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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미안해 디자인! 미술관 속 디자인

사회자 안녕하세요. 오늘 ‘디자인은 예술인가?’라는 주제로 좌담회를 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소주제는 ‘미술관 속 디자인’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미술관에서 디자인 전시가 열리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디자인이 예술로 대접받기 시작했다는 걸까요? 먼저 늘 디자인의 예술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고 글도 많이 쓰는 아르테 토토 선생이 말씀해주시지요.

토토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디자인이란 대단히 미학적으로 정제된 작업이지요. 동시에 시대마다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키고 다음 세대에 영향을 미쳐요. 그동안 디자인은 단지 실용적이라는 이유로 미술관으로부터 외면을 받아왔어요. 하지만 뉴욕 현대미술관이 꾸준히 대량생산된 디자인 제품을 컬렉션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디자인은 예술의 영역에 포함되어야 하지요.

바우허 미술관에서 디자인을 소장하고 디자인 전문 미술관이 생겼다고 디자인이 곧 예술이라는 섣부른 결론을 내리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아마도 미술관에서 디자인을 소장하거나 전시하는 데에는 엄격한 기준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물론 예술품도 그런 기준을 통과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사회자 그럼 그 기준에 대해서 토론해보는 건 어떨까요? 역사에 정통하신 쓰마 선생님이 한 말씀 해주시죠.

쓰마 주로 순수 미술을 컬렉션하고 전시하는 미술관이 처음으로 디자인 부서를 세운 곳은 토토 선생이 언급한 것처럼 뉴욕의 현대미술관입니다. 뉴욕 현대미술관은 1929년에 설립했고, 3년 뒤인 1932년에 건축 디자인 부서를 신설했습니다. 건축가 필립 존슨이 이 부서의 첫 번째 디렉터였죠. 2년뒤인 1934년에 필립 존슨이 기획한 <기계 미술>전을 첫 디자인 전시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토토 뉴욕 현대미술관은 어떤 미술관보다 디자인에 깊은 애정을 갖고 굿 디자인을 연구하고 전파하는 데 노력했지요. 뉴욕 현대미술관의 디자인 컬렉션 역사는 곧 현대 디자인사이기도 합니다.

바우허 바로 그 점에서 뉴욕 현대미술관의 컬렉션 기준을 따져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실마리는 바로 첫 번째 전시 <기계 미술>전에서 찾을 수 있어요. 이 전시의 전시품들은 제 기능을 하는 온전한 사물이 아닙니다. 비행기의 거대한 프로펠러나 선박의 모터 프로펠러, 완충 스프링, 산업 기계 속에 들어 있는 커다란 볼 베어링 같은 것이죠. 원래의 사물에서 떼어내 전시장에 갖다 놓은 것입니다. 이것들은 일종의 ‘아트 오브제’로 선택받은 것입니다. 즉 그것의 본래 의미는 사라지고 오히려 다른 것을 연상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죠. 거대한 비행기 프로펠러를 보세요. 르코르뷔지에를 비롯해 많은 모던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을 매료시킨 신비로운 형태죠. 평소 그것에서 별다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다가 미술관에 들어오는 순간 그것이 비행기의 부품으로서 어떤 구실을 했던 사물이라는 점은 잊고 그 형태 자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렇게 감탄합니다. “아름답군! 이건 예술이야.” 그렇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해밀턴 아, 그래서 제가 미술관에 가면 늘 스스로를 책망하게 되었던 거군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한다는 얘기죠.

