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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한국 디자인계의 뿌리 깊은 나무 디자이너 양승춘 별세
지난 6월 20일 우리에게는 88서울올림픽 엠블럼 디자이너로 널리 알려진 양승춘(1940~2017)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별세했다. 이에 월간 <디자인>은 양승춘 교수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가 한국 디자인계에 끼친 영향을 되짚어보는 기사를 마련했다. 더불어 살아생전 그와 함께한 동료, 가르침을 받은 제자와 후배 디자이너들의 추모사도 싣는다. 디자이너로서 뛰어난 크리에이티브로 방대한 작품 활동을 펼친 한편 디자인 교육자로서 수많은 제자를 키워낸 한국 디자인계의 뿌리 깊은 나무 양승춘 교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월간 <디자인> 1988년 9월호 ‘서울올림픽 디자인’ 특집 기사에 실린 양승춘 교수의 모습.

디자인의 무명성을 실천한 디자이너, 양승춘
디자이너란 기본적으로 이름이 없는 존재여야 하며 자기선전이나 과시에 집착하지 않고 재능과 에너지를 오롯이 작업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사용해 디자인의 질적 수준 향상과 산업 및 문화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지난 6월 20일에 숙환으로 별세한 양승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디자인의 무명성을 몸소 실천한 디자이너이자 교육자였다. 88서울올림픽 엠블럼 디자이너이자 1960년대 중반 이후 약 50년간 300여 종의 1000점이 넘는 그래픽 디자인을 남긴, 2015년에는 ‘디자이너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기도 한 그가 무명의 디자이너였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살아생전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려 유명해지고 싶어 하기보다는 묵묵히 디자인 작업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왔다는 의미이다. 그래서인지 일상생활 속에서 그의 디자인을 심심치 않게 접하면서도 정작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평소 권위나 특권 의식을 싫어한 고인의 뜻에 따라 조용히 장례를 치른 장남 양진모 디자이너는 아버지가 디자인 작업을 워낙 좋아해서 한창 때는 며칠 밤을 새우며 일하는 날이 많았고, 정년 퇴임한 후에도 디자인 활동을 계속했다고 전했다.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이하 복지관) 홈페이지에는 30년 넘게 복지관과 인연을 맺은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글과 함께 복지관 관보인 <성지> 2009년 12월호에 실린 인터뷰 내용을 소개했다. 1982년과 1992년 두 차례 복지관의 CI 작업을 맡은 양승춘 교수는 복지관이 개관하기 전부터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와 인연을 맺어 복지관의 CI뿐 아니라 각종 출판물 디자인과 디자인 자문 활동을 계속해왔고 복지관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면서 다각도로 복지관이 발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인터뷰 기사에서 양승춘 교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일이지만, 제가 하는 일로 봉사를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복지관과의 인연은 그가 평소 어떤 자세로 디자인에 임했는지, 그리고 그가 생각했던 디자인의 무명성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여러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는 36년간 몸담았던 서울대학교에서도 교육자로서뿐만이 아니라 대학의 디자이너로서 일관된 자세를 보여주었고, 교수가 되기 전에 근무했던 동양맥주주식회사(이하 OB맥주)에서 맺은 회사 내외의 인연들도 평생 이어갔다. OB맥주 CI 작업을 시작으로 그가 참여한 디자인 작업 중 유독 주류 관련 프로젝트가 많은 것도 젊은 시절부터 그를 가까이에서 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보여준 인간적인 성실성과 디자인 작업에 대한 진정성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픽 디자인 프로세스를 중시한 디자이너, 그가 끼친 영향
1940년에 서울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양승춘 교수는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에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에 입학했다. 1965년에 졸업한 후 OB맥주에 입사했다가 1968년 모교로 돌아와 학과 조교로 근무하면서 시간강사를 시작했고 만 30세가 되던 1970년에 전임교수가 되어 2006년에 정년 퇴임했다. 그가 교수로 부임한 첫해에 수업을 들은 초창기 시절 제자인 황부용 디자인브리지 전 대표는 월간 <디자인> 1986년 5월호에 실린 연재 글에서 김교만 교수가 자신에게 이모션을 가르쳐주고, 조영제 교수가 로직을 가르쳐주었다면, 양승춘 교수는 메커니즘을 가르쳐주었다고 말했다. 실크스크린 작품 프로세스에 대한 강의를 회고하면서 그는 양승춘 교수가 의미보다는 이미지를 강조하고 형태를 다듬는 것을 좋아했으며 부드러운 디테일을 추구하는 심미안을 가졌다고 말했다. 또한 “양승춘 교수는 기계와 도구를 무척 좋아한다. 카메라를 좋아하고, 컬러 톤과 스크린 톤을 좋아하며, 선을 긋고 면을 만들고 타원과 곡선을 형성하는 갖가지 도구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양승춘 교수의 이러한 특성은 1970~1980년대의 실크스크린과 디자인 스코프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매킨토시 컴퓨터로 매체만 바뀌었을 뿐 계속 이어졌다.

