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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역사 속 컬렉티브 공간 - 2

뭐든지 모여서 머리를 맞댈 때 그럴듯한 아이디어도 나오고 시너지도 일어나는 법이다. 비대면 시대에 줌이나 클럽하우스 같은 온라인 플랫폼이 오프라인 미팅의 기능을 대체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물리적 공간에서의 만남을 선호한다. 그렇다면 당대 잘나가는 문인이나 예술가, 디자이너들이 모이던 공간은 어디였을까? 17~18세기 프랑스에서는 상류 계층을 중심으로 정기적으로 책을 낭독하거나 토론하는 살롱 문화가 발달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카페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지금의 퇴폐적인 이미지와 달리 카바레는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아방가르드 아티스트를 위한 실험 무대였다. 개화기 조선에서도 다방을 중심으로 문화인들이 뭉쳤다.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당대 문인과 예술가는 종로 등지에 직접 다방을 오픈하고 문인회를 조직하거나 전시회를 열었다. 요제프 호프만이 빈에 오픈한 카바레 플레더마우스부터 이상의 제비다방과 안상수와 금누리가 홍대 앞에 오픈한 일렉트로닉 카페에 이르기까지 컬렉티브가 모였던 역사적인 공간을 소개한다.



제비다방의 파산 직전 모습을 묘사한 박태원의 삽화. 〈조선일보〉, 1939년 2월 22일 자.

제비다방(경성, 1933~1935)
시인 이상의 다방 편력은 익히 알려져 있다. 제비다방은 총독부 건축 기사로 일하던 그가 기생 금홍을 만나 서울 종로에 차린 다방이다. 〈끽다점 평판기〉에 따르면 제비다방은 외관이 굉장히 모던했다. 건물 전면을 대형 유리로 마감해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던 것이다. 대로변 붉은 벽돌집 1층에 유리창을 단 다방 모습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인삼차를 마시며 유리 너머로 길 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은 당시에도 한가로운 도시인의 취미였다. 다방 내부는 사방이 흰 벽이고 아무 장식 없이 동쪽 벽에 커다란 초상화가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일본식 아르데코풍으로 화려하게 꾸민 낙랑파라와는 대조적이었다. 때때로 음악회와 미술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던 이곳에서는 이상과 가까웠던 박태원, 김기림, 이태준 등이 모였다. 제비다방은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1935년 문을 닫게 되는데, 1939년 2월 22일 자 〈조선일보〉에는 박태원이 파산 직전 제비다방의 모습을 회고하는 글과 그림이 실렸다. 마담도 사라지고, 나나오라 축음기도 팔아먹고’, 집세도 내지 못해 쓰러져가던 제비다방의 모습이 퍽 안타까웠나 보다. 이후에도 이상은 인사동에 ‘쓰루’, 명동에 ‘맥’ 등을 개업할 만큼 다방 사랑이 대단했지만, 이상을 진짜 매혹한 것은 경영보다는 다방이라는 공간이 주는 낭만과 예술가들의 교류였던 듯하다.



멕시코 다방.

멕시코 다방(경성, 1929~연도 미상)
1890년대 무렵 국내에 소개된 커피는 발음 나는 대로 ‘가배차’, 또는 서양인들이 끓여 마시는 국이라는 뜻에서 ‘양탕국’으로 불렸다. 고종이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일화가 있듯 커피는 상류 계층이 독점하던 기호 식품이자 서양 문물의 상징이었다. 그러다 1920년대에 경성에 하나둘 등장한 근대식 다방 덕분에 커피가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일본인이 많이 거주했던 명동 일대, 그리고 조선인이 밀집했던 종로와 충무로를 중심으로 다방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1927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감독 이경손이 종로 관훈동에 오픈한 ‘카카듀’를 시작으로 영화배우 복혜숙이 인사동에 낸 ‘비너스다방’ 등 여러 문화계 인물들이 다방 창업에 뛰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방은 동경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특히 일본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배우 김용규와 심영이 낸 종로2가의 ‘멕시코 다방’은 건물 외벽에 걸어놓은 주전자 모양의 대형 설치물로 인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화가 도상봉, 사진가 이해선, 무대장치가 김정환, 화가 구본웅 등이 합심해 공간에 어울리는 의자와 테이블을 만들고 실내를 장식했다.

사진에 보이는 ‘블루 윙스 스튜디오Blue Wings Studio’ 간판이 걸린 건물 2층은 연극배우들의 연습소로 사용되었다. 이곳을 드나든 문화인으로는 화가 구본웅을 비롯해 시인 이상, 소설가 이광수, 시인 겸 언론인 김형원, 삽화가 겸 배우 안석영, 화가 도상봉 등이 있다. 수익이 목적이라기보다 젊은 문화•예술인을 위한 컬렉티브 공간을 제공하는 게 목적이었던 멕시코 다방은 안타깝게도 경영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2년 만에 다른 이에게 운영권이 넘어갔다. 당시만 해도 외상으로 커피를 마시는 가난한 예술인이 많았고, 테이블 회전율이 저조했기 때문에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던 까닭이다(이들처럼 다방에 앉아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는 부류를 ‘벽화’라고 불렀다고). 주인이 바뀌고 맞은편에 유흥업소 낙원회관이 들어선 뒤로 한때 예술인의 아지트였던 멕시코 다방은 선정적인 극장 포스터를 걸어둔 그저 그런 다방으로 전락했다가 문을 닫았다.

참고 도서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강준만 · 오두진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낙랑파라. 1층에는 다방, 2층에는 이순석의 화실이 있었다.