토토 오브제의 발견은 매우 일상적인 것입니다.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은 평범한 사람도 경험하는 것이에요. 아이들조차 어떤 사물을 볼 때 그 사물의 의미에서 벗어나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하지요. 아이들은 모든 사물에서 얼굴을 찾아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합니다. 관객이 아트 오브제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고 무의미한 건 아닙니다. 예술은 평범한 대중의 이해를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바우허 그런 발견의 예술적 가치를 부정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런 발견 자체가 매우 예술적인 접근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건 뉴욕 현대미술관의 디자인 부서장인 필립 존슨이 아니라 예술 부서장이 기획해야 할 전시 방향인거죠. 피카소의 ‘황소의 머리’와 다를 게 뭐가 있겠어요.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사물을 진열했다고 모두 디자인 전시는 아니지요. 즉 디자인으로서 전시되어야 디자인 전시 아닐까요? ‘황소의 머리’는 비록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사물의 조합이지만, 그건 분명한 아트 오브제입니다. 마찬가지로 비행기의 프로펠러도 그런 오브제로서의 가치를 지녀 미술관의 컬렉션이 되었다면 그게 과연 디자인 종사자로서 자긍심을 느낄 만한 일인지 저는 의문스럽습니다. 그런 면에서 <기계 아트>전은 디자인 전시가 아니라 예술 전시인 겁니다.

해밀턴 잠시만요. 피카소의 ‘황소의 머리’는 뭐죠?

쓰마 피카소가 1943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자전거 손잡이와 안장을 따로 떼어내 붙여서 마치 황소의 머리처럼 보이게 만든 작품이죠.

롤랑 바우허 선생의 미술관 디자인에 대한 지적은 예리하지만, 너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거 아닐까요? 요즘 디자인 전시는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물건을 해체하지 않아요. 가구 전시를 보면 가구 모습 그대로 보여주지 않습니까?

토토 맞습니다. <기계 미술>전은 무려 80여 년 전 전시예요. 요즘 <기계 미술>전처럼 하는 디자인 전시회가 어디 있습니까? 오늘날 뉴욕 현대미술관의 디자인 컬렉션은 아트 오브제가 아닌 분명한 디자인 제품이에요. 물론 아무 디자인이나 소장하는 건 아니죠. 미술관의 합당한 디자인 컬렉션 기준은 ‘혁신’입니다. 찰스와 레이 임스가 디자인한 의자가 대표적인 사례가 될 거 같습니다.

해밀턴 시장에서는 혁신적인 제품이 꼭 성공적인 건 아니죠. 디자인의 목표가 예술로 인정받아 미술관에 들어가는 게 아니잖아요. 시장에서 많이 팔리는 게 장땡이죠. 그런 디자인의 본질을 따져보면 시장에서 많이 팔린 제품을 소장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임스 의자도 많이 팔려서 그만큼 명성을 얻었고, 그러다 보니 미술관 관계자의 눈에 띄었겠죠. 시장에서 망하면 아무리 혁신적이라도 무슨 소용이겠어요. 누가 알아주느냐 말이죠.

토토 해밀턴 선생, 정말 자제 좀 부탁드립니다. 미술관이 무슨 히트 상품 진열장인 줄 아세요!

해밀턴 임스 의자가 히트 상품이 아니고 뭡니까? 빅 히트 상품 맞잖아요? 저는 시장에 나온 상품을 미술관에 전시하는 건 좋다고 봐요. 뭐, 상품 판매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해가 되진 않겠죠. 하지만 본질적으로 상품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감춰야 할 어두운 과거처럼 여기는 태도에는 반대해요.

토토 임스 의자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을 수 있었던 근원이 뭔지 좀 진지하게 고찰해보세요. 단지 많이 팔린 상품이라서 그런 명예를 얻었겠습니까?

쓰마 자료를 뒤져보니 뉴욕 현대미술관의 컬렉션 기준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소장품은 그것이 지닌 품질로 선택된다. (중략) 역사적 의미는 훨씬 융통성 있는 기준이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것은 미학적 문제나 기능성 면에서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디자인 발전이나 미래에 의미심장한 기여를 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토토 이제 판매량 따위는 판단 대상이 아님이 분명해졌군요. 아울러 미학이나 기능보다 더 중요한 건 ‘디자인 발전을 위한 의미심장한 기여’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력적이고 유용한 물건은 도시의 건물 수만큼이나 많아요. 어쩌면 히트 상품보다 더 많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더 엄격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건 바로 ‘새로움’입니다. 관성의 법칙을 깨뜨리는 아주 특별하고 유일한 것이어야 합니다. “역사적 의미가 융통성 있는 기준”이라고 언급한 부분을 음미해보시죠. 새로움은 역사적 흐름 속에서만, 즉 동시대를 넘어 통시적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획득하는 가치란 말입니다.