양승춘 교수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그래픽 디자인 프로세스를 직접 익혀 교육에 접목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그는 일러스트레이션, 한글 레터링, 사진과 제판, 실크스크린과 옵셋 인쇄, 영상과 컴퓨터 그래픽스 등 다양한 수업을 진행했는데, 특히 광고 디자인 수업에 실크스크린과 제판 카메라를 활용한 기법을 적용한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 황부용 전 대표와 대학 동기인 고 김진평 교수가 한글 타이포그래피 연구에 매진하게 된 것도 학창 시절 은사인 양승춘 교수의 영향이 있었다.

양승춘 교수는 1974년에 문교부 지원으로 「한글 타입페이스 디자인 연구」를 진행했고, 1977년에 열린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KSGD) 회원전에는 <한글 타이포그래픽 문자의 세계>라는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또한 1978년에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발간하는 연구지인 <조형>에 「사진예술의 사적흐름과 미학적 고찰」이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또한 유영우 국민대학교 명예교수와 백명진 서울대학교 교수가 유학 시절 영상 디자인을 전공하게 된 것이나 신경섭 선생이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1세대로서 현장에서 활동하게 된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양승춘 교수는 1970년부터 1980년까지 10년간 사진 수업을 담당했고, 양승춘 교수와 학번은 다르지만 졸업 동기생인 정시화 국민대학교 명예교수는 1975년부터 무빙 이미지 강의를 담당했다. 1972년부터 2012년까지 40여 년간 서울대학교에서 디자인 이론 수업을 담당했던 정시화 교수는 양승춘 교수와 절친한 친구이자 디자인에 대한 철학을 공유한 학문적 동반자였다.

양승춘 교수는 1974년에 문교부 지원으로 「한글 타입페이스 디자인 연구」를 진행했고, 1977년에 열린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KSGD) 회원전에는 <한글 타이포그래픽 문자의 세계>라는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또한 1978년에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발간하는 연구지인 <조형>에 「사진예술의 사적흐름과 미학적 고찰」이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그래픽 디자인 계몽과 대중화의 씨앗이 된 프리즘
대학 4학년 때 학과 동료들과 ‘메디치가’라는 이름의 디자인 작업실을 운영했던 양승춘 교수는 졸업 후에 이태영 전 오리콤 사장, 정시화 교수, 배천범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등과 함께 프리즘이라는 디자인 그룹을 출범시켰다. 1966년 11월에 중앙공보관에서 제1회 프리즘 디자인전을 열었고 이후 1968년에 제2회, 1969년에 제3회, 1971년에 제4회 전시회를 개최했다. 프리즘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디자인의 사회적 조건과 기성 디자인계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대안에 대해 정기적으로 토론하며 그 결과를 전시회로 보여주고자 한 단체였다.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한 회원 7명으로 출발한 프리즘은 제품 디자인과 공예로까지 참여 분야가 점차 확장되었고 회원 수가 수십 명에 달했다. 이들의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조영제 교수는 프리즘의 출발 동기는 좋으나 자칫 서울대학교 동문 모임이라는 한계점을 가질 수 있으니 타 대학 출신의 디자인 전공자들도 함께할 수 있는 새로운 디자인 단체를 만들어 외연을 확장하자고 제안했다. 그 결과 1972년에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약칭 KSGD, 후에 한국시각디자인협회KSVD로 개칭)가 창립되었다.

