌륭하죠. 17개의 브리지가 있고 이를 통해 사통팔달 서울 도심 어디든 닿을 수 있으니까요. 육교로는 정말 완벽한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미학적으로 본다면 글쎄요. MVRDV 위니마스(Winy Maas) 대표가 국내의 한 신문과 인터뷰를 했더군요. 기사에서는 그가 유럽에서 10년 걸릴 일이 서울에서 단기간에 이뤄졌다는 것에 대해 놀랍다고 이야기했다는데 저는 그 말이 마냥 칭찬처럼 느껴지지 않았어요. 약간은 사캐스틱(sarcastic)한 뉘앙스로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원래 설계에는 디자인적으로 풀려고 했던 일련의 터치들이 있었는데 시공 과정에서 다 없어지고 결국 콘크리트 덩어리만 남아버렸죠. 디자이너한테 시간을 충분히 더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윤리적으로 보자면 상당한 공공 자금이 들어간 프로젝트인 데 비해 공공성이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공공 건축 프로젝트인 만큼 서울로 인근 토지 소유자뿐 아니라 거주민, 지역 상점 등 지역사회 혹은 서울시 전체에 이익이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오히려 공공기관이 토지 소유자들에게 어필하려고 하는 모습만 보여준 것 같아 아쉽더군요.


공중 정원으로서의 서울로
건축가 승효상은 “건축 설계라는 것은 결국 (기존 건축) 터에 있는 무늬를 밝히고 새로운 무늬를 덧대는 과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본지 2013년 1월호 ‘서울의 건축을 말하다’ 기사 중). 그런 면에서 보자면 서울로가 충분히 이전에 있던 터의 무늬를 밝혀낸 디자인이었는지 의문이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울로 공모 과정에서의 문제점으로 대화를 옮겨갔다.

MVRDV가 ‘자연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공원으로 새로운 경험으로 주겠다’고 했다면 차라리 납득이 됐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애당초 서울시가 생각하는 하이라인 파크를 전제로 해 고가를 공원으로 만들겠다는 안을 낸 것이기 때문에 맥락을 읽고 반영한 설계안이 아니라 주어진 주제를 풀어낸 꼴이 되어버렸죠. 서울로의 조경이 그 예가 될 수 있겠네요. 사실 우리는 사계절이 있어서 여기에 맞춰 수목을 식재하고 배치해야 합니다. 하지만 서울로의 식물 배치는 가나다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위니마스의 부모님은 그가 어린 시절 원예업을 하셨다고 해요. 자연스럽게 식물도감을 접할 기회가 많았는데 보통 A, B, C 순으로 되어 있다 보니 그 순서를 따른 겁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계절을 생각해본다면 그렇게 구성할 수가 없죠. 이것은 한 사례에 불과하지만, 외국 건축가들과 일할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신선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우리의 장소가 지닌 맥락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위니마스의 잘못도 아니고 그의 이런 접근 방식이 틀렸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지만 이야기해볼 문제라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렇죠. 사실 위니마스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의 문제죠.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와 서울로는 엄연히 맥락적 특성이 다릅니다. 하이라인 파크는 본래 물자를 수송하는 기능을 하던 철로였고 주거지나 건물 사이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이다 보니 커뮤니티 기반의 프로젝트를 만들 수 있었고 주민들과 호흡할 여지도 컸습니다. 반면 서울로는 동서를 연결하는 1024m 길이의 육교로서의 성격이 강하죠. 하이라인 파크는 하이라인 파크만의, 서울역 고가도로는 서울역 고가도로만의 고유성이 있는데 이것을 무시한 채 지자체가 먼저 개념을 규정해버렸습니다. 사실 지명 공모에서 2등을 수상한 조성룡 건축가나 조민석 건축가는 오히려 솔직하고 실증적인 대상으로 프로젝트를 바라봤어요. 우리와 함께 보낸 대상으로서 고가도로를 바라본 것이죠. 반면 위니마스는 서울시가 던진 몇 가지 키워드를 잘 엮어서 멋지게 프레젠테이션했는데 그것이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낸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맞습니다. 속성으로 따지면 사실 청계 고가도로가 오히려 하이라인 파크와 가까웠죠. 저는 프로세스가 달랐다는 점 또한 이야기하고 싶어요. 시민이 주도한 하이라인 파크와 달리 서울로는 공공 기관이 판단하고 시설의 용도를 바꿔버린 케이스입니다. 전혀 다른 절차를 밟은 셈이죠. 박 약간 올드 패션이라고 할 수 있죠. 스테이트 아방가르드(state avant-garde)1)라고 할까요.(웃음)

