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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모더니즘의 본산? 구시대의 망령? 삐딱하게 바라본 바우하우스
2019년이 되자 각종 미디어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바우하우스 관련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혹자는 브라운, 애플로 이어진 기능주의 디자인의 계보를 설파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현대 디자인 교육의 발상지라며 추켜세운다. 물론 이런 주장은 모두 일리가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바우하우스의 전부일까? 군맹무상群盲撫象 꼴이 되지 않으려면 빛과 그림자 양쪽을 균형 있게 살필 필요가 있다. 존경심은 갖되 맹목적으로 추앙하지 않기. 바우하우스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가 갖춰야 할 바른 자세 아닐까?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최경원 서울대학교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기아자동차,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등에서 한국 문화 관련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한국 문화의 현대적 해석을 위해 2010년 현디자인연구소를 설립했다. 주요 저서로는 <르 코르뷔지에 VS 안도 타다오> <알레산드로 멘디니>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 문화 버리기> 등이 있다.



바우하우스의 창립 선언문 표지에는 고딕 성당의 뾰족탑 위에 사방으로 빛나는 별이 그려져 있다. 이는 바우하우스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보여주는 듯하다. 지금껏 한국에서 바우하우스는 마치 북극성처럼 기능주의라는 눈부신 빛을 발하며 밤하늘을 밝혀왔다. 하지만 북극성의 영향력이 다른 별들이 빛을 발하는 데 장애물이 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바우하우스가 디자인사에 끼친 영향력은 분명 눈부시지만 이 학교를 둘러싼 여러 정황을 살펴봤을 때 무조건 찬양만 하기에는 여러모로 의문이 남는다. 순수한 현대 디자인의 이념을 만들고, 현대 디자인의 전형을 만든 최초의 디자인 학교라는 믿음부터 그렇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직후 모든 것이 초토화된 패전국 독일의 상황에서 과연 바우하우스가 순수한 디자인을 추구할 수 있었을까? 우리로 치면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폐허 위에 순수한 디자인 이념을 추구하는 학교가 만들어졌다는 것인데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의심이 생긴다. 또 이 디자인 학교가 왜 그리 오랫동안 나치에 시달렸고 급기야 수색까지 당하며 문을 닫아야 했는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즉 순수한 디자인 이념이나 기능주의로만 말하기에는 바우하우스에 드리운 정치적 그림자가 너무나 짙고 어둡다. 아쉽게도 바우하우스를 다룬 책들은 대부분 이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정권을 잡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주의적 성향이나 초대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의 사회주의 운동 전력을 빼고 과연 바우하우스를 논할 수 있을까? 바이마르 공화국이 정권을 잡자마자 만든 바우하우스가 과연 그런 정치적 성향을 뒤로하고 순수한 디자인 학교가 될 수 있었을까? 나치가 정치적으로 득세하자 그 반대급부로 바우하우스 내의 사회주의적 성향이 급진화되고, 하네스 마이어로 대표되는 극렬 사회주의 성향의 교수나 학생들은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를 온건주의자로 낙인찍어 거의 내쫓다시피 했다. 이것으로 미뤄봤을 때 바우하우스를 순수한 디자인 학교로만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발상 혹은 기만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의심을 뒤로하고라도 바우하우스가 추구한 기능주의가 오늘날에도 동등한 가치와 위상을 지니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진지한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

경제적으로 거의 궤멸 상태였던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독일에서 바우하우스가 화려하고 심미적인 디자인을 추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생존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절대 심미적 가치나 정신적 가치를 선택할 수 없으니까. 다시 말해 전쟁과 같은 비정상적인 사태로 인해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는 일종의 생존 전략에 가까웠다(반대로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승전국이자 전통적인 선진국인 프랑스에서는 기능주의 디자인이 그리 각광받지 못했다고 한다). 제1, 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에게는 한국전쟁 이후 압도적으로 기능주의가 성행한 데에도 이러한 사회적 배경이 있다. 한국 사회는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개발도상국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다. 경제적 제약이 따랐던 개발도상국 시기에는 기능성을 추구하는 디자인이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이야기가 다르다. 지금 바우하우스를 둘러싼 가치들이 오히려 우리의 발목을 단단히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21세기 이후 유기적인 우주관을 지향하고 있는 서구권의 디자인이나 자국 문화에 뿌리를 둔 주체성 있는 디자인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끌고 있는 일본과 중국의 디자인을 보면 이런 의문이 확신으로 굳어진다. 이제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바우하우스를 고이 접어 박물관에 모셔두어야 할 것 같다. 아쉽지만 이제 바우하우스를 굳게 잡았던 손을 놓아주자. 글 최경원 현디자인연구소 소장