뉴욕 현대미술관의 <기계 미술> 전시장, 1934년


파블로 피카소의 ‘황소의 머리’, 1943년


찰스와 레이 임스가 디자인한 다리가 3개인 의자, 1945년
“미술관에서 디자인을 소장하고 디자인 전문 미술관이 생겼다고 디자인이 곧 예술이라는 섣부른 결론을 내리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아마도 미술관에서 디자인을 소장하거나 전시하는 데에는 엄격한 기준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물론 예술품도 그런 기준을 통과해야 하지만 말입니다.”_ 발터 바우허


‘아티초크’, 디자이너: 포울 헤닝센, 덴마크, 1958년. 미술관에 전시된 이 조명은 빛을 발하면서 기능을 하지만 일상으로부터 단절되었다. 미술품을 비추는 미술관의 실용적인 조명은 미술관에서 일하는 일상적인 조명이다. 같은 기능을 하지만 그 둘의 운명은 주인과 노예만큼이나 다르다.


페데리코 펠리니가 감독한 영화 <달콤한 인생>에는 헬리콥터 벨(Bell) 47이 등장해 예수 조각상을 운반하는 장면이 나온다. 벨 47은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큐레이터 테리 레일리는 이를 “우리의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이라고 말했다. 데얀 수직은 이를 “아름다운 동시에 쓸모없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20세기 초에 발명한 비행기는 가장 모던한 사물 중 하나다. 과거의 어떤 디자인과도 닮지 않았다. 르코르뷔지에는 “비행기야말로 시대에 뒤진 우리의 의식을 비난한다”라고 말했다. 특히 프로펠러는 일종의 아트 오브제로 각광받았으며, 뉴욕 현대미술관의 컬렉션이 되었다.
롤랑 아름다움이나 기능은 다른 시대와 연관 짓지 않더라도 판단할 수 있어요. 물론 미적 태도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기능의 해석도 시대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요. 하지만 새로움과 혁신이란 과거와 현재라는 앞뒤 시대의 관계 속에서만 판단할 수 있다는 뜻 아닐까요? 지금 생산하는 합판 의자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지만 1930년대 초에는 혁신적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어요. 1931년에 생산했고 뉴욕 현대미술관의 컬렉션이기도 한 알바 알토의 파이미오 의자를 지금 생산했다면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되기는 커녕 주목받지도 못했을 거예요.