1)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의 주제로 한국의 근대사 속에서 압축적으로 성장한 도시 건축의 역사와 맞닿아 있는 개념이다

“서울로의 흥미로운 점은 길을 걸으며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시간의 레이어를 모두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부역과 만리동, 서계동 인근에는 여전히 1970년대의 맥락이 보존되어 있고, 고가를 넘어서는 순간부터는 198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시대적 맥락을 죽 훑을 수 있죠. 다시 말해 서울로는 서울의 공간과 장소를 다르게 바라보게 만들어주는 도구입니다.”


양날의 검이 된 재생 건축
허물고 짓기를 반복하는 서울이란 도시에서 재생 건축은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는 개념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도시처럼 이전의 흔적을 말소시켜버리곤 하던 이 도시에서 서울로가 크나큰 전환점을 만들어낸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은 법. 서울로의 재생은 야누스처럼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재생 건축 차원에서 서울로는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유한 문화적 자산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죠. 하지만 재생 건축을 획일적으로 바라보면 이 또한 문제가 됩니다. 다시 말해 이걸 단순히 벤치마킹의 툴로 바라보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재생의 경우가 각각 다 다른 만큼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잘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의 DNA가 각기 다른 것처럼 각 시설에도 다 나름의 DNA가 있기 마련인데 그 구성 요소를 잘 발견해서 장점을 살려내지 못하면 재생이 재생이 아니게 되어버리죠.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재생의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 사는 동네를 만드는 것이 재생의 핵심이죠. 재생 건축은 그런 삶을 조성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인데, 많은 경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이 그 지역을 떠나게 됩니다. 길을 닦고 상가를 활성화하기 이전에 주거가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데 이게 선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시의 한 블록 안에 많은 돈을 투입하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합니다.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우리이기에 물리적 관점에서의 재생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의 삶과 주거에 대한 논의가 더 이뤄졌으면 해요.

서울시립대학교 정석 교수의 제안에 동의하는데, 서울역 고가도로를 한동안 좀 그대로 놔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시민들이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구조 보강만 하고 한 1년 정도 그대로 둔 뒤, 시민들이나 지역 상인들이 직접 걷고 경험하면서 나온 의견을 수용해 용도를 결정하는 것이죠. 물론 해당 시설의 고유성을 찾아내기까지 전문가들의 참여도 필요하지만 거주하는 이들이 함께 찾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도시의 유산이라는 것이 당대에만 쓰는 게 아니라 후손들도 쓰는 것인 만큼 경험으로 축적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이재준 소장님과 제가 친해지려면 밥을 몇 번 먹는다거나 하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잖아요. 그런 과정을 무시하고 ‘우리 한 세 번 만났으니 이제부터 친구’ 이럴 수는 없죠.

공감이 가는 게 미술, 건축, 도시, 디자인까지 요새 학교에서 도시를 관찰하고 리서치하는 수업을 많이 진행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타자적 관점에 머무는 경우가 많아요. 불과 일주일, 한 달, 길어야 1년을 보고 지역을 규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도시 재생 관점에서 오랜 시간 정주하고 관찰하고 경험해서 나온 결과가 중요합니다.

흔히 도시 재생의 좋은 사례로 일본의 다케오 시립 도서관을 거론하는데, 최근 받아본 한 자료에 따르면 의외로 그 지역 주민들에게 별다른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관광객은 쏟아져 들어오지만 원래 도서관을 이용하던 주민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공간을 빼앗긴 셈이죠. 쓰타야 서점과 스타벅스가 자기들이 이용하던 도서관을 상업화해버린 것이니까요.

