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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에토레 소트사스 탄생 100주년 #3 너그러운 친구였던 따뜻한 멘토
소트사스는 거장 디자이너로서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많은 귀감이 되었다. 소트사스 아소치아티를 거쳐간 동료들과 그곳에서 일했던 필자의 기억, 그리고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여러 지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가 살아생전 남긴 코멘트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디자인 그룹 멤피스의 주요 멤버들. 당시 전시에 참여한 마사노리 우메다가 디자인한 침대 타와라야 복싱 링 (Tawaraya Boxing Ring) 위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이다. 맨 오른쪽이 소트사스, 그 앞에는 반려자로 멤피스 관련 책을 저술한 바르바라 라디체가 앉아 있다. 그녀로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안드레아 브란치, 알도 치비크, 마르코 자니니, 마테오 툰, 미켈레 데 루키, 나탈리 드 파스키에, 조지 소든, 마르티네 베딘.


2001년 멤피스 멤버들. 1981년 전시 당시 무명이던 소트사스의 제자들은 중견 스타 디자이너로 성장했고, 일부는 거장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10대 시절 사진을 배운 소트사스는 이후 줄곧 여행과 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시선으로 사진을 찍었다. ‘앙티브의 소녀’ (1963).


소트사스에게 배운 수채화를 바탕으로 마르코 팔미에리가 첫 전시 <건축의 비들>에서 선보인 작품.

"일상에서 네가 행복해야 좋은 디자인이 나오는 거야. 디자인은 삶이야."
입사 후 얼마 동안 오직 모니터 앞에만 매달려 일하던 필자에게 소트사스가 건넨 말이다. 모범생처럼 자리를 지키며 열심히 일하는 게 최선인 줄 알았던 나는 그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내 그가 일깨워준 일상의 행복이 디자인을 더욱 즐겁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물 좀 떠 와!"
평소 동료들에게 잔심부름을 시킨 적 없는 소트사스였기에 당시 소트사스 아소치아티에서 근무하던 건축가 마르코 팔미에리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어리둥절함도 잠시. 소트사스는 팔미에리가 떠 온 물을 팔레트에 채운 뒤 집에서 가져온 물감을 테이블에 펼쳐놓고 수채화 드로잉 기법을 가르쳐줬다. 평소 팔미에리를 눈여겨보던 소트사스가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독려한 것이다. 이후 팔미에리의 작품이 어느 정도 모였을 때 소트사스는 20점을 추리더니 친구인 갤러리스트 안토리아 얀노네 (Antonia Jannone)에게 연락해 개인전을 열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렇게 팔미에리는 2008년 자신의 첫 개인전을 열었고, 지난 10월 같은 곳에서 네 번째 개인전을 치렀다. 본인조차 알지 못했던 소질을 관찰하고 발견해준 소트사스에게 팔미에리는 큰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다.


"기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변해. 점점 더 가속도가 붙고 말이지. 그걸 예측해서 계속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해."
소트사스가 불과 몇십 년 사이에 발전하고 소형화된 전자계산기를 두고 한 말이다. 그렇다고 그가 최신 트렌드를 좇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트렌드는 ‘to do list’가 아닌 ‘not to do list’였다. 대신 소트사스는 물건을 바라볼 때 역사를 좀 더 거시적 관점에서 조망할 것을 강조했다. 실제로 산업 디자인의 출발선상에서부터 함께해온 그였기에 물건을 바로 보는 관점의 스펙트럼 또한 무척 넓었다. 예를 들어 가구 브랜드 세지스(Segis)의 플라스틱 의자를 디자인할 때는 기원전 한 문명의 ‘왕좌’에 대한 리서치를 함께 진행했다. 그에게는 최첨단의 미래를 과거의 원형에서 찾는다는 생각이 있었다.


"디자인계에서 일할 때 절대 무급으로 일하지 마. 또 네가 일을 줄 때도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절대 무료로 일을 시키지 마. 디자인계에 성행하는 인턴 제도는 디자인을 무료이자 가치 없는 일로 여기게 만드는 일이야. 결과적으로 우리의 문화를 모두 망치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늘 미소를 잃지 않는 소트사스였지만 디자인계의 인턴 제도를 언급할 때만큼은 표정이 굳어졌다. 실제로 소트사스 아소치아티에는 다른 스튜디오와 달리 노 인턴(no-intern) 제도가 있었다. 당시 디자인 거장이나 스타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스튜디오에는 무급 인턴이 성행했다. 전 세계 유명 디자인 학교를 뛰어난 성적으로 마친 인재들이 ‘무급이어도 좋으니 일하게 해달라’고 숱한 러브콜을 보낼 때였으니 회사 입장에서는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소트사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언제나 소수의 정직원만 고용해 다른 스튜디오보다 높은 급여를 지급했다.


"글쎄, 그렇게 성공할 줄은 몰랐어. 그냥 해보면 재밌을 것 같았거든.(웃음)"
은퇴 시기인 60대 중반에 실업자인 20대 제자들을 모아 멤피스 디자인 운동을 벌여 큰 성공을 거두고 새로운 사조를 만든 소트사스. 어떻게 이런 엄청난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됐는지 궁금했던 필자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디자인을 잘했으니까 카피 제품도 생기는 거야. 너희들이 잘했다는 증거니까 기운 내. 그리고 우리는 더 괜찮은 디자인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면 돼."
수년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 선보인 디자인을 누군가가 모조해 양산하는 것만큼 디자이너에게 허무한 순간이 또 있을까? 소트사스 아소치아티에 근무하는 동안 이런 일이 빈번히 발생했다. 필자는 출장차 한국을 방문했다가 수년간 공들여 출시한 문손잡이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중국에서 대량 양산되고, 청계천 일대에도 깔리고, 심지어 타워팰리스에 설치된 것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밀라노로 돌아와 멘토인 소트사스에게 이 일을 알렸더니 그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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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글: 여미영(D3 대표), 담당: 최명환 기자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17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