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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필라멘트가 브랜드가 되는 순간 일광전구
밤을 새워 일하는 산업 현장을 비추던 백열전구는 산업화 시대의 상징이었다. 저탄소 시대를 맞이한 오늘날 백열전구는 ‘전력 잡아먹는 괴물’이라는 오명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러나 백열전구만이 주는 온기를 아무리 생각해도 포기할 수 없었던 한 회사는 전구 제조를 넘어 빛이 주는 감성을 판매하는 회사로 나아가는 강수를 뒀다. 대한민국에 하나뿐이 남지 않은 백열전구 회사, 일광전구다.


2013년 시작한 일광전구의 패키지 리뉴얼. 클래식 시리즈, 파티 시리즈, 마스터 시리즈 등 전구별 용도에 따른 분류를 알파벳 이니셜로 나타냈고 라인별로 사진의 톤과 메인 컬러를 달리해 구분했다.








대구 달서구 성서공업단지에 있는 일광전구의 공장과 사무동. 낡은 공장 부지를 2013년 브랜드 디자인을 정비하며 다시 지었다. 곳곳에 새로 적용한 일광전구 아이덴티티와 슬로건이 눈에 띈다.

비자발적 독점 기업의 결단
을지로4가의 한 조명 가게에 들렀다. 천장 끝까지 빼곡히 들어찬 선반에 가득한 전구 중 일광전구의 패키지가 단번에 눈에 띄었다. 다른 전구들은 복잡한 설명과 함께 전구 이미지를 조악하게 합성하거나 이마저도 없이 대형 박스 안 비닐 봉지에 낱개로 전구를 담아놓은 데 반해, 일광전구는 눈에 띄는 컬러에 간결한 타이포그래피와 일러스트레이션, 감성적인 사진을 패키지 전면에 큼직하게 넣었다. 이렇게 패키지에 신경 쓸 정도이니 가격은 상대적으로 비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광전구 제품은 다른 전구보다 조금 더 비싸지요?” 하는 물음에 전구 가게 주인이 빙그레 웃는다. “비싸고 자시고 비교할 데가 있어야지요. 일광전구에서만 만드는걸요.” 일광전구는 국내에 마지막으로 남은 단 하나의 백열전구 제조 기업이자 브랜드다. 보통 한 업계가 시대적인 흐름으로 쇠락하며 대대적인 세대교체가 이루어질 때 여전히 그 바닥에 남은 마지막 생존자는 마음이 조급해진다. 주류적 흐름에 도태될까 불안하고, 당장 생산을 위한 재료를 공급받지 못할까 앞이 깜깜하다. 하지만 지난 56년간 백열전구 생산 라인을 멈추지 않은 일광전구의 경우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이들은 남겨질 것인지, 남아 있어야만 하는지를 스스로 선택했고 연쇄적인 불안 요소를 하나씩 직접 해결해나가기로 했다. 체질을 바꾸는 핵심적인 드라이브는 ‘디자인’으로 정했다. 패키지와 CI뿐 아니라 본사와 공장, 고객과 만나는 접점을 모두 일관된 태도로 유지해온 지 6년, 아날로그를 신선한 유행 코드로 인식하는 젊은 세대가 일광전구를 알아채기 시작했다.









대구의 일광전구 생산 공장은 총 6개 생산 라인을 갖추고 있다. 독특한 모양으로 필라멘트를 디자인한 전구부터 최종 밝기 품질 검사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사람 손과 눈을 거치는 과정이 여전히 필수적이다.

백열전구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로부터 도둑질해 인간에게 전해줬다는 불은 약 100만 년 전 호모에렉투스가 처음 사용했다. 불은 음식을 익히고 어둠을 밝혀줄 뿐 아니라 몸을 녹여주었다. 따뜻한 불 주변으로 사람들이 둘러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모닥불과 촛불은 전 인류적 DNA가 기억하는 온기인 셈이다. 백열전구는 나무나 파라핀을 태우듯 필라멘트를 태워 빛과 열을 내는 기구다. 다만 전력 사용량 중 5%만 빛을 내는 데 사용하고 95%는 열에너지로 발산해 대표적인 저효율 조명 기기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탄소 배출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이 급증하던 2008년, 정부는 에너지 소비에 비해 빛 전환율이 낮은 가정용 백열전구 생산과 수입을 2014년부터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한 개에 1000원꼴로 포장마차나 재래시장, 달걀을 부화시키는 양계장 등에서 부담 없이 쓰던 서민들의 불빛은 빛 전환율 40%의 LED로 일괄 교체되었고, 15개에 달하던 주요 백열전구 회사들은 서둘러 LED 조명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구 달서구의 일광전구만 살아남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포기하지 않았다. 김홍도 대표의 표현을 빌리자면,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백열전구 퇴출 시기로 정해진 2014년에 앞서 2013년 일광전구는 창립 50주년을 맞았고 ‘We Make Light’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공간과 시대를 밝히는 빛을 만드는 기업’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그가 말하는 ‘백열전구가 되는 이유’는 1차원적 에너지 효율이나 이익 창출하고는 거리가 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참 아름답지 않느냐’가 즉각적인 이유이고, 조명 문화랄 것 없는 형광등 일색의 한국의 밤을 수놓을 낭만에 대한 사명감과 비전이 두 번째다.








