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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책은 어떻게 예술이 되었나 슈타이들



완벽주의로 소문난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 일에 관해서만큼은 지독하리만치 철저하지만 그런 라거펠트조차도 20년 동안 한결같이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한 출판인이 있다. 바로 독일의 예술 전문 출판사 슈타이들을 운영하는 게르하르트 슈타이들(Gerhard Steidl)이다. 라거펠트를 비롯해 수많은 완벽주의 아티스트들이 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1999년 노벨 문학상을수상한 귄터 그라스(Gunter Grass)는 다른 출판사가 판권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슈타이들에게 자신의 전집물 출판을 의뢰했을 정도. 거장 예술가들이 그의 장신 정신을 얼마나 높이 사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슈타이들은 독일 남동부의 작은 도시 괴팅겐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출판사 ‘슈타이들’을 운영 중이다. 슈타이들은 분업 제작 방식이 일반화된 최근 출판계의 관행을 따르지 않고 제본을 제외한 모든 제작 과정을 한지붕 아래에서 진행한다. 디자이너 12명을 포함한 총 50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중소 출판사지만 이들이 1년간 만들어내는 책은 무려 400여 권에 달한다. 슈타이들은 독일이라는 지역적 특색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독일은 인쇄술의 본고장입니다.

어떤 종이라도 하루면 준비가 될 만큼 책을 만드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죠. 물론 이 엄청난 양의 책을 만들 수 있는 데에는 슈타이들만의 효율적인 시스템도 한몫합니다.” 엄청난 양을 소화하지만 제작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크레이지 디테일(crazy detail)’이라 부를 만큼 놀라운 섬세함이 자랑거리다. 슈타이들은 책의 내용과 이미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서체를 고르기 위해 수많은 서체를 놓고 비교 분석한다. 여기에 종이의 질감, 심지어 잉크의 농도까지 심혈을 기울인다. 인쇄 품질을 최고로 유지하기 위해 5년에 한 번씩 인쇄 장비를 교체하는 모습에서는 장인 특유의 고집스러움마저 느껴진다. 슈타이들은 그동안 다양한 종류의 책을 만들어왔다.


<페이퍼 패션Paper Passion>, 2012
아티스트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
영국의 디자인 잡지 <월 페이퍼Wall Paper>와 세계적인 조향사 게자 쇤(Geza Schoen)은 책의 향을 제품화한 향수를 만들었다. 향수가 들어 있는 북 디자인은 칼 라거펠트가, 제작은 슈타이들이 맡았다.


현존하는 팝아트의 거장 짐 다인(Jim Dine), 현대 다큐멘터리 사진의 선구자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등 거장 아티스트들의 작품집, 샤넬, 펜디, 엘리자베스 아덴 등 명품 브랜드와 구겐하임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의 인쇄물 모두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대림미술관은 이런 슈타이들의 책들을 직접 만나볼 수 있는 을 4월 11일부터 10월 6일까지 연다. 이번 전시에서는 귄터 그라스, 짐 다인, 칼 라거펠트 등 8명의 아티스트의 책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권당 1000만원을 호가하는 미국 팝 아티스트 에드 루샤(Ed Ruscha)의 리미티드 에디션 <온 더 로드On the Road>는 이번 전시의 백미로 꼽을 만하다.

이 전시에는 아티스트들이 슈타이들과 함께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커뮤니케이션과 에피소드, 기술적인 작업도 함께 소개된다. 모두가 책의 종말을 논하는 시대다. 디지털 기기의 범람은 이런 우려가 기우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하지만 슈타이들의 생각은 다르다. “미래의 책은 공산품이 아닌 예술품으로 인식될 것입니다.” 장인의 손길로 섬세하게 만들어진 책을 보면 그의 말이 결코 과장이나 허풍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1 <더 리틀 블랙 재킷The Little Black Jacket>, 2012
아티스트 칼 라거펠트
샤넬을 30년째 이끌고 있는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사진을 찍어 화제가 된 책. <보그Vogue> 파리의 전 편집장인 카린 로이펠트가 스타일링을 맡았다.
2 <디 아메리칸스The Americans>, 2008
아티스트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현대 사진가들의 교과서로 불리는 로버트 프랭크의 1958년 사진집. 슈타이들은 2008년 출간 50주년을 기념해 이 책을 재발간했다.
3 <피노키오Pinocchio>, 2008
아티스트 짐 다인(Jim Dine)
미국의 팝 아티스트이자 조각가인 짐 다인의 그래픽 에디션 북. 타이포그래피와 일러스트레이션, 인쇄 모두 훌륭하다.
4 <애프터 더 플루드After the Flood>, 2008
아티스트
로버트 폴리도리(Robert Polidori)
2005년 초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 지역을 강타했을 당시 뉴올리언스의 파괴된 건축물들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사진집이다. 허리케인이 우리의 삶과 건축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실감할 수 있다.
5 <로스앨러모스 리비지티드Los Alamos Revisited>, 2012
아티스트
윌리엄 이글스턴(William Eggleston)
미국의 1970~80년대 중서부 풍경을 찍은 사진을 모아 만든 책. 윌리엄 이글스턴은 대부분 차 안에 앉아서 촬영했다.
6 < HOW Book a Make to Steidl >전의 일러스트레이션
칼 라거펠트가 이 전시를 위해 그린 일러스트레이션.
7 < NY 62 DB JS >, 2007
아티스트
데이비드 베일리(David Bailey)
영국의 대표적인 사진가 데이비드 베일리가 1962년에 찍은 사진을 모은 사진집. 이 책에는 그의 뮤즈이자 60년대를 풍미한 모델이었던 진 쉬림튼(Jean Shrimpton)의 모습도 담겨 있는데 50여 년 전 사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되었다.
8 <아메리칸 파워American Power>, 2009
아티스트
미치 엡스타인(Mitch Epstein)
미치 엡스타인이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 전역을 돌며 찍은 각종 발전소의 사진이 담겨 있다. 미국 사회와 풍경을 교차로 보여주며 미국의 근원적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Interview 게르하르트 슈타이들 슈타이들 출판사 대표
“인쇄는 하나의 해석 과정이다.”