바우허 좋습니다. 그런 기준으로 소장했다고 칩시다. 그렇지만 여전히 전시 형식의 문제는 남아 있지요. 미술관이라는 제도는 아무것이나 소장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전시하지도 않지요. 그것은 바로 디자인한 사물을 사회적 관계와 맥락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독립시키려 한다는 점입니다. 전시장에 가보세요. 자동차든 가구든 조명이든 홀로 무대 위에 올라가 찬란한 빛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토토 아니,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전시장이라는 곳이 그런 곳 아닙니까? 디자인뿐 아니라 그림이든 조각이든 그런 조명을 받을 만한 것을 가려 뽑았기 때문입니다. 전시장은 변두리 대형 마트가 아니에요. 뉴욕 현대 미술관의 컬렉션 기준에서 알 수 있듯이 품질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향한 격렬한 투쟁이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바우허 바로 그 점을 지적하는 겁니다. 그림이나 조각은 처음부터 독립된, 그러니까 순수한 작품으로 만듭니다. 처음부터 전시장, 또는 전시장이 아니더라도 뭔가 근사한 장소에 놓으려고 기획하고 제작합니다. 집 안 거실벽에 걸어놓은 그림을 상상해보세요. 그것은 벽의 지배자입니다. 그림을 거는 순간 벽은 그림의 배경이 됩니다. 그림과 벽의 관계는 평등하지 않고 종속적입니다. 하지만 벽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벽지는 벽을 보호하거나 장식하려는 의도로 벽과 한 몸이 됩니다. 오히려 벽을 위해 서비스한다고 해야 할까요. 이렇듯 디자인한 사물은 처음부터 일상 속으로 편입시키려고 기획하고 생산합니다. 가구와 식기, 커튼, 벽지, 냉장고와 TV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집이라는 커다란 그릇 속에서 각자의 구실을 하면서 존재하는 거죠. 따라서 디자인한 사물은 일상 속에서 가장 이해하기 쉽 지요. 하지만 미술관에서는 어떻습니까? 혼자 동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겁니다. 그렇게 진열된 디자인에서 관객이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사물의 외양, 즉 미학적 형식뿐이지요.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일반인은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봐도 형태와 색채의 특성과 조화를 넘어 뭔가 더 깊은 이해나 인식에 이르기란 무척 힘들어요. 그 책임은 미술관 전시회라는 형식 때문입니다. 결국 디자인은 미술관에 들어가면 뭔가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해밀턴 그건 매장 디스플레이 공간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미술관에 전시된 디자인과 매장에 진열된 디자인 모두 어떤 기능보다는 그것의 외양을 돋보이게 하잖아요. 뭐가 다르지요?

롤랑 아주 큰 차이가 있어요. 미술관에 전시된 디자인은 일상의 평범한 사물에서 예술로 업그레이드된 겁니다. 함부로 만질 수 없어요. 미술관에 가면 쌀쌀맞게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라든지 또는 조금 상냥하게 “눈으로만 봐주세요”라는 문구를 흔히 보지요. 매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진열된 사물, 즉 상품은 고객의 손길을 끊임없이 갈구합니다. 제발 만져달라고 아양을 떨지요. 예술 작품은 태생적으로 만지면 안 되는 존재예요. 갤러리에 있을 때나 팔려서 어떤 공간에 놓이거나 유아독존적인 그 존재 방식이 별로 바뀌지 않아요. 반면에 디자인은 어떤가요? 미술관에 전시된다는 걸 일종의 신분 상승으로 받아들이죠. 폐기해야 할 사물을 영구히 보존하는 겁니다.

“미술관의 전시장은 전시품을 완전히 보여주는 듯하지만 사실은 살짝 은폐함으로써 그것의 가치를 높이지요. 절대로 모든 걸 다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이 미술관의 속성입니다. 그것을 의도했다기보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할까요.” _ 미셸 롤랑

토토 신분 상승이라는 말이 좀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듯한 말이라서 유쾌하지 않군요. 디자인이 미술관에 들어가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바우허 선생의 말처럼 디자인은 태생적으로 미술관 컬렉션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미술관 입성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미술관 종사자들이 그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지요. 또 요즘 미술관은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합니다. 디자인이 미술관에 전시돼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스마트폰이나 도슨트 서비스로 상쇄될 수 있지 않을까요?

사회자 이제 각자 결론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롤랑 대상을 신비화하는 과정에서 치르는 대가를 말하는 것 같군요. 모든 것을 샅샅이 다 알아버리면 그 대상이 오히려 평범해 보이죠. 도슨트 서비스를 하든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알려주든 도록을 제작하든 그건 모두 부수적인 겁니다. 미술관의 전시장은 전시품을 완전히 보여주는 듯하지만 사실은 살짝 은폐함으로써 그것의 가치를 높이지요. 절대로 모든 걸 다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이 미술관의 속성입니다. 그것을 의도했다기보다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할까요.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아무리 작은 집도 내부의 여러 지점에서 사진을 찍어 보여주면 그 공간이 굉장히 다채롭고 풍요로워보여요. 하지만 실제로 가보면 실망하죠. 왜 그럴까요? 대상을 파편으로 나누었을 때는 그 대상을 종합적으로 보기 어려워요. 하지만 직접 볼 때는 모든 공간이 연결돼서 보여요. 끊어서 보는 게 아니라 연속적으로 보니까요. 그러면 종합적으로 보이는 겁니다. 대상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가능해지지요. 이해가 되면 그 대상은 다채롭거나 풍요로운 게 아니라 단순하고 명쾌해져요. 미술관은 마치 대상을 몇 개의 사진으로 파편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비슷하다는 겁니다.