영웅의 이면

김종균 서울대학교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디자인학 박사를, 충남대학교에서 법학 석사를 마쳤다. 현재는 특허청에서 행정사무관으로 재직 중이다. <한국의 디자인> <디자인 전쟁> 등을 썼고 공저로는 <디자인 평론> 등이 있다. 한국 디자인사와 문화, 상표와 디자인 지식재산권을 주제로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국내에 출간된 디자인사 책들은 주로 바우하우스를 예술과 산업을 연계하고, 기계 생산에 적합한 보편적이고 합리적이며 ‘순수한’ 조형 언어를 정립한 주역처럼 그리고 있다. 여기서 바우하우스의 역사는 흡사 사회문제에 참여하고 유토피아적 이상을 추구해나가는 홍길동식 영웅담과 닮았다. 고난을 헤쳐나가는 대개의 영웅들처럼 바우하우스에도 나치의 핍박으로부터 도피하듯 학교를 옮겨 다니고, 교내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해나가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홍길동은 소설이지만 바우하우스는 엄연한 역사라는 것을. 바우하우스의 성과와 평가가 정당한 것인지 아니면 사후 주석이 과하게 덧붙여져 포장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유럽 추상미술이 미국을 통해 자유주의의 대표 양식으로 포장됐듯이 바우하우스도 발터 그로피우스나 미스 반데어로에 등이 미국으로 건너가 전파하면서 실제의 성과 이상으로 포장된 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바우하우스를 개인사적 측면에서 바라보자. 바우하우스가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교사와 학생들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누구보다 많은 헌신을 한 것은 역시 학교의 궁극적 비전을 제시한 발터 그로피우스였다. 그의 뒤를 이은 두 교장 하네스 마이어Hannes Meyer와 미스 반데어로에는 재임 기간이 너무 짧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국 독일에 들어선 바이마르 공화국은 국립 디자인 학교를 세우고, 젊고 저명한 건축가 그로피우스를 교장에 임명했다. 1918년 전쟁터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제대한 그는 1915년 유명 음악가 말러의 미망인인 알마 신들러Alma Schindler와 결혼했지만 바우하우스 설립 이듬해인 1920년 이혼했다. 자녀는 자기 자식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나마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바우하우스 설립 전후로 그로피우스는 몸과 마음의 상처가 깊었다. 바이마르 정부는 바우하우스를 설립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전후 배상금을 갚느라 학교 운영 자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고 그로피우스는 연일 후원금을 구하러 동분서주해야 했다. 산업계와의 협력을 통해 후원금을 조달하려 애썼지만 교사들이 반발했고 협력은 성사되지 못했다. 생존 앞에서 이념은 무의미했고 학교의 재정 자립도 요원했다. 심지어 나치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다양한 선전미술을 선보이며 나치 미술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할 정도였다. 전후 학교 시설은 열악했고 선생과 학생 모두 궁핍했다. 학과장으로 데려온 요하네스 이텐은 디자인보다는 명상과 기도,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사이비 교주와 같았다. 학생들은 이텐의 강한 카리스마를 추종했고 수업 내용도 공업 생산이 아닌 표현주의 성향의 공예 학교에 맞춰졌다. 교내에서는 늘 선생 간, 학생 간 이념 갈등으로 반목과 난동이 이어졌다. 나치는 바우하우스의 외국인 교사들을 감시했다. 전후 분열된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돈을 구하느라, 학교 내 갈등을 중재하느라 국립학교 계약직 교장의 생활은 고달팠다. 바우하우스는 한 시대의 디자인 정신이 투사된 완전체로서의 학교라기보다는 그로피우스에게 전쟁과 같은 고통을 주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로피우스가 주장한 미술과 산업의 연계는 두 번째 후원 도시였던 데사우로 이전하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대규모 항공기 공장이 있던 데사우시는 공업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아래 바우하우스를 유치해 안정적인 재정 지원을 마련해주고 신축 교사를 제공했다. 그로피우스는 시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교육과정을 개편했다. 그리고 바우하우스의 이념이 막 꽃피려는 찰나 그로피우스는 시 당국과 계약을 위반하면서까지 바우하우스 교장직을 벗어던졌다. 자기가 세운 학교에서 스스로 쫓겨나다시피 하는 상황인데도 무척 행복해했다고 하니 9년간의 학교 운영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로피우스의 생애는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철학적 사유나 예술에 대한 열정보다 궁핍한 학교의 존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경영인의 모습이 더 강하다. 개인과 기관을 동일시하기는 어렵지만 완전히 별개의 것도 아니다. 난세에 영웅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영웅은 사후 후대에 의해 재발견되고 각색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읽는 바우하우스의 낭만적 정열과 개혁가적 이상은 포장된 것일지 모르며, 이들의 성과는 현실과 타협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얻은 산물일 수도 있다. 시대가 그것을 요구했고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타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타인의 업적을 무턱대고 폄훼하는 것은 질투밖에 되지 않는다. 또 어느 시대나 정신적 지향점으로서의 영웅이 필요하다. 하지만 과장되고 과잉된 주석은 올바른 역사 인식을 왜곡시킬 위험이 있다. 역사와 소설이 섞이면 종교가 될 수 있다. 100년이나 된 ‘바우하우스교’의 도그마를 이제라도 다시 냉정하게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글 김종균 특허청 행정사무관



