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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크리에이터가 반드시 알아야 할 젊은 레트로 7 다시, 종이와 쓰기의 시간
인류의 지성은 오랜 기간 종이를 이용해 세상에 전해졌다. 철학가의 생각과 과학자의 이론은 책을 통해 후대에 전달되었고, 크리에이터의 영감과 아이디어 역시 연필 끝과 맞닿아 있는 지면으로부터 출발했다. 선뜻 종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한편에선 종이를 몰아내기 위한 시도가 꾸준히 있어왔다. 일찍이 앨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에서 컴퓨터 단말기의 등장으로 서류가 없는 전자 사무실이 탄생할 것을 예고했고 정보 통신 기술의 급속한 발달에 따라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적중하는 듯 보였다. 이른바 페이퍼리스 오피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페이퍼리스 트렌드는 업무 공간 밖에서도 활발히 이어졌다. 전자 여권, 이메일 청구서가 등장했고 종이 통장과 지폐는 머지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전망이다. 인쇄 매체들은 지면이 아닌 디지털에서 새로운 먹거리를 찾기 바빴고 전자책의 등장에 ‘이제 종이 책의 시대는 끝났다’는 여론도 형성됐다. 그럼에도 종이는 끝끝내 살아남았다. 아니, 단순한 생존 수준을 넘어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독립 서점이 새로운 힙 플레이스로 떠올랐고, 독창적인 콘셉트를 앞세운 소규모 독립 잡지들도 순항을 이어가고 있다. 몇 해 전 컬러링북의 인기에 이어 최근에는 플립북이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종이의 재발견과 함께 연필 등 전통적인 필기구에 대한 관심도 생겨났다. 타이핑의 시대가 고도화될수록 사람들은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종이나 연필이 디지털로 대체되어야 할 이유가 수십 가지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인간은 논리와 이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존재인 것을.


클래식 하드커버 노트 컬렉션.


스마트 라이팅 세트. 전용 펜인 ‘펜+’로 필기를 하면 내장된 적외선 카메라가 움직임을 기록해 애플리케이션 화면으로 전송한다. 최대 1000쪽까지 저장할 수 있다.


어도비 스마트 노트 블랙. 노트에 그림을 그린 후 전용 앱인 크리에이티브 클라우드 커넥티드Creative Cloud connected로 캡처하면 JPG나 SVG 파일로 변환된다.

디지털과 휴전 협정 맺은 몰스킨
몰스킨은 디지털 시대 종이의 생존 방식을 거론할 때 가장 먼저 입에 오르는 브랜드다. ‘몰스킨의 어머니’라 불리는 마리아 세브레곤디Maria Sebregondi는 그래픽 디자이너 출신으로 1990년대 중반 물류 회사 ‘모도 앤드 모도Modo & Modo’와 현대 유목민을 위한 툴키트로 몰스킨 노트를 고안했다. 세브레곤디는 앙리 마티스, 반 고흐, 피카소, 헤밍웨이 등 예술가들이 모두 같은 종류의 노트를 사용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했다. 그들이 사용하던 노트는 파리의 한 소규모 제본업체가 만들어 문구점에 납품한 제품이었고 특별한 이름 없이 그저 ‘인조 가죽 수첩’으로 불렸다.

세브레곤디와 모도 앤드 모도는 1986년 제조사 폐업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 수첩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렸고 ‘아직 씌어지지 않은 책’, ‘헤밍웨이, 피카소, 채트윈이 썼던 전설적인 노트’ 등으로 홍보하며 제품을 각인시켰다. 노트에 처음으로 브랜드 개념을 주입한 것이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일은 다음 순간 일어났다. 2007년 이탈리아의 사모펀드 신테그라 캐피털Syntegra Capital이 6200만 유로(약 826억 4000만 원)에 몰스킨을 인수한 것이다. 이는 몰스킨 연 매출의 네 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이 일로 신테그라 캐피털은 투자자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다. 2000년대 중반만 해도 IT 회사에 돈이 몰리던 때였고 (몰스킨의 선전과 별개로) 종이 기반 사업은 사양산업이라는 게 통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몰스킨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고공 성장을 이어갔다. 2011년 몰스킨의 순이익은 1380만 유로(약 183억 9400만 원)를 넘어섰고 2016년 기준 기업 가치는 5억 900만 유로(약 6784억 원)에 달했다. 사람들은 흔히 아날로그를 디지털의 대척점에 놓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몰스킨은 오히려 디지털과 상생하는 길을 택했다. 2012년 에버노트와 업무 제휴를 맺은 데 이어 2014년 스마트 펜 라이브스크라이브Livescribe와 연동하는 노트를 선보였고, 어도비의 크리에이티브 클라우드와 몰스킨 노트를 통합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몰스킨은 아날로그 기반의 산업이 디지털과 어떻게 상생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롤모델이 되었다.