일광전구의 주요 제품은 전구와 등기구다. 전구를 끼워 사용하면 근사한 펜던트등, 스탠드등 자체 조명 기구는 물론 제품과 어울리는 디머 스위치까지 자체 개발했다.


전구 너머 조명 문화를 그리는 브랜드
동대구역에서 15km가량 서쪽에 위치한 일광전구 본사는 대구 성서공단 3차 단지에 4000㎡ 부지를 사용한다. 1984년 조성하기 시작한 성서산업단지는 2017년 12월 기준 총생산액이 16조 4374억 원에 달하는 지역 최대 산업 단지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장이 착공한 지 20년이 넘어 노후했고, 산업의 변화와 장기적 불황에 생산 물량이 줄고 인건비 부담이 높아진 상황에서 문을 닫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대구의 주력 산업이었던 섬유가 정리되면서 전자와 자동차 부품의 협력 납품업체들만 남았습니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발주를 끊어 다 같이 문을 닫는다고 생각하면 심각한 거죠. 자체적인 브랜드가 없어서 그래요. 젊은이들이 알 만한 회사가 없다는 말입니다. 대구성서공단에 3000개가 넘는 회사가 있는데 자기 브랜드가 있는 회사는 10개가 채 안 됩니다. 일광전구는 그중 대표적인 회사이자 대구의 유일한 조명 회사라는 데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일광전구 김홍도 대표의 말이다. 그의 아버지인 초대 일광전구공업사 고 김만규 회장은 대구 서문시장에서 전업사를 운영하다 1962년 처음 공장을 세웠다. 김홍도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자전거에 전구를 싣고 배달 심부름을 가곤 했다. 확장 이전하면서 회사를 세 번 옮겼지만 이 자전거는 아직도 제조 공장 출입구 천장에 매달려 있다. IMF 외환 위기로 휘청이던 일광전구를 물려받았을 때, 그는 북미와 유럽 여행 중 밤거리를 수놓은 불빛, 그리고 원가 개념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값비싼 조명 브랜드들을 떠올렸다. 이를 밝히는 광원인 백열전구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가정용 백열전구가 퇴출되는 위기에서도 오히려 새롭게 공장과 사무동을 정비하고 서울에 상주하는 전담 디자인팀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펼치기 시작했다. 하루 6만 개 전구를 생산하던 5년 전에 비해 하루에 1만 2000개~ 1만 5000개로 생산량 자체는 줄었지만 사내 분위기는 고무적이다. 수익은 점진적으로 상향세를 타고 있고 지난해 말에는 ‘IK IDEA’라는 조명 디자인 플랫폼 자회사도 설립했다. 백열전구 모양을 한 차별화된 LED 제품뿐 아니라 기존의 형광등을 대체할 수 있는 차세대 신광원 E.E.F.L(외부 전극 형광등) 등 기술 개발도 꾸준히 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백열전구업체들이 문을 닫으면서 부품 수급이 어려워짐에 따라 주요 부품은 직접 생산하는 방향으로 잡았다. 또한 5년 안에 지금의 공장 내부에 유리구를 생산하는 시설을 갖출 예정이다. 공장 부지 자체를 복합 문화 공간으로 꾸며 소비자가 직접 생산 과정을 보며 새로운 경험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다.


