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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유니섹스 패션을 넘어, 젠더 프리 패션 트렌드

‘프리 사이즈free size’는 패션계의 오래된 농담이다. 사이즈를 제대로 재단할 역량이 없는 의류업체에서 붙인 이름이라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체형’이 아닌, 마른 체형용이라고 해석한다. 마른 체형이라면 웬만큼 조악한 의류 디자인, 움직일 때마다 가랑이가 끼이는 탓에 수난의 길을 걷는 듯한 짧은 밑위나 팔을 조금 들었다 치면 날개가 생기는 빠듯한 겨드랑이 봉제도 적당히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프리 사이즈란 ‘마른 체형이 곧 정상 체형’이라는 강박을 부추기는 ‘낫 프리 사이즈not free size’다. 이런 ‘낫 프리’의 영역에는 젠더도 포함된다.


해리스 리드

해리스 리드
우리는 온라인 쇼핑몰 메뉴의 ‘Women/Man’ 카테고리를 무심코 클릭하며 성별 이분법이 자연스럽다는 관념도 클릭한다. 하지만 최근 패션계에서 이런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젠더 프리gender free’ 트렌드다. 보이 그룹 샤이니의 태민이 크롭트 톱을, BTS의 지민은 치마바지에 퍼 부츠를 신은 것이 대표적인 신호다. 이 젠더 프리 패션은 기존의 유니섹스unisex 패션과는 다르다. 유니섹스 패션은 이른바 ‘아재 오방색(검정·회색·흰색·네이비·베이지)’과 펑퍼짐한 실루엣 일색이었다. 성별 구별을 없앤다기보다 ‘남녀 공용’을 내세우며 여성성과 남성성을 단순히 부각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반면 젠더 프리 패션은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의 문법을 의식하지 않거나, 오히려 적극적으로 교란하는 스타일링이다.


플레이 아웃 어패럴 @Adrianna Favero
이런 스타일링은 항상 ‘게이 같다’는 비난처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치부돼왔다. 하지만 젠더 프리 패션은 그런 시선이 오히려 우스꽝스럽다고 말하고 있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를 빌리자면, 성별 이분법을 고수하는 패션 신념을 걸치는 건 이제 수치스러운 시대가 다가오는 중이다. 옷 한 벌에는 그 사회의 인식이 촘촘히 재봉질돼 있다. 예를 들어 여성복의 주머니는 사회 활동이 허락되지 않아 주머니가 없던 편견이 튿어진 자리다. 그래서 패션의 진보란 촘촘히 스민 사회의 인식을 다시 찢어도 보고, 재봉된 옷의 영토를 다시 꿰매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 그런 진보를 만들어온 패션 브랜드 혹은 디자이너를 소개한다. 



제니스,

‘여성 시계=핑크, 주얼리’ 공식을 깨다








제니스
시계업계의 ‘젠더 시간성’을 가리키는 시침은 오랫동안 ‘근대의 시간성’에 멈춰 있었다. ‘남성=파랑, 여성=핑크’라는 디자인 공식의 유래는 제 1, 2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장에서 적의 눈에 덜 띄기 위한 색상으로 군복에 주로 파란색을 사용하고, 또 주로 남성이 군대에 동원되면서 성별 이분법이 강화됐다. 책 〈시계 이야기〉에 따르면 ‘여성 시계=주얼리 장식’이라는 공식도 이즈음 형성됐다. 여성복에 주머니가 없어 팔찌, 목걸이 등에 시계를 달았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계 산업은 최근까지도 이 공식을 상품 라인에 고수해왔다. 하지만 최근 시계 브랜드들이 낡은 성별 이분법 공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간성을 발굴 중이다. LVMH 그룹에 소속된 스위스 명품 시계 브랜드 제니스Zenith가 대표적이다. 제니스는 고진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 기술을 보유한 브랜드로 케네디 시계, 간디 시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세계 각국의 리더들이 애용했다. 이 브랜드는 올해 초 온라인 쇼핑몰에서 성별 기반 검색 기능을 없앴다. 대신 시계 케이스의 직경별로 검색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전에도 같은 디자인의 제품을 크기별로 구별한 사례는 있었지만, ‘남녀 공용’이라는 타이틀로 남성용으로 제작한 시계의 크기를 줄여 여성용을 만든 수준에 그쳤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외에도 LVMH 소속의 또 다른 브랜드 위블로Hublot는 젠더 프리 컬러 ‘빅뱅 밀레니얼 핑크Big Bang Millennial Pink’를 브랜딩했다. 그리고 이 컬러를 입힌 시계의 모델로 프랑스 축구 선수 킬리안 음바페Kylian Mbappé를 내세웠다. 



