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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Design For Thought 어떤 스포츠 다큐멘터리의 타이포그래피
시작은 씨름이었다. 2011년 KBS 스포츠국 이태웅 PD는 디자이너 김기조에게 기획 중인 씨름 다큐멘터리에 적용할 레터링을 의뢰했다. 그것은 국내 방송계에서 보기 드문 스포츠 다큐멘터리의 시작이었다.




<천하장사 만만세> 타이틀과 자막 2011년 추석 특집으로 기획한 다큐멘터리. 샅바를 반영한 듯 청홍 대비의 타이틀 레터링을 구현했다. 1980년대 분위기가 느껴지는 화면 자막은 당시의 시각 풍경을 재현하는 것에 가까웠다.




<공간과 압박> 타이틀과 자막 정방형 레터링을 기본으로 하되 획의 꺾임 부분을 동그랗게 처리했다. 원 안에 사다리꼴로 왜곡된 타이틀은 ‘공간과 압박’이라는 제목에 대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내레이션 대신 장문의 자막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점이 눈길을 끈다.




<숫자의 게임> 타이틀 OCR 폰트와 점수 전광판 타이포그래피를 참고해서 만들었다. 호흡이 느린 화면 전개와 대비되는 다소 강박적인 인상의 타이포그래피가 세련된 영상미에 일조했다.




<88/18> 타이틀과 자막 <88/18>을 위해 디자인한 레터링은 총 26종. 자막 문구가 김기조 디자이너에게 넘어간 것은 올해 8월 말. 매우 촉박한 일정으로 보일 수 있으나 지난해 봄 이미 프로그램 제작 소식을 전달받았고, 이후 40시간에 육박하는 1980년대 자료 화면을 미리 볼 수 있었다.
“(클라이언트가) KBS였던 게 컸어요. 골방에 작업실 하나 차려놓고 홀로 끄적거리던 시기이다 보니 부모님이 이해하실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았죠.” 김기조의 말이다. 공영 방송사라는 권위와 ‘보편적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방송 글자 작업은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직군과 노동을 가시화시키고 동시에 설득할 수 있는 무언의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이태웅 PD의 기획은 매력적이었다. 여기에 평소 좋아하던 DJ 소울스케이프가 음악으로 참여한다는 점 또한 김기조에게 확신으로 다가왔다. 이태웅 PD는 대중 스포츠로서의 씨름이 1980년대에 시작한 것에 착안해 줄곧 그 시절과 연관된 결과물을 선보여온 두 사람을 섭외했다. 그렇게 탄생한 첫 결과물이 <천하장사 만만세>(2011)였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김기조는 굵은 정방형 레터링을 사다리꼴로 왜곡하고 입체적인 그림자 효과를 줘 1970~1980년대를 연상케 하는 프로그램 타이틀을 디자인했다. 당시 자료 화면의 일부처럼 묻어가는 레터링을 제작하고 싶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후 이들의 협업은 축구 다큐멘터리 <공간과 압박>(2012)과 양궁 다큐멘터리 <숫자의 게임>(2016)으로 이어졌는데, 시간이 흐르며 ‘협업의 기술’ 또한 진화했다. “<공간과 압박> 때만 해도 레터링 자료를 전달하면 PD가 알아서 화면에 배치하는 프로세스였는데 정렬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더군요. 그래서 <숫자의 게임>에서는 아예 화면 전체를 받아 그 위에 직접 글자를 배치했어요.” 기획 단계부터 달랐던 협업 때문일까, 이들의 스포츠 다큐멘터리는 최근 몇 년간 현란한 ‘자막 그래픽’으로 점철된 여타 프로그램과는 확연히 달랐다. <천하장사 만만세>를 제외하면 이태웅 PD의 스포츠 다큐멘터리에는 공통적으로 내레이션이 등장하지 않는다. <공간과 압박>의 경우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장면이 수시로 교차하며 화면의 컬러가 의도적으로 변환되기도 한다. MTV나 실험적 영상을 접해온 소수의 시청자에게는 익숙한 화법일지 몰라도 대중을 대상으로 한 국영 방송에서는 분명 낯선 스토리텔링 방식이다. 이 공백을 채우는 것이 바로 김기조의 디자인이다.

 

일례로 <숫자의 게임>에서는 “235명의 도전자 중 남녀 각 3명만 살아남는다는 것”이라는 문구의 레터링이 화면 중앙에 등장한다. 이 자막 레터링은 ‘내레이터의 역할’을 현대적으로 수행한 방송 타이포그래피의 백미라 할 만하다. 그리고 지난 9월 16일, 이를 잇는 또 하나의 백미가 전파를 탔다. 서울올림픽 개최 30주년 기념 특집 다큐멘터리 <88/18>(2018)이 그 주인공. 이 다큐멘터리는 온·오프라인상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는데 이태웅 PD는 앞서 세 편의 작품에서 점진적으로 선보인 연출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모습이었다. 1980년대 정치, 문화, 사회를 포착한 화면들이 DJ 소울스케이프의 음악과 맞물려 빠른 속도로 치고 빠진다. 감각적 ‘몽타주 타법’이다. 사실 이 다큐멘터리는 4부작으로 야심 차게 계획했다가 방송사의 내부 사정으로 축소된 것인데 이런 상황이 역설적이게도 고밀도로 압축된 몽타주물을 탄생시켰다. 장면의 교차는 초 단위로 일어난다. 그 사이로 RGB 근삿값에서 추출한 형광빛 레터링 자막이 화면 중앙에 등장하는데 그 조형이 조금씩 다르다. 방송 화면에서 글자가 이토록 자신의 몸값을 과시하며 선언적이었던 적이 있었나? DJ 소울스케이프의 믹싱과 여러 종의 레터링, 파편적 영상의 조합은 1980년대 국풍國風에 대한 유쾌하고 싱그러운 재현이자 풍자로 읽힌다. 사실 두 사람의 협업에 주목하는 이유가 비단 이들이 망막에 선사한 흥 때문만은 아니다. 고노동, 저비용 그리고 익명의 노동으로 악명 높은 방송계에서 디자이너의 노동이 이토록 주목받았던 적이 있었나? 아니, 자막 레터링이 방송 프로그램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적극적 화자가 되었던 적이 있었나? 이 협업이 낳은 뚜렷한 성과는 양질의 디자인으로 ‘새로운 보기의 감각’을 자극한다는 것, 그래서 대중의 시각 리터러시에 대한 꾸준한 갱신을 요청한다는 데 있다. 오늘날의 시청자는 더 이상 균질하지 않다. 이에 따라 방송의 시각언어 또한 다원화될 필요가 있다. 참신하고 낯선 시도에는 새로운 언어가 움트기 마련이다. 네 번의 스포츠 다큐멘터리로 국내 방송 시각언어를 한 차원 갱신시킨 이들의 다섯 번째 협업을 기대한다.


전가경 그래픽 디자인과 텍스트 그리고 사진 이미지 간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관련 연구와 저술을 진행한다. 2012년부터 운영하는 사진책 출판사 사월의눈은 이러한 관심사에 대한 실천이다. 쓴 책으로 <세계의 아트디렉터 10>과 <세계의 북 디자이너 10>(공저)이 있다. 서울과 대구를 분주하게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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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글 전가경 / 편집 최명환 기자 / 디자인 김상현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18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