김교만, 조영제, 이태영, 양승춘, 정시화, 김영기, 권문웅, 안정언 등 서울대 출신 8명과 권명광, 유재우, 홍종일 등 홍익대 출신 3명이 모여 발기인 대회 겸 첫 총회를 개최하였고 초대회장으로 김교만 교수가 추대되었다. 협회 정관에는 다음과 같은 목표가 명시되었다: 첫째, 디자인을 사회적으로 인식시키기 위해 활동한다. 둘째, 전시회를 통해 양질의 디자인을 개발하고, 시민들이 이를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을 키워 결과적으로 디자인의 질적 향상을 기한다. 셋째, 친목 도모와 정보 교환의 장으로 만들어 디자인 종사자들의 사회적 위상을 높인다. 초대 회장으로는 김교만 교수가 추대되었고 이어 조영제 교수가 2대와 3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1977년부터 1980년까지 4대 회장을 양승춘 교수가 맡았다.

1983년에 양승춘 교수는 정시화 교수와 함께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개최된 제10차 이코그라다(ICOGRADA) 총회에 참석하여 한국시각디자인협회(KSVD)의 정회원 승인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한국 그래픽 디자인의 국제화를 앞당기는데 기여했다. 당시 총회 주제는 ‘디자인 상호작용(Design Interaction)’으로 컴퓨터에 의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다루었고, 영화 <스타워즈>의 컴퓨터 그래픽 디자인 책임자였던 엘비 레이 스미스(Alvy Ray Smith)의 강연이 있었고 빅터 마골린(Victor Margolin) 교수와 빅터 파파넥(Victor Papanek) 교수도 참석했다. 한국시각디자인협회(KSVD)는 1993년 정기총회에서 20여 년간의 활동을 마치고 발전적으로 해체할 것을 결의했다. 당시 디자인계에는 전국 규모의 협회가 20개 넘게 생겨나 디자인 분야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는 대 정부 창구의 일원화 필요성이 제기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회장이었던 정시화 교수는 “국내의 사회적·문화적 변화에 부응해 새로운 세대를 맞이하고 국제적인 변모에 긍정적·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300명에 이르는 회원의 전문 영역이 점차 세분화됨에 따라 각자의 분야에서 더욱 진취적이고 전문적인 연구단체를 만들어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협회 해산 이듬해인 1994년에 여러 단체들이 함께 모여 보다 통합적인 성격을 가진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VIDAK)를 새롭게 출범시켰는데 조영제 교수가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고 양승춘 교수를 비롯해서 김광현, 안정언, 권명광, 최병훈 교수가 부회장으로 참여했다.


상공미전, 국가 공식 디자이너 자격 제도가 인정한 디자이너
양승춘 교수가 대학을 졸업하던 1960년대 중반은 한국 사회에서 디자인 분야가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이 막 형성되던 시기였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강력한 수출 정책이 펼쳐지면서 산업 전반에서 디자인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상공부에서는 ‘미술 수출’을 기치로 내걸고 정부 차원의 디자인 진흥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그 결과 1966년에 제1회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이하 상공미전, 현 대한민국디자인전람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상공미전은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등용문 구실을 했다. 양승춘 교수는 1966년에 수출 상품을 위한 고전 연구 발표회 포스터로 특선을 했고, 1967년에는 레코드 선전 포스터로 한국무역협회 회장상을, 그리고 1968년에는 해태 수출 상품 포장 계획으로 상공부 장관상을 받았다. 상공미전에서는 1969년 제4회 때부터 ‘3회 특선에 의한 추천 작가와 대통령상 수상자’를 국가가 정한 공식 디자이너로 인정하는 디자이너 자격 제도를 도입했고 이 제도에 따라 제1회 때부터 꾸준히 작품을 출품해 수상한 양승춘 교수가 추천 작가가 되어 이후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64년에 제1회 상공인의 날 공모에 당선되었고, 1965년에는 제1회 전국 쇼윈도 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제1회 청소년 선도의 달 포스터에도 당선되었다. 또한 1966년에는 OB맥주 신문 광고로 조일광고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공모전에서의 연이은 수상으로 상공미전의 추천 작가가 되기 이전부터 주목받는 젊은 디자이너로 감각과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제4회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전 출품작(1974).


제1회 상공인의 날 포스터 공모전 당선작(1964).