아동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존 루이스

이 사회의 성별 이분법을 익히고 싶으면, 아동복 매장으로 가면 된다. 아동기는 신체에 2차 성징이 드러나지 않는데도 성별 구분이 성인복보다 더욱 뚜렷하기 때문이다. 흔히 여아 옷에는 핑크 컬러에 ‘pretty’, ‘princess’ 등의 문구가, 남아 옷에는 블루 컬러에 ‘be ambitious, genius’ 같은 문구가 프린팅되어 있다. 그래서 여아 모델에 공룡 무늬가 프린팅된 스웨터를 입히기만 해도 화제가 된다. 영국의 백화점 존 루이스John Lewis가 자체 제작하는 아동복 라인 얘기다. 존 루이스는 컬렉션 카테고리를 ‘Boys’, ‘Girls’로 나누는 대신 ‘Girls & Boys’, ‘Boys & Girls’라고 표기했다. 캐롤라인 베티스Caroline Bettis 대표는 이런 행보에 대해 〈데일리 메일Daily Mail〉에서 “부모나 자녀에게 더 많은 선택의 자유와 다양성을 제공하고 싶다”고 밝혔다. 



해리스 리드,
패션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다











“저는 사람들이 성별 이분법이라는 가상현실을 없애기도 전에 메타버스에 대해 말하고 가상현실을 좋아하는 일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 겸 모델 해리스 리드Harris Reed의 말이다. 리드는 지금 패션계에 오래도록 박혀 있던 성별 이분법을 튿어내 정교하게 다시 테일러링하는 최고의 장인으로 꼽힌다. 마일리 사이러스, 리한나, 에즈라 밀러 등 세계의 유명 인사들이 그의 옷을 걸치는 이유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자유로이 부유하는 리드의 얼굴은 그 존재만으로 ‘여성다움, 남성다움’만이 아름답다는 편견을 깬다. 일찍이 구찌는 리드가 학업을 마치기도 전에 디자이너 인턴으로 발탁해 직접 스타일링한 의상을 입고 구찌 크루즈 쇼 런웨이를 걷도록 했다. 리드의 디자인과 스타일링은 젠더 유동성(gender fluid)을 정체성으로 삼으면서, 주로 18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여왕의 의복과 영국 뮤지션 데이비드 보위의 글램 룩•을 레퍼런스로 삼는다. 화려한 레이스와 스팽글 장식이 달린 풍성한 주름치마와 플레어 바지, 그리고 과하게 넓은 챙의 헤드피스가 시그너처다. 또 리드는 패션 컬렉션 ‘60 Years a Queen’에서 한 모델에게 상반신의 오른편은 남성, 왼편은 여성의 몸을 이어 붙인 가슴 장식을 착용하게 했다. 리드는 〈보그 UK〉와의 인터뷰에서 패션의 영향력을 강조하며 “우리는 걸어 다니는 깃발”이라고 표현했다. “어릴 적 핑크 컬러 셔츠를 입고 등교하면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사람들을 자극하고 생각하도록 하는 패션의 힘에 매료당했다.” 해리스 리드는 패션을 통해 사회가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만드는 책임을 갖고 있다.

• 글램 룩glam look 음악 장르 글램 록의 정신을 반영하여, 과장되고 화려한 메이크업과 여성성, 남성성을 뒤섞은 스타일.