바우하우스, 비평적으로 다시 읽기 <바우하우스 50주년 이후의 50주년>전

김상규 대학과 대학원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후 퍼시스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 큐레이터로 재직하면서 <한국의 디자인> <모호이너지의 새로운 시각> 등의 전시를 기획했으며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디자인학과 교수로 있다. <디자인 아카이브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저서로는 <의자의 재발견> <디자인과 도덕> 등이 있다.



파리 대학생들이 소르본 대학교를 점거한 바로 다음 날인 1968년 5월 4일,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뷔르템베르기셔 쿤스트페라인 미술관 Wu¨rttembergischer Kunstverein Stuttgart에서는 바우하우스 개교 50년을 기념하는 전시 <바우하우스 50주년 50 Years of the Bauhaus> 개막식이 있었다. 독일연방공화국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한 성대한 행사였지만 이날 방문객 중에는 반갑지 않은 손님도 있었다. 바로 울름 조형 대학Hochschule fu¨r Gestaltung Ulm 재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울름 조형 대학을 폐교하려는 계획에 반대해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이 학교는 바우하우스 정신을 계승한다는 취지로 1953년에 개교했는데 베트남전 반대 등 교수와 학생들의 사회참여 의식과 활동을 위험한 정치적 성향으로 본 정부 당국이 재정 압박을 가했고 결국 1968년 9월 말 폐교가 결정되었다). 그로부터 꼬박 50년이 흐른 2018년 5월 4일, 정확히 같은 자리에서 다시 한번 바우하우스 전시가 열렸다. <바우하우스 50주년 이후의 50주년50 Jahre nach 50 Jahre Bauhaus 1968>이라는 이름의 이 전시는 German-American brand’로 양식화된 바우하우스의 면모를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 반면 지난해 9월 23일까지 이어진 2018년 전시는 바우하우스 출신들의 정치적 행보와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냈고 바우하우스를 둘러싼 모더니스트들의 여러 얼굴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현재 뷔르템베르기셔 쿤스트페라인 미술관 큐레이터들 입장에서는 1968년의 전시가 프로파간다 성향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성찰을 담아 미술관의 기획 역량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전시장 초입에는 1968년 당시의 전시 자료가 한데 모여 있었다. 헤르베르트 바이어가 디자인한 포스터를 배경으로 <바우하우스 50주년>전의 개막식 상황을 보여주는 미술관 축소 모형이 놓여 있었는데 재미있게도 당시 울름 조형 학교 학생들이 시위하던 위치까지 표시되어 있었다. 전시장 한편에는 시위대를 향해 메가폰을 잡고 타이르는 발터 그로피우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고 헤드셋을 착용하면 당시 그로피우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뷔르템베르기셔 쿤스트페라인 미술관의 공동 관장이자 이번 전시의 공동 큐레이터인 한스 크리스트Hans D. Christ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그로피우스는 정치적이지 말 것과 바우하우스를 존중해달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또 이곳에는 팻말을 들고 시위하는 울름 조형 학교 학생들의 사진이 벽면에 기대어 있었다. 그 뒤로는 1920~1940년대의 주요 전시를 연대기순으로 보여주는 긴 섹션이 이어졌다. 20세기 초의 전시는 주로 유럽 국가들의 기술력과 이데올로기를 과시하는 프로파간다의 수단이었다. 1928년의 <주거Die Wohnung>전부터 1938년 뉴욕 MoMA에서 열린 전에 이르기까지 총 20개의 전시를 설명하는 패널들이 전시되었는데 이 가운데 이목을 끈 것은 1934년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 민족-독일의 일 Deutsche Volk-Deutsche Arbeit>전이었다.