토토 롤랑 선생의 말은 미술관에 전시된 디자인이 현실 공간을 떠남으로써 정보 제공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결핍 현상을 설명한 듯합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거겠지요. 사용할 수 없는 물건, 접촉하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는 물건이란 인간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니까요.

바우허 저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미술관에 전시된 디자인의 상실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어떤 북 디자인 전시회에 가보았더니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더군요. 마치 책을 이용한 오브제처럼 보였어요. 근데 제가 궁금했던 건 그 책의 레이아웃이었어요. 그건 볼 수 없었지요.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미술관이 그렇게 전시 디자인을 하는 것이 그 책을 더 예술품처럼 보이게 한다고 여긴 모양입니다. 내지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 신비로움이 없고, 그냥 서점에서 경험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우려한 거지요. 바로 이것이 디자인이 미술관의 높은 문턱을 넘으며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디자이너가 가장 큰 에너지를 들이고 정성을 쏟은 것, 서체의 선택, 글과 사진의 적절한 배치와 조화, 자간, 행간, 여백의 크기, 그런 디자인의 본질적 성격이 때로는 예술성이라는 이름으로 희생된다는 점이죠. 일상용품이 고귀한 미술관에 들어가려니 황송해서 좀 눈치를 본 셈입니다. 디자인이 미술관에 입성하려고 일종의 통과세를 내는 거죠. 그것은 예술을 위해 기능이라는 속성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쓰는 것입니다.

토토 그건 좀 극단적인 의견이군요. 미술관이 디자인에 대해 무슨 몹쓸 짓을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을 하네요. 바우허 선생의 말은 디자인의 미술관 전시 자체를 아예 부정하는 겁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고요. 미술관 소장이라는 건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잃는 것은 없어요. 오히려 그 디자인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 디자인의 혁신성은 물론 기능과 미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단지 전시회가 그런 디자인의 속성을 관객에게 적절하게 전달하는 데 제한이 있다는 건 인정해야겠지요.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상실이 있으면 이익도 있을 거 아닙니까. 관객은 평소 지나쳤던 디자인의 가치를 미술관에서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해밀턴 바우허 선생, 제가 듣기에도 좀 무서워요. 명예니 뭐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미술관에 전시되면 그 상품이 시장에서 더 많이 팔리고, 그러면 좋은 거 아닌가요? 좋은 게 좋은 거죠. 미술관은 새로운 콘텐츠를 얻어서 좋고, 디자인은 가치를 인정받아 좋고. 아니, 더 궁극적으로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고 시장에서 더 많이 팔려서 좋고.

사회자 네, 이제 시간이 다 됐습니다. 더 하고 싶은 말씀이 많겠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또 다른 주제로 만나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알바 알토가 디자인한 파이미오 의자, 1931년


뉴욕 현대미술관의 <찰스 임스의 새로운 가구>전 전시장, 1946년. 현실 공간처럼 재현했지만 전시장으로 들어오는 순간 디자인은 그것의 원래 맥락과 단절된다.


루이비통의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 전시장. 전시대 위에 올라와 조명을 받는 순간 이 가방은 단순한 가방이 아니라 예술적 가치를 부여받는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카르티에 소장품 전시장. 이 작품은 만화로 미술관에 전시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손으로 만지며 보던 책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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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김신, 오상희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17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