OB맥주에서의 실무 경험과 CI 분야의 발견
그가 OB맥주에서 근무한 기간은 1965년부터 1968년까지 채 3년이 안 되지만 이 기간에 얻은 현장 실무 경험과 풍부한 인적 네트워크는 이후 디자이너로서나 디자인 교육자로서 그의 활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1966년에 양승춘 교수는 대학 동기이자 직장 동료였던 이태영 전 오리콤 사장과 함께 출품한 작품으로 조일광고상을 수상했는데 김한용 선생에게 의뢰해 촬영한 맥주 병뚜껑 사진을 활용한 광고의 시각적 콘셉트는 크리에이티브 면에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양승춘 교수가 CI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OB맥주 근무 시절 합동통신광고기획실(후에 만보사와 합병해 종합 광고 대행사 오리콤이 됨)에 파견 나갔다가 1968년 시판을 앞두고 국내 진출을 준비하던 코카콜라의 CI 매뉴얼을 접하면서였다. 이 경험은 그에게 엄청난 시각적 충격을 주었고 CI라는 그래픽 디자인의 새 장르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했다. 양승춘 교수는 OB맥주에 CI 도입이 시급하다고 생각했으나 직장 생활 중에는 회사 중역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후에 모교에 재직하면서 은사이자 선배 교수인 민철홍 교수 그리고 조영제 교수와 함께 1972년에 OB맥주 레이블 리뉴얼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고 1974년 CI 개발과 1985년 CI 리뉴얼 작업에도 참여했다. OB맥주를 시작으로 양승춘 교수는 민철홍, 조영제, 김교만 교수가 아트 디렉터를 맡았던 진로 BI(1974), 제일제당 CI(1975), 제일모직 CI(1976), 제일합섬 CI(1976), 신세계백화점 CI(1977), 한국주택공사 CI(1977), 동양맥주주식회사의 마주앙 BI(1977), 한일은행 CI(1980), 동방생명 CI(1982), 국립현대미술관 CI(1984) 등 여러 프로젝트에 디자이너로 참여하여 심벌마크 및 로고타이프를 비롯해 베이식 시스템과 각종 애플리케이션 아이템을 실제로 개발하는 역할을 했다.

양승춘 교수가 아트디렉터로서 독자적으로 자신의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로 2006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그가 진행했던 주요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다

삼성물산 버킹검 BI(1977), (주)진로 길벗위스키 BI(1977), 유로패션 CI(1978), 아세아오세아니안산부인과학회 CI(1980), 카톨릭중앙의료원 CI(1980), 성모병원 CI(1980),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CI (1982), 한국사회과학도서관 CI(1982), (주)토탈디자인 CI(1984), (주)한샘 CI(1984), 체신부 우정 100주년 VI(1984), ㈜동양맥주 마주앙 BI(1984), (주)금복주 CI 및 BI(1984), (주)동양맥주 CI(1984), (주)한양투자금융 CI(1987), (주)동양맥주 OB라이트 BI(1987), ㈜삼양사 CI(1988), (주)오리엔트시계 CI(1989), (주)선일포도당 CI(1989), (주)삼양중기 CI(1989), (주)백화 CI (1989), (주)두산곡산 CI 및 두산사료 BI(1990), 종가집 BI(1990), (주)가보식품 BI(1990), 마가레트호텔 CI(1990), (주)서울방송 CI(1991), 대림혼다 CI(1991), 동성아파트 BI 및 색채계획(1991), 보훈병원 및 한국보훈복지공단 CI(1991), (주)경월주조 설향 BI(1991), 두산건설 사인시스템 VI(1992), 대전 EXPO 포스코 파빌리온 소재관 VI(1992), (주)두산기계 CI (1992), (주)매일유업 오메가2 분유 BI(1992), 두산아파트 색채계획 및 VI(1992), (주)시그램 이천공장견학관 설계 및 VI(1993), (주)백화 군산공장견학코스 설계 및 VI(1993), (주)동양맥주 마주앙 메도크 및 라인 BI(1993), 종가집 식품류 및 사료류 BI(1993), (주)백화의 수복/국향/청하/청하화인/설화/백화24 BI(1993), (주)경월 그린소주 BI(1993), 사단법인 한국문화연구 CI(1993), 관악구청 CI(1994), 동양투자신탁 CI(1994), 가톨릭대학교 CI(1995),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VI (1995), (주)한샘인테리어 BI(1996), 성모병원 CI(1996), 라자로마을 사제마을 VI(1996),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CI(1997), (주)유로패션 에베레스트 BI(1997), 한국장애인종합복지관 서울리포츠센터 CI(1997), 대광고등학교 개교 50주년 VI(1999), 한울교회 VI(1999), 서울장애인복지관 CI 리뉴얼(1999), 제41회 국제수학올림피아드 CI(1999), 과학기술처 21세기 프로티어연구개발사업 CI(1999), 한국법학교수회 VI(1999), 서울대학교 포스코 스포츠센터 CI 및 인테리어 디자인(2001), 서울대학교 리서치파크 인테리어 디자인(2002), 마가레트호텔 CI 및 인테리어 자문(2002), 한국기업경영사연구원 CI 및 인테리어 디자인(2002), 서울대학교 호암교수회관 CI 및 인테리어 디자인(2003), 한국디자인산업연구센터 CI(2003), 마가레트호텔 CI 개발(2003), 서울대학교 발전기금(연구공원) CI(2003), (주)영림임업 CI(2004), SK그룹의 Spring 투자금융유한회사 CI(2005), 서울대 생활협동조합의 글로벌하우스 CI(2005).