완다 바르셀로나의 ‘From Color to Eternity’. 디올, 꼼데가르송, 콜레트 등 유명 브랜드의 쇼윈도와 쇼룸을 연출했던 이들은 등나무꽃에서 영감을 받아 4000여 개의 종이 꽃송이와 4000개의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로 이뤄진 초현실적인 정원을 연출했다. 이를 위해 미술관 직원들과 아르바이트생들이 약 2주간 전시장에 모여 종이를 접어야 했다고.


줄 와이벨Jule Waibel, 스튜디오 욥, 토르드 본체는 종이로 캐비닛, 커튼, 테이블, 벽걸이 장식품과 소품 등을 제작했다.


마음스튜디오는 핑크빛 종이 갈대로 이뤄진 산책길을 연출했다.


에르메스 같은 럭셔리 브랜드의 쇼윈도를 책임져온 디자인 듀오 짐 & 주는 폴라로이드 카메라, 워크맨, 필름 카메라, 팩 게임기 등 아날로그 문화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표현했다.

종이의 물성에 깃든 거인을 깨우다
우리는 종종 도구가 도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을 때 비로소 예술적 가치를 획득하는 경우를 목격한다. 마르셸 뒤샹의 작품 ‘샘’이나 정크 아트 같은 장르가 대표적이다. 오늘날 종이가 예술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즉 디지털의 발달로 종이가 기록 매체로서의 책무를 디지털과 나누기 시작하며 창작자들은 미처 주목받지 못했던 물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뮤지엄 산은 ‘종이가 형태가 될 때’라는 주제로 지난해 9월부터 오는 3월 4일까지 <종이조형>전을 열었다.

임옥상, 최정유 등 26명의 작가들은 부조와 설치 작업 등 다양한 형식과 방법을 통해 종이의 새로운 조형적 가치를 모색했다. 또한 대림미술관은 지난해 말 <Paper, Present: 너를 위한 선물>전을 열었다. 한국의 마음스튜디오를 비롯해 페이퍼 아트계의 가우디라 불리는 리처드 스위니Richard Sweeney, 핸드 커팅의 귀재 타히티 퍼슨Tahiti Pehrson, 아틀리에 오이Atelier O , 스튜디오 욥Studio Job, 토라푸 아키텍츠Torafu Architects, 토르드 본체Tord Boontje, 짐 & 주Zim & Zou, 완다 바르셀로나Wanda Barcelona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와 디자이너들이 전시에 참여해 종이 본연의 성질을 극대화한 작품을 선보였다. 대림미술관 안주휘 수석 큐레이터는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종이라는 소재의 무한한 가능성에 주목하고 싶었다”라고 기획 취지를 밝힌 뒤 “아름다운 종이 작품은 급증하는 아날로그 문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에 부응하는 시의적절한 주제”라고 덧붙였다.


Interview
안주휘 대림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기억을 상기시키는 감성적 매체로 종이를 바라봤다.”



전시의 기획 의도가 궁금하다.
대림미술관은 ‘일상이 예술이 되는 미술관’이라는 비전 아래 사진, 디자인, 건축 등 다양한 장르의 전시를 소개해왔다. <Paper, Present: 너를 위한 선물>전 역시 이러한 연장선에서 일상 소재인 종이가 감성적 매체로 확장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다시 말해 단순히 종이의 물성에서 오는 아날로그적 감각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에 담을 수 있는 ‘선물 같은 순간’에 주목함으로써 우리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감성적 매체로 종이를 바라보고자 했다.

특별히 주안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이번 전시는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편으로 시를 선택했다. 종이가 감성적인 매체로 확장되는 과정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 좋은 소재라고 생각한 것이다. 특별히 각 섹션에 도입한 ‘오밤 이정현’ 작가의 시는 대중과 예술 작품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한다. 보통 현대 예술을 감상할 때 관람객은 많은 지적 정보를 활용해 사고하게 되는데, 이를 유연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텍스트다. 이번 전시에서는 감성을 자극하는 시를 통해 전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자 했다.

리처드 스위니나 타히티 퍼슨처럼 페이퍼 아트 전문 작가도 있지만, 스튜디오 욥이나 마음스튜디오처럼 그렇지 않은 작가들도 전시에 참여했는데.
종이라는 단일 소재로 전시 전체를 이끌어가야 하는 만큼 자칫 지루해질 수 있다는 위험 부담이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식이 참여 작가군의 폭을 넓히고 작품의 장르를 다양화하는 것이었다. 오직 종이만을 재료로 작업하는 스위니 같은 작가부터 종이의 감성을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마음스튜디오까지 다양한 색깔의 작가들을 모아 넓은 스펙트럼의 작품을 선보인다면 전시의 스토리가 풍성해질 것이라 판단했다.


땅별메들리가 선보인 빈티지 몽당연필 홀더 세트. 오랜 기간 직접 수집한 연필 홀더 ‘불렛 펜슬Bullet Pencil’이 포함되어 있다. 불렛 펜슬은 1930~1950년대에 미국에서 대량생산하던 제품으로 알루미늄, 플라스틱, 황동 등의 소재를 사용했다.


연필 키오스크의 연필 시리즈.