러시아의 예술 학교 브후테마스를 소개한 섹션. 브후테마스 멤버들이 레닌과 예술 교육의 목적에 대해 토론하는 영상도 상영했다.


<바우하우스 50주년 이후의 50주년>전 포스터.


1920~1940년대의 전시와 그래픽 디자인을 보여주는 ‘실험과 프로파간다 사이Between Experiment and Propaganda’ 섹션.


<바우하우스 50주년>전 개막식에 당시 시위대가 있던 자리와 그로피우스가 있던 자리를 모형으로 재현해놓았다.
이 전시의 참여자 중 적지 않은 수가 낯익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부한 디자인사에 따르면 바우하우스는 1933년 나치의 탄압으로 폐교됐다. 이미 그 이전부터 구성원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으니 적어도 1933년 이후 나치가 주도한 전시에서는 이들의 이름이 없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독일 민족-독일의 일>전에는 바우하우스 멤버Bauhausler들의 이름이 오롯이 새겨져 있었다. 헤르베르트 바이어는 나치의 선동가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가 서문을 쓴 도록을 디자인했고 전시 공간 디자인에는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데어로에, 요스트 슈미트 등이 참여했다. 전시가 나치의 프로파간다와 모더니스트의 실험이 뒤섞인 장으로 치러진 만큼 전시 참여자를 모조리 나치의 부역자로 몰아세우는 것은 지나친 처사일지 모른다. 하지만 ‘탄압’한 정권의 프로젝트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대목은 도덕성을 의심하기에 충분하다(<바우하우스 50주년 이후의 50주년>전이 당시의 전시를 특별히 부각시키거나 평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전시와 균등하게 설명했다. 이 외에도 바우하우스 멤버들의 ‘의외’의 활동을 보여주는 내용이 곳곳에 있었지만 모두 덤덤하게 객관적인 사실만 기록되어 있었다). 이 전시는 기획자가 도입 글에서 밝힌 대로 ‘곁가지의 이야기digressions and byways’가 풍성했다. 예컨대 바우하우스와 같은 시기, 러시아의 예술 학교 브후테마스Vkhutemas가 무엇을 지향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나 모더니스트 건축가들이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y complex와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 등이 전시됐다. 또 덴마크 화가 아스게르 요른Asger Jorn과 막스 빌Max Bill이 새로운 바우하우스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쟁하며 주고받은 편지들도 있었다. 그런데 알려져 있다시피 빌은 울름 조형 학교를 세웠고 요른은 이미지주의 바우하우스 국제 운동The International Movement for an Imaginist Bauhaus을 결성했다. 이는 상황주의 인터내셔널로 연결되고 68운동으로 넘어간다. 68운동은 다시 프랑스의 환경연구소Institut de l’Environnement로, 그리고 이곳 출신들이 만든 그라푸스Grapus로 이어지는데 이 과정의 자료와 작품이 전시장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20세기의 주요 사건들이 정신없이 뒤섞여 있어 정작 바우하우스가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바우하우스를 제대로 들여다볼 기회를 주었다. 그동안 바우하우스 관련 전시는 대부분 바우하우스 자체에 집중하느라 오히려 객관적으로 조망할 여유가 없었다. 이에 반해 <바우하우스 50주년 이후의 50주년>전은 <바우하우스 50주년>전을 비평적으로 다시 읽어냄으로써 객관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모처럼 바우하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진 올해, 이 전시에서 한 수 배워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즉 역사적 맥락에서 여러 정황을 놓고 냉정하게 비평해보는 것 또한 바우하우스 개교 100주년을 알차게 기념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뜻이다. 글·사진 김상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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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담당 최명환 기자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19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