양승춘 교수가 작업한 주요 심벌마크와 로고타이프.

‘박식다험 실사구시(博識多驗 實事求是)’, 디자이너-교수로서의 활동과 태도
양승춘 교수가 평생 디자인 교육자로서만이 아니라 디자인 실무 현장에서 아트 디렉터이자 디자이너로서 수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20세기 중·후반 한국 디자인계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산업 전반에서 디자인 수요가 늘어났으나 당시에는 지금처럼 실무 경험이 풍부한 디자이너나 디자인 전문 회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교수들이 디자인 전문가로서 국가 정책뿐 아니라 기업의 디자인 개발에도 직접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다 기업 인하우스 디자이너들의 경험이 풍부해지고 디자인 전문 회사의 수도 늘어나면서 디자이너-교수의 역할은 점차 줄어들었다. 양승춘 교수는 1990년부터 1997년까지 약 7년간 학교 바깥에 별도로 디자인 사무실을 둔 기간을 제외하고는 1970년 부임 시기부터 2006년 정년 퇴임 때까지 대부분의 디자인 프로젝트를 교내 자신의 교수 연구실에서 대학원생이나 졸업한 제자들과 함께 진행했다. 교과과정에 포함된 정식 스튜디오 수업이 아니었고, 또 소수의 제한된 인원만이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디자이너-교수로서의 그의 활동과 경험은 연구실에서 일하던 몇몇 제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2006년 2월 28일에 있었던 양승춘 교수 정년 퇴임식 송별사에서 당시 미술대학 권영걸 학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수님의 연구실에는 ‘박식다험 실사구시(博識多驗 實事求是)’라는 좌우명이 걸려 있습니다. 지식을 널리 쌓고 경험을 폭넓게 하며, 공리공론에 빠지지 아니하고 사실과 현실에 바탕을 두어 연구한다는 뜻이니, 박식다험은 제너럴리스트로서의 디자이너가, 실사구시는 스페셜리스트를 지향하는 연구자가 모름지기 지켜야 할 규범이라 생각됩니다. (중략) 선생님의 지식은 종횡무진이어서 우리 교수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떤 주제라도 좌중의 관심을 주도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미술대학 교수 중에서 연중 학교에 체류하는 시간이 가장 긴 분이셨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연구와 창작이 연구실에서 이루어지는 분이며, 가급적이면 외부인도 연구실에서 만나는 분입니다. 그러하기에 학생들과의 상호작용도, 교섭의 밀도도 가장 높았던 분입니다. 또 제가 학장하면서 선생님을 진정 존경하고 감사를 드리는 것은, 선생님은 누구보다 학내의 크고 작은 모든 회의와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셔서 언제나 대학의 어르신으로서 문제를 조정해주시고 좋은 말씀을 해주신 점입니다. 선생님의 이러한 점을 저는 입술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학교사랑, 후배사랑, 제자사랑이라고 봅니다.

선생님은 저희들과 같은 후배 교수들에게나 제자들에게 자애로우셨습니다. 다정다감함은 선생님의 타고나신 성품인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 선생님께서는 여러 해 동안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신 적이 많으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러한 것을 내색하시거나, 그 원인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시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인생의 모든 짐과 문제들을 사랑으로 용해시키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희도 선생님의 그러한 성품을 본받고자 합니다.