플레이 아웃 어패럴,
유색인종과 유방암 수술한 몸까지 포괄하는 언더웨어



© Adrianna Favero 



© Flaminia Fanale 
미국 란제리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은 2019년 패션쇼를 공식 종료하기까지 속옷의 ‘이데아’를 상징했다. 하지만 그 이데아란 협소한 아름다움에 불과했다. ‘시스젠더, 백인, 비장애인, 마른 체형’이라는 기준에 맞춰 판매했기 때문이다. 여성 팬티에 집요하게 레이스와 리본을 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언더웨어 브랜드 플레이 아웃 어패럴Play Out Apparel은 기존의 편향된 속옷 시장에 문제를 제기하고, 디자인뿐 아니라 직장 문화 등 젠더 평등 관점에서 운영을 고민하는 곳이다. 특히 모델을 고용할 때 퀴어 아시아 남성, 흑인 트랜스젠더 여성 등 포괄적(comprehensive)인 평등을 추구한다. 플레이 아웃 어패럴은 유방암 생존자를 모델로 세워 큰 화제가 됐다. 이에 대해 공동 대표 애비 슈거는 이렇게 말했다. “대중문화에서 유방이 여성다움의 상징이라고 밀어붙일 때, 유방 절제술을 받은 사람의 성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고민한 결정이었다.” 애비 슈거가 “젠더 프리 패션은 단지 트렌드가 아니다”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애비 슈가Abby Sugar
플레이 아웃 어패럴 대표

플레이 아웃 어패럴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풍부한 젠더 표현을 지지해주는 의류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했다. 대표인 나와 디자인을 총괄하는 그레이 이 라이퍼Grey “E” Leifer는 2018년 복싱 선수의 브리프 스타일을 내세운 언더웨어 브랜드를 처음 선보였는데 론칭하자마자 긍정적인 피드백과 지지가 쏟아졌고, 속옷뿐 아니라 의류를 디자인해달라는 요청도 쇄도했다. 2020년 H&M 멕시코 지역 CEO였던 존 래크너John Lackner가 플레이 아웃 어패럴의 사업 경영 총괄로 합류하면서 팀이 더 커졌다. ‘내가 어렸을 때도 이런 브랜드가 있었다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끔 브랜드를 운영하려고 한다.

 

왜 상품 판매를 넘어 LGBTQ+ 커뮤니티 조성에도 힘쓰나?

어떤 브랜드에서 옷을 구매하는 일은 곧 각자의 정체성과 가치를 반영하고 드러내는 일이다. 플레이 아웃 어패럴에 오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이것이 긍정적이고 편안한 일이 되길 바란다. 우리는 모두를 위한 브랜드로 거듭나길 원하는데 그러려면 여기에 오는 사람들이 옷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디자인을 내부에서 진행하고 있다. 플레이 아웃 어패럴이 말하는 인클루시브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종종 ‘젠더 뉴트럴’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젠더 뉴트럴’이 가리키는 것을 잘 보면 기존의 젠더 구조에서 더 권력이 있는 쪽을 기본형으로 선택한 것일 때가 많다. 우리가 인클루시브한 디자인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체형, 사이즈, 인종, 나이, 장애 유무에 상관하지 않고 동등하게 쇼핑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가령 브리프를 디자인할 때 파우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만 나누고, 성별에 따른 속옷을 만들지 않는다. 옷에 따라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옷으로 내가 원하는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젠더 프리는 다른 억압된 아름다움과 연결돼 있다
젠더 프리 패션은 퀴어만의 이야기일까? 해리스 리드가 얼굴 홍조 콤플렉스를 극복한 〈바자 UK〉와의 인터뷰에 실마리가 있다. 한 예술가가 리드의 고민을 듣고 ‘(홍조에 대한) 불안감을 수용하라’고 조언한 이후, 그는 블러셔를 칠하기 시작하면서 “마치 (홍조 증상을) 갖고 노는 듯한 감각”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그 조언을 나눠준다. “여러분도 각자의 불안함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갖고 놀기 시작한다면 그 특징이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세상이 정해둔 기준에서 자유로워질수록 각자가 부딪혔던 다른 기준도 흔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정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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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글 도우리 객원 기자 담당 박슬기 기자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2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