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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프록스


포니가 국산 자동차의 첫 번째 고유 모델이라면 의자는 어떨까?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사용하는 의자는 여러 디자인이 변형되거나 모방된 것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고유 모델의 개념을 적용하기 어렵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가구 기술자가 국내에 가구 공장을 설립해 유럽풍의 장식적인 의자를 생산했고, 초창기 가구 제조 회사들은 개발실을 운영할 수준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무 가구 시장은 달랐다. 1980년대에 시장이 형성돼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시스템 가구를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의자에도 독자적인 모델 이름과 코드 번호를 부여했다. 정치적·사회적 격변기였던 당시 대기업의 경제 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취업난도 없었을 정도로 기업마다 인력을 대거 채용했다. 이는 사무실에서 사용할 가구의 수요 역시 증가했다는 뜻이다. 가구업계에서 일찌감치 이를 파악한 사람들이 사무 가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한샘퍼시스(현퍼시스)가 본격적으로 사무 가구 제조 사업에 뛰어들었다. 국내 사무 환경을 개선한다는 목표로 1986년에 첫 사무 가구 시리즈 ‘유로(Euro)’를 출시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서구의 모듈 개념을 합리적으로 적용한 제품으로 사무실을 꾸리기 위해 필요한 책상, 의자, 칸막이, 수납장 등을 모두 포함했다. 국내 사무 가구에 시스템 개념을 도입한 첫 제품으로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사무 의자는 고유 모델을 내놓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후 퍼시스는 ‘탑 라인(Top-line)’ 시리즈를 개발하면서 국내 최초의 독자적인 사무 의자를 내놓았다. 바로 ‘프록스(Prox)’다. 최근 다양한 기능을 적용한 의자와 비교해보면 ‘프록스’는 다소 평이해 보인다. 하지만 이 의자의 등받이는 좌판과 분리돼 뒤로 젖혀지는 틸팅(tilting)이라는 새로운 기능이 있었다.

당시 사무용 의자에 부착된일반적인 틸트 메커니즘은 등판을 뒤로 젖힐 때 다리가 들리는 불편함이 있었는데, 이를 보완한 것이다. 천과 우레탄을 하나의 금형에서 한 번에 성형해 등받이와 좌석 쿠션을 만든 것도 처음 시도한 기술이다. 이 덕분에 스펀지에 본드를 붙여 천을 씌우던 일반적인 방식과 달리 복잡한 곡면을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사용자가 프록스의 등받이를 몇 번 넘기다 보면 셔츠가 밀려 올라가는 문제가 생겼다. 재활용 분리 수거가 중요해지면서 천과 우레탄이 떼어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단점으로 바뀌기도 했다. 요즘 나오는 의자는 대부분 등받이를 넘기면 좌판 역시 따라서 뒤로 밀려가는 싱크로나이즈드 틸팅(synchronized tilting) 방식과 그물 구조의 등받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해결된 상태다.

프록스는 당시 퍼시스가구연구소를 맡았던 양영원 상무와 김원태 선임 연구원이 디자인해 1992년 12월에 정식 출시했다. 2005년 5월 단종되기까지 약40만 개가 팔린 베스트셀러다. 퍼시스를 비롯해 국내 사무 가구 회사들은 불과 20여 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디자인의 의자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기업 문화가 바뀌면서 직원의 업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의자도 신중하게 선택하고, 실제 수요자들의 안목이 높아진 요인도 있다. 하지만 틸팅 메커니즘조차 개발할 여력이 없던 시절에 고유 모델을 디자인하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이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자동차나 휴대 전화에 비해 의자는 단품의 가격이나 총 매출액, 수출 기여도가 낮아 산업계에서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디자인 분야에서 역시 국산 사무 의자의 고유 모델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그렇지만 프록스는 한국인 체형에 맞는 국내 디자인 제품이 끊임없이 세상에 나오게 한 중요한 출발점을 마련해주었다. 허먼밀러의 에어론 의자 같은 유명 의자의 ‘짝퉁’ 제품에 앉아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이 말에 공감하기 어렵겠지만 말이다.

 
김상규

몇몇 기업과 기관에서 디자이너와 큐레이터로 활동했고 현재는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로 있다. 한국의 디자인을 주제로 전시와 단행본을 기획해왔고 포스트 공공 디자인 시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저서로 <어바웃디자인>, 번역서로 <사회를 위한 디자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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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김상규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11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