서울로에 가보면 비빔밥을 1만 5000원에 팔고 있습니다. 이건 관광에 초점을 맞췄다는 반증과 같아요. 지역을 중점에 둔 게 아니라 관광에 중점을 두는 순간 지역은 사라져버립니다. 얼마 전 베니스에서도 시위가 벌어졌죠. 주민들이 더 이상 관광은 필요 없다며 거리로 뛰쳐나왔는데, 관광이 극대화된 도시에서 기존의 삶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지요.

현재 서울시가 ‘시민이 주인’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다양한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만들어냈어요. 하지만 좀 더 시민들이 성숙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봅니다. 주민들이 아주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도 마련해야 하고요. 물론 서울이란 도시 자체가 워낙 크다 보니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 어려울 수는 있어요. 하지만 현재 서울이 시민을 위한 도시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도시를 움직이는 주체는 크게 셋으로 나눠볼 수 있어요. 국가 기관이나 시 기관 같은 공공 기관, 자본, 그리고 시민이죠.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시민의 파이가 너무 적습니다. 여전히 공공 기관의 주도로 도시가 움직이고 정부 기관 역시 자본을 지원하는 시스템으로 도시를 움직이죠. 무엇보다 이제 기관이 시민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게 어떻게 쓰일지를 질문하기보다는 이미 쓰임새를 정해놓은 상태에서 ‘이렇게 쓰면 좋지 않을까?’라고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시민들의 참여가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박성태 이사님 말씀처럼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있었다면 프로젝트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단순 비교를 할 수는 없겠지만, 영국에서는 맨체스터의 작은 지역 하나를 개발하는 데에도 어린아이들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주민들과 만나는 접점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더군요. 몇 년 동안 그런 과정을 거친 뒤 비로소 건물을 디자인하고 짓기 시작하는 것이죠.


황지애 작가의 ‘슈즈 트리’.

공공 예술 프로젝트에 대하여
‘슈즈 트리’ 논란은 한국의 공공 예술에 대해 돌아보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재능 기부 역시 우리가 되짚어봐야 할 문제다. 특별히 이재준 소장은 서울시의 공공 예술 프로젝트 마스터 플랜에 관여한 바 있기에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이 부분에서 유독 강조한 것은 바로 원칙과 절차였다.

제가 서울시의 공공 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할 때 만들어진 것이 만리동 광장의 설치 작품 ‘윤슬’이었습니다. SoA에서 디자인한 이 작품은 공공 예술을 단순한 도시의 상징물을 넘어 시민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자는 취지 아래 완성한 것이었습니다. 서울시에서 공공 예술 2.0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운 게 있는데요, 정당한 절차와 정당한 보상이 그중 하나였습니다. 이런 원칙에 맞춰 5명의 전문가에게 추천받아 공공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할 아티스트를 지명했고 위니마스를 포함해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작품을 최종 선정했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한 작가분에게 적정한 비용을 드린 것은 물론이고 다른 네 분에게도 입찰 탈락 보상금을 드렸어요.

‘윤슬’은 진일보한 프로세스를 거친 작품입니다. SoA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여러 토론을 거쳤을 뿐 아니라 작품을 구현하는 데에서도 많은 논의를 했죠. 일례로 작가가 제안한 안의 지름 사이즈가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힘들었는데요, 이걸 조정하는 과정에서 건축가의 의견을 충분히 들었습니다. 서울시 산하에는 공공예술자문단이라는 조직이 있는데 그 자문단이 전체적인 운용을 맡은 것이죠. 반면 논란이 된 ‘슈즈 트리’는 이 과정을 건너뛰었고요.

서울시가 공공 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에서 컨트롤 타워가 부재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만든 것이 바로 그 자문단이었어요. 서울시가 진행하는 모든 공공 예술 프로젝트는 자문단을 거쳐서 진행하자는 원칙을 세운 것인데 ‘슈즈 트리’의 경우 이를 무시한 채 사업단이 임의로 진행한 프로젝트였어요. 심의나 협의 없이 보고만 된 상황이라 손을 댈 수가 없었던 거죠. 원칙을 제대로 밟아 진행한 ‘윤슬’은 오히려 조명받지 못하고 ‘슈즈 트리’만 부각되어 안타깝습니다. 여러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제가 봤을 때 ‘슈즈 트리’의 가장 큰 문제는 과정이 없었다는 것이에요. 공적 자금을 써서 왜 그런 작품을 만들어야 했는지…. 작품성에 대한 이야기는 별개의 문제인 것 같아요. 본질적인 문제는 과정과 절차가 없었다는 것이죠.