1946년에 도안과로 출발한 서울대학교의 그래픽 디자인 교육에서 1965년 함께 부임한 김교만 교수(1928~1998)와 조영제 교수(1935년생)가 모교 출신의 제1세대 교육자였다면 나이 차이가 많지는 않지만 양승춘 교수는 제2세대 교육자였다. 59학번인 양승춘 교수는 대학 재학 시절 시간강사로 출강한 조영제 교수에게 수업을 받았고, 1968년부터 학과 조교이자 시간강사로 근무했기 때문에 김교만 교수(1994년 정년 퇴임), 조영제 교수(2000년 정년 퇴임), 양승춘 교수(2006년 정년 퇴임) 세 사람은 30년이 넘게 선배와 후배, 스승과 제자, 그리고 동료 교수로 함께 지내왔다.


1987년 제24회 서울올림픽 공식 휘장 포스터.


1988년 서울올림픽 문화 포스터  ‘일월 곤륜 장식도’.

한국 전통미를 표현한 88서울올림픽 엠블럼 디자인
88서울올림픽대회 엠블럼 공모에 당선되어 공식 포스터, 기념우표, 입장권 등을 디자인하면서 양승춘 교수의 이름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엠블럼을 디자인하면서 고려했던 점에 대해 양승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저 나름대로 네 가지 방침은 상당히 평범하고도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 네 가지 방침이란 우선 보기 좋고, 이해하기 쉬우며, 뜻도 좋아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형적으로 세계적인 수준에 미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김신 월간 디자인 전 편집장은 페이스북에 올린 추모글에서 엠블럼 지명공모에 당대 내노라하는 국내 디자이너들이 참여했지만 후보작들을 보면 양승춘 교수의 작품이 뽑힐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역대 올림픽 엠블럼의 평가점수를 매긴 밀턴 글레이저가 이 엠블럼이 비록 친숙한 것은 아니지만 임팩트가 있고 올림픽 오륜마크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평가하며 비교적 높은 점수를 준 점을 언급하면서 엠블럼이 개발된 1983년 당시 한국 디자인의 수준이 높지 않았던 점을 고려할 때 이 엠블럼은 큰 성취라고 평가했다.

엠블럼 디자인의 삼태극은 공모 마감일을 앞두고 밤샘 작업을 하던 양승춘 교수가 세면대 수도꼭지에서 쏟아진 물이 휘휘 돌아 감기며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시각적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엠블럼에서 삼태극이 보여주는 구심운동은 온 세계인이 서울로 모여 올림픽 축제에 참여해 화합을 이룬다는 의미이며, 원심운동은 올림픽의 이상을 통해 세계 평화가 증진된다는 뜻의 전진하는 기상을 담고 있다. 즉 88서울올림픽 엠블럼은 화합과 전진을 통해 ‘세계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세계로’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대학 재학 시절 태극기 디자인 개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1966년에 개최된 제1회 프리즘 디자인전에서도 삼태극과 겹쳐진 부채 모양을 시각적 모티브로 삼은 ‘관광의 해’ 포스터를 출품하는 등 한국의 전통문화 및 조형미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양승춘 교수는 대학원의 석·박사 과정 학생들과 함께 답사를 자주 다녔는데 봄에는 부석사, 선암사, 화엄사, 백양사, 하회마을, 병산서원 등 경상도 지역을 찾았고 가을에는 소쇄원, 운주사, 다산초당, 윤선도 유물 전시관, 윤두수 고택 등을 즐겨 찾아 학생들이 한국성을 직접 체험하도록 했다. 정년 퇴임 후에도 서울과학기술대학의 나노IT융합대학원에서 5년간 전통 디자인 수업을 했다.

디자인의 무명성을 실천해온 양승춘 교수의 디자인 활동과 작품은 방대한 양과 질적인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 가치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앞으로 한국 그래픽 디자인사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소중한 우리의 디자인 유산이다.

글: 강현주(인하대 시각정보디자인학과 교수)


참고문헌
강현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시각디자인교육, 1965-1994」, <조형_아카이브>, 서울대학교 조형연구소, 제5호, 2013.
강현주, 「양승춘, CI 디자이너」, <디자이너 열전>, 네이버 캐스트, 2014.
김수정, <한국 디자인의 새벽: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아카이브 디자인 구술채록 자료집— 양승춘>, 조형연구소, 2013.
양승춘, <그래픽 디자인 양승춘>, 한국디자인산업연구센터, 2005.
정시화, 양승춘, 편집부, 「해외견문기—이코그라다(ICOGRADA)」, 월간 <디자인>, 1983년 12월호.
편집부, 「태극 무늬와 아기 호랑이—‘88 서울 올림픽의 휘장과 마스코트」, 월간 <디자인>, 1983년 12월호.
황부용,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들 제5화 그래픽 프로세스에 의한 접근」, 월간 <디자인>, 1986년 5월호.