어떻게 처음 출판계에 입문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나의 부모님은 수공업자였고 어릴 적 가정환경은 예술과 거리가 멀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두 분은 내 장래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스스로 미래를 개척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출판보단 사진에 더 관심이 많았다. 빛과 그림자를 다루는 데 재능이 있단 사실을 깨달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재능으로는 예술가가 될 수 없단 사실을 절감했다. 대신 내가 선택한 것이 인쇄술이었다. 인쇄술을 독학으로 공부하던 중 한 무명 예술가의 도록을 인쇄하게 됐는데 이를 통해 내게 아티스트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능력이 있단 사실을 알게 됐다.

슈타이들 출판사에 대해 간단한 설명 부탁한다. 다른 출판사와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
출판사는 괴팅겐에 자리 잡고 있다. 요즘은 출판 제작 과정을 분업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국에서 디자인을 하면 홍콩으로 건너가 포토샵 리터칭을 하고 중국에서 대량생산을 한 뒤 아마존에서 유통하는 식이다. 하지만 슈타이들 출판사는 제본을 제외한 모든 제작 과정을 한지붕 아래에서 소화한다. 우리는 모든 책에 산화 방지 처리를 하고 제작 과정에 어떤 화학물도 첨가하지 않기 때문에 슈타이들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은 500년이 지나도 보존이 가능하다.

다양한 디자이너, 예술가들과 협업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티스트와 슈타이들은 갑을 관계가 아닌 동등한 입장에서 일을 한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기술자요, 아티스트의 가치와 정신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다. 마치 리허설을 마치고 커튼이 열리면 배우는 전면에 나서고 감독은 몸을 감추듯 나는 아티스트의 뒤로 물러선다.
출판 인쇄에 대한 당신만의 철학이 무엇인지 듣고 싶다.
인쇄는 하나의 해석 과정이다. 빛을 얼마나 밝게 만들지, 어두움을 얼마나 짙게 만들지 모두 인쇄 과정에서 판가름하기 때문이다. 보통 출판사들은 실수를 줄이기 위해 표준화된 체제를 갖추길 선호하지만 나는 실험성을 극단으로까지 밀어붙이고, 실수를 하더라도 이를 통해 새로운 발견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2012년 칼 라거펠트와 공동 설립한 L.S.D 출판사에 대해서도 소개해달라.
L.S.D 출판사는 미국과 영국 등에서 발견한 좋은 책을 독일어로 번역해 출판한다. 주로 라거펠트가 책을 선정하고 기획하면 내가 인쇄를 하는 방식이다. L.S.D의 책은 최소 3000명 정도의 독자를 확보하는데 이들은 주로 칼 라거펠트가 무슨 책을 읽는지 관심을 갖고 있는 그의 추종자들이다. 나는 앞으로 출판도 전시처럼 큐레이팅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이때 누가 선택한 콘텐츠인지도 무척 중요할 것이라고 본다.

슈타이들은 전자책도 발행하나?
3년 전 우리는 한 가지 결정을 했다. 우리가 출판하는 문학 서적을 전자책으로 발간하자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아직 책이 나오진 않았지만 분명히 평범한 전자책과는 수준이 다를 것이다. 반면 이미지를 다룬 책은 디지털화할 생각이 없다. 슈타이들 출판사의 책들은 갤러리에 걸린 진품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높은 인쇄 수준을 자랑하는데 이것을 모니터 화면으로 보면 실제 책에서 느껴지는 감동의 80%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디지털의 발달과 더불어 출판 시장이 위축되고 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출판사들에 조언을 해준다면?
우선 좋은 콘텐츠를 선정할 필요가 있다. 깊이 없는 가벼운 책은 전자책으로 봐도 무방하기 때문에 이런 책을 생산한다면 미래가 없을 것이다. 출판사는 책을 만들 때 최고를 지향해야 한다. 나는 명품 브랜드와도 많은 협업을 하는데 명품 시장의 전략이 출판업계에서도 유효할 것이라고 본다. 명품 가방처럼 미래의 책은 공산품이 아닌 예술 작품으로 인식될 것이기 때문에 최고의 종이와 최고의 제본 방식, 그리고 최고의 디자인이 한데 어우러져야 한다.


Profile
1950년생. 독일 예술 전문 출판사 슈타이들의 설립자. 1968년 쾰른에서 열린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전시를 본 후 감명을 받아 독학으로 인쇄 기술을 습득하기 시작했다. 1972년부터 1986년까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그래픽 작업을 인쇄했고 1980년대부터는 소설가 권터 그라스(Gunter Grass) 등의 문학 서적을 출판하고 있다. 199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사진과 예술 영역 관련 서적을 출판했는데 짐 다인 (Jim Dine),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같은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집과 세계 유수의 갤러리 및 미술관에서 사용하는 인쇄물 등을 제작했다. 2012년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와 함께 L.S.D(Leger feld.Steidl.Druckerei)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세우기도 했다. www.steidlvil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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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13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