스튜디오 이상의 텍스트 미니 펜슬. 해외에서 공수한 빈티지한 색감의 연필 위에 수동 불박기로 한 자 한 자 문장을 찍어냈다. 비틀스의 ‘Strawberry Fields Forever’, 휴먼 리그의 ‘Don’t You Want Me’ 등의 가사가 새겨져 있다.

연필을 만드는 디자이너들
오늘날 연필에 대한 관심이 다시 늘어난 것은 꽤나 불가사의한 일이다. 쉽게 부러지고 매번 깎아야 하는 데다 손에 묻어나기까지 하는 등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연필에 대한 애정을 놓지 못한다. 스마트폰 자판 몇 번만 두드리면 되는 세상에도 여전히 이케아 매장 한편에 비치된 연필을 한 움큼씩 손에 쥔다. 유튜브에선 사각사각 연필 소리를 녹음한 파일이 ASMR1) 영상으로 돌기도 한다. 이쯤 되면 연필이란 존재가 인간의 본능 어딘가를 자극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흔히 이야기하는 ‘소확행’의 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급기야 몇 년 전부터는 디자이너들이 직접 생산자로 나서는 경우까지 생겼다.

2015년 디자인 스튜디오 핀포인트가 서울문화재단 신당창작아케이드에서 선보인 연필 가게 ‘연필 키오스크’도 그중 하나다. 연필 수집가이기도 한 민진아 대표는 많은 사람들이 연필의 감각을 느끼고 새로운 영감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타이핑을 할 때 뇌가 받는 자극과 연필로 기록할 때의 자극은 분명 다르다고 생각한다. 결국 연필을 쓴다는 것은 손으로 생각한다는 의미이며 다양한 생각의 방식 중 하나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필 키오스크는 물건연구소Object Labs의 임정주 목선반 공예 작가와 크라프트 연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또한 이후 연필에 대한 철학과 단상을 문구로 새겨 넣는 연필 시리즈 ‘펜슬 메니페스토’, ‘워드 업’, ‘믹스테이프’ 등을 제작했다. 이 밖에 자체 필사 워크숍을 진행하거나 스튜디오 더블디와 함께 ‘연필을 위한 노트’와 ‘펜을 위한 노트’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사이 국내외에 다양한 연필 관련 편집매장과 프로젝트가 생겨났다. 뉴욕과 런던에서 잇달아 연필 전문 가게가 오픈했고 국내 라이프스타일 디자인 스튜디오 이상은 노래 가사나 위트 있는 문구를 새긴 텍스트 미니 펜슬 시리즈를 선보였다. 또한 디자인 스튜디오 땅별메들리는 1960~1970년대에 미국, 독일, 체코 등에서 생산한 연필을 모아 소규모 연필 가게 흑심을 오픈했고 지난해 말 텀블벅을 통해 빈티지 몽당연필 홀더 세트를 선보이며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1) 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자율 감각 쾌락 반응)의 약자. 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영상으로 2010년경 미국, 호주 등지에서 유행하기 시작했고 최근 국내에서도 영상 유통 플랫폼을 통해 인기를 끌고 있다.

Interview
민진아 핀포인트 대표, 연필 키오스크 기획자

“연필은 내게 완벽한 창작의 도구다.”



어떻게 연필에 관심을 갖게 됐나?
우연히 인터넷에서 연필 카페를 접하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연필 브랜드와 관련 문화를 경험했다. 비슷한 시기에 출판사 프로파간다의 <연필의 정석>이라는 책과 SBS의 연필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고, 지금은 절판된 헨리 페트로스키Henry Petroski의 책 <연필>을 구해 읽으며 연필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이후 품질 좋은 해외 브랜드의 연필과 국내 구형 연필을 수집하다가 자체 프로젝트로 연필 키오스크까지 열게 됐다.

연필 수집가로서 과거와 현재의 국내 연필 시장을 비교해보자면?
IMF 위기 이전 국내에서 생산한 연필은 국산 흑연과 나무를 사용했기 때문에 지금 유통되는 연필과는 품질이 확연히 달랐다. 연필 수집가들이 동네의 오래된 문방구를 찾아다니는 것도 이 시기에 생산된 질 좋은 연필을 구하기 위해서다. 국산 구형 연필 수집 붐으로 이제 동네 문방구에서도 더 이상 이런 제품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유럽이나 일본의 문구를 유통하는 중간 판매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연필을 비롯한 질 좋은 문구에 대한 국내 수요가 상당히 많은 편이라고 한다. 컬렉터나 중간상들의 활동이 활발해진 데다 문구의 품질에 대한 생산 기업들의 관심도 높아진 만큼 앞으로 우수한 제품이 많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연필은 내게 완벽한 창작의 도구다. 따라서 올해도 연필에 대한 이야기를 꾸준히 이어나갈 계획이다. 일단 좀 더 품질 좋은 연필을 만들기 위해 모 문구 회사와 협업을 모색 중이다. 또 3월 중 회현동에 매장을 오픈할 예정인데 다양한 팝업 기획전이나 창작 모임, 행사 등이 열리는 플랫폼으로 성장시킬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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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글: 최명환 기자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18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