내가 기억하는 양승춘 교수

‘양승춘 교수’ 하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그가 얼마나 심성이 곱고 선한 사람인지를. 더 이상 빠질 살이 없을 만큼 깡마른 몸매에도 며칠 밤을 새우고도 쓰러지지 않는 희한한 체력의 소유자인지를.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고도 내색하지 않는지를. 힘든 일 앞에서도 항상 긍정적인 말과 유머로 주위를 편안케 하는지를. 그래픽 디자인을 누구보다 사랑하는지를. 1975년부터 몇 년간 CI연구팀으로 함께 일하며 밥 먹듯 밤샘한 것이 그때는 고생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리움입니다. 88서울올림픽 공식 엠블럼 당선자이신 양승춘 교수님과 마스코트를 한 저와의 각별한 인연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아름다움입니다. 김현(디자인파크 대표)

교수님과의 첫 수업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납니다. 아크릴 페인팅으로 명화를 모사하되 자기만의 관점으로 재해석해 그려보는 과제를 받고는, 컴퓨터 그래픽 붐이 일던 시기에 이 무슨 옛날 방식인가 모두 갸우뚱했지요. 졸업 후 현장에서 만난 교수님은 섬세함과 치밀함, 그 누구보다 높은 통찰력으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래픽뿐 아니라 때로는 제품을, 때로는 공간까지 넘나들며 다양한 디자인을 펼쳐온 교수님은 디자이너라면 자신의 촉을 믿고 그것을 가장 좋은 물성으로 가시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디자이너는 누구보다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하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최고로 멋진 모습을 유지하라며 때때로 잔소리도 해주셨지요. 스승님으로 처음 만나 멘토로, 너무나 멋진 모습의 선배 디자이너로 저희와 함께 해주셔서 참 많이 고맙습니다. 최소현(퍼셉션 대표)

지금은 80kg에 육박하는 몸무게이지만 대학교를 막 입학한 나는 175cm 키에 49kg의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그런 이유로 당시 응용미술과 안에서 학번별 최고로 마른 학생에게 부여되는 ‘새우’라는 별명의 계보를 잇게 되었다. 물론 당사자는 모르고 학생들이 지어낸 것이었지만 계보의 시조가 바로 양승춘 교수님이었다. 그래서인지 제대 후 짧았지만 양승춘 교수님 연구실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교수님 덕분에 내 평생 직업인 아이덴티티 디자이너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교수님이 수업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이 난다. 프로 디자이너나 아마추어 디자이너가 공정하게 겨룰 수 있는 것이 공모전이다. 도전해서 너희가 나를 넘어서봐라.” 이처럼 늘 도전하는 사람이 되길 강조하신 교수님의 철학은 2013년 12월에 열린 <한국 디자인의 새벽전(展)>에서 남긴 교수님의 한마디에 잘 나타나 있다. “지금 도전하지 않으면 삶은 0으로 되돌아간다.” 늘 도전하는 디자이너, 많은 것을 알고 있어도 늘 더 알길 갈망하는 디자이너였던 교수님, 꼭 기억하겠습니다. 김성천(시디알어소시에이츠 대표)

‘양승춘’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그해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1983년 공식 엠블럼이 발표되자마자 그 디자인에 매료되어 엠블럼이 들어간 기념품, 광고, 포스터 들을 닥치는 대로 모았는데 서울올림픽 휘장이 담긴 포스터에서 그 이름을 발견했다. ‘엠블럼’,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때, 그 작은 초등학생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게 바로 디자인의 힘이었다. 바로 그때부터 그래픽 디자이너의 꿈을 키워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존경하는 선배 디자이너이자 언젠가 꼭 만나뵙고 싶었던 마음속의 멘토 같은 분이었는데, 부고 소식을 듣고 한동안 가슴이 미어졌다. 소년 시절부터 그래픽 디자이너가 된 지금까지 보물 1호로 간직하고 있는 서울올림픽 컬렉션을 보면서 디자이너 양승춘 교수님을 추모해본다. 최지웅(그래픽 디자이너, 프로파간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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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17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