우리 사회에서 공공 미술이 빈 공간에 대한 강박을 채워주는 요소로 쓰이는 것 같아 무척 우려됩니다. 공공 예술이라는 것을 통해 공공성을 획득하는 데 예술가의 작품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이런 강박이 극대화되면 오히려 공공성이 희석되고 휘발되는 결과가 생깁니다.

‘슈즈 트리’ 논란이 다시 한번 공공 예술을 촉발시켰다는 데에는 의미가 있지만, ‘작가의 생각이 이러하니 흉물스럽더라도 봐줘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일종의 편 가르기처럼 되어버린 것 같아요. 공공장소에서 ‘너희는 왜 예술의 가치와 작품의 의미를 모르니?’라고 말하는 것이죠. 박 앞으로 공공 예술 작품을 하지 말자는 극단적인 상황에 도달하게 될까 봐 걱정입니다.


서울로의 가능성과 의미
많은 논란이 있는 프로젝트이지만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 그친다면 그것은 불필요한 소모전에 불과하다. 어찌 되었건 서울로는 우리의 현실이 됐으니까 말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새로운 장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다.

청계천과 DDP, 그리고 서울로 모두 동일한 선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선보일 당시 수많은 논란을 낳았지만 결국 지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공간이 됐죠. 정당한 비판은 필요하겠지만 ‘못생겼다’, ‘잘못됐다’ 구박만 해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질 못한다고 봐요. 어떻게 해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지 방법을 모색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DDP, 청계천, 서울로에 동일하게 나타난 가장 큰 문제는 프로젝트가 근거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 역시 부족했고요. 정상적인 도시 재생이었다면 어떤 맥락과 이야기가 있는지를 먼저 살피고 어떤 공공 공간, 주거 시설, 상업 시설을 마련할 것인지 프로세스를 세운 다음 장기간에 걸쳐 하나하나 만들어갔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부터라도 서울로를 중심으로 증거를 계속 만드는 과정이 있었으면 합니다. 다시 말해 서울로가 어떤 지역적 영향력을 갖고 있고, 어떤 사람이 살고 있으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살려야 할지에 대한 적절한 제안과 근거를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방식으로 남기는 것이죠. 무작정 계획만 쏟아내는 게 아니라요.

저는 개인적으로 서울로를 ‘남산 가는 길’이라고 부릅니다. 남산은 서울이란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이자 상징이죠. 그 자체로 신(神)이고 믿음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것이 가려진 채로 마치 없는 존재처럼 간과됐어요. 도시 정원에서 식물을 학습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보고요. 이보다 더 중요한 키워드는 ‘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책은 학습이 아니라 생각이죠. 여유를 갖고 사유할 수 있는. 그러다 눈앞의 남산을 바라보며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거죠. 결국 서울로는 우리가 그동안 잃어버린 기억과 시간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지 않을까요?


건축가 강예린이 디자인한 공공 미술 작품 ‘윤슬: 서울을 비추는 만리동.

이재준 건축가. 리마크프레스 대표. ‘집’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전시, 공공 예술, 건축, 인테리어, 출판 등 다양한 분야의 작업을 하고 있다. TED×Seoul에서 ‘공정 주거를 디자인하다’를 주제로 발표했으며 ‘새동네’와 ‘이문238’ 프로젝트를 통해 이를 실천해가고 있다. 서울시공공미술 자문위원이며, 새동네 연구소장을 겸하고 있다.

박성태 정림건축문화재단 상임이사. <월간미술> 기자와 <인서울매거진> <공간> 편집장을 역임했고 페차쿠차서울·테드엑스서울 큐레이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정림건축문화재단 라운드어바웃에서 <건축신문>, 통의동집 등을 기획했으며 최근 2018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감독에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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