낙랑파라(경성, 1932~1940)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저자 박태원은 자주 다방 낙랑파라에서 글을 쓰곤 했다. “나는 다시 다방 ‘낙랑’ 안, 그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중략) 이곳 주인이 나를 위하여 걸어 엔리코 카루소의 엘레지가 이 안의 고요한, 너무나 고요한 공기를 가만히 흔들어놓았다.” 박태원의 단편소설 〈피로〉(1933)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낙랑파라는 예술과 음악이 흐르는 공간이었다. 이곳의 주인은 공예가이자 나중에 서울대학교 교수로 임용된 이순석이다. 공예사가 허보윤에 따르면, 1931년 동경미술대학교 도안과를 졸업하고 돌아온 이순석은 유학 시절 작업했던 상업 미술 도안, 공예 미술 도안, 실내 장식 도안 등 작품 30점을 동아일보사 강당에서 전시했다. 첫 개인전을 성황리에 마친 그는 곧 화신백화점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1여년 만에 백화점을 나와 낙랑파라를 오픈했다. 1933년 10월에 발행한 잡지 〈삼천리〉는 ‘인테리 청년 성공 직업’이라는 기사에서 낙랑파라에 대해 입구에는 이국적인 식물이 놓여 있고, 내부는 대패밥과 백사로 섞은 토질 마루 위에 슈베르트와 디트리히 등의 예술가 사진과 데생이 걸려 있었다고 묘사했다.

이순석은 건물 1층은 다방, 2층은 아틀리에로 사용했는데, “파리 뒷골목에서 청절을 지켜가며 전심예도에 정진하는 예술가의 화실”이라거나, “명화 ‘파리의 지붕 밑’에 나오는 세트 속의 한 조각”을 연상시킨다는 〈삼천리〉 기사에서 당시 낙랑파라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다. 1933년 순수 문학을 추구하는 9명의 문인들이 모여 결성한 문학 컬렉티브 ‘구인회’가 이곳을 아지트로 삼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당시 구인회 창립 멤버로는 김기림, 이효석, 정지용 등이 있으며 박태원과 이상도 나중에 합류했다. 각종 일간지와 문학 잡지에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했던 이들은 매월 월평회를 열어 시, 소설, 희곡 작품에 대해 논하고 공개 문학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한편 낙랑파라는 레코드 250매를 보유하고 있어 문인 외에도 클래식 애호가들이 음악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매주 금요일에는 빅타 레코드의 신곡을 틀어줬으며 화가 구본웅과 길진섭 등 여러 아티스트들의 전시가 열렸고 1935년 개봉한 영화 〈춘풍〉을 유료 상영하기도 했다. 1936년 배우 김연실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낙랑파라는 ‘낙랑’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1940년까지 영업하면서 문화 교류의 산실이 되었다.



올로올로.

올로올로(서울, 1990~연도 미상)
신촌역 인근 건물 지하에 위치했던 올로올로는 디자인과 현대미술을 넘나들며 활동했던 최정화 작가가 1990년에 디자인한 공간이다. 앱솔루트 보드카 그림이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키 낮은 테이블이 놓여 있던 이곳은 당시 유행했던 록 카페의 개념을 넘어 노래하고 춤추는 클럽에 더 가까웠다. 당시 김중만, 김용호, 안웅철 같은 사진작가를 비롯해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소설가 장정일과 마광수, 작가 이불, 백현진, 안은희까지 지금까지도 쟁쟁한 예술가들이 자주 출몰했다. 이제는 중년이 된 이들에게 올로올로는 왕년의 청춘이 빛을 발하던 성지였던 셈이다. 1980년대가 광장의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클럽의 시대라고 옛 신문은 전한다. 1990년대는 서서히 중심에서 주변으로, 민중에서 대중으로 사회적 구도가 재편되던 때로, 개인이나 소수 집단이 모여들 만한 장소로 클럽이 제격이라는 기록이다. 올로올로는 1990년대 초, 음악과 춤, 술이 있고 약간 폐쇄적이면서도 자유분방한 클럽 문화가 피어오르던 장소였다.

참고 〈한겨레〉 1996년 11월 30일 자 기사



일렉트로닉 카페.

일렉트로닉 카페(서울, 1987~1991)ㅇㄹㅇ
홍대 앞 카페 문화의 태동기에 날개 안상수와 금누리가 만든 일렉트로닉 카페는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무려 1987년, 안상수와 금누리는 샌타모니카의 텔레마틱 선구자였던 킷 갤러웨이Kit Galloway와 셰리 라비노비츠 Sherrie Rabinowitz의 통신 미술에서 영감을 받아, 사용하던 작업실을 고쳐 이 공간을 열었다.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네트워크 통신은 대중화되기 전이라는 점에 더욱 놀랍다. 흑백 모니터를 두고 16비트 컴퓨터를 전화선에 연결해 네트워크를 구축한 일렉트로닉 카페는 어떤 면에서 세계 최초의 인터넷 카페라고 할 수 있다. 공간은 다소 협소했지만 당시 예술가와 컴퓨터 마니아, 그리고 테크놀러지에 호기심을 가진 이들이 이곳을 즐겨 찾았다. 1990년에는 고낙범, 금누리, 백광현, 안상수, 이규철, 최정화, 이불 등이 참여해 LA와 서울을 연결하는 웹 아트 프로젝트를 벌이기도 했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홍대 앞에서 가장 힙한 역사를 장식한 장소임에 틀림없다. 당시 홍대 앞에 영혼을 맡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3호선버터플라이의 성기완은 본인의 저서 〈홍대 앞 새벽 세시〉에서 이곳을 홍대 문화 태동의 주역이라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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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글 월간 〈디자인〉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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