01 2016년 처음 출시한 파티라이트 홍보 영상의 경우 숲, 바다, 지역 전통의 가옥 등을 개조한 공간에도 조화롭게 어울리는 조명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제주도에서 진행했다. 캠핑이나 야외 결혼식, 콘서트에도 어울리는 빛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일광전구가 공간 디자인을 총괄 디렉팅한 제주도 구좌읍의 렌털 하우스 ‘토리코티지’. 빛이 스테이 공간을 어떻게 밝혀줄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의 일환으로 2년여 동안 진행한 프로젝트로 일광전구만의 빛을 보여주기에 최적화된 공간이다. 


일광전구는 전구 안팎을 모두 디자인한다. LED로 백열전구의 감성을 내기 위해 다양한 모영의 LED 필라멘트를 만들거나 장인이 직접 입으로 부는 방식으로 만드는 전구 등은 전구 그 자체로 조명 기구이자 오브제가 된다. 


2016년 리빙디자인페어에서 일광전구는 빛을 오브제로 삼은 아트피스로 이목을 끌었다.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 입장에서 바라보는 연습
일광전구는 크게 백열전구와 등기구를 판매한다. 가정용·공업용·선박용 백열전구와 할로겐, LED 램프 등 약 300종류의 제품을 생산하고 펜던트 조명, 스탠드 조명 등 12개의 등기구를 생산한다. 필라멘트 그 자체가 독특한 디자인인 전구, 필라멘트를 LED로 만든 전구, 유리구를 직접 입으로 불어 만든 프리미엄 전구, 보통 유리구의 2.5배에 달하는 유난히 큰 전구 등 전구 자체를 장식용 소품으로 만들겠다는 각오가 면면에 담겨 있다. 일광전구의 브랜드를 총괄하는 권순만 디자인팀장은 명함이 2개다. 하나는 일광전구 디자인팀장, 다른 하나는 디자인 전문 회사 064(제로식스포) 대표 직함이 적혔다. 064는 2013년 일광전구의 클래식 전구 패키지 디자인을 맡은 인연으로 전체 브랜드를 다루는 내부 팀으로 일하게 됐다. “맨 처음 일광전구 에디슨 전구의 패키지 의뢰가 들어왔는데, 저는 열흘에서 하루만 그 일을 하고 나머지 9일은 일광전구의 대대적인 브랜딩에 관한 제안서를 만들었어요. 일광전구처럼 고유한 역사와 스토리를 가진 기업은 토털 브랜드로 가야 한다고 끊임없이 설득했습니다.” 권순만 팀장은 패키지 디자인에 앞서 전구 라인부터 재정비했다. ‘삼파장’, ‘크립톤’ 등 생산자 위주의 기술적 용어로 점철된 제품 분류 대신 가장 기본적인 원조 백열등을 이르는 클래식 전구는 C, 데커레이션용 전구는 D, 파티 조명은 P 등으로 소비자 위주의 용도에 맞는 체계를 만들고 각 라인의 메인 컬러를 정했다. 장기적으로 내다보고 있는 해외 판매에 자연스레 대비하는 격이기도 했다. 일광전구의 클래식 전구 패키지는 전구 회사로는 세계 최초로 일본 굿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제품의 마케팅 방식도 대형 유통 채널을 선점하는 방식보다 서로 어울리는 브랜드와의 자연스러운 컬래버레이션으로 흘렀다. 2013년 일광전구는 당시 홍대 앞에서 ‘현명한 소비’를 내세우며 주목받던 공간 오브젝트에 처음으로 입점 문의를 했다. 브랜드 스토리에 크게 관심을 보인 오브젝트의 대표는 팝업 전시를 제안했고 매장은 한 달간 일광전구의 빛으로 가득 찼으며 디자이너들의 입소문을 타는 계기가 됐다. 이어 아날로그의 가치를 중시하는 브랜드, 따뜻한 불빛이 필요한 야외 행사와 오래되고 날것의 느낌이 남아 있는 재생 건축 등 결이 닮은 공간에 낯익은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그랜드민트페스티벌, 어라운드 캠핑, 합정 카페 앤트러사이트, 부산 백제병원 등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힙 플레이스는 물론 스튜디오 064가 공간 디자인을 맡은 제주도의 토리코티지 같은 렌털 하우스에도 일광전구의 불빛이 빠지지 않았다. 매년 3월에 열리는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도 2016년부터 꾸준히 참여해 전략적으로 브랜드를 노출시키고 있다. 여기에 오는 8월 인천 개항로에 여는 첫 쇼룸 준비도 한창이다. 예전에 산부인과로 사용하던 이 건물은 20년 전 영업이 중단된 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일광전구의 설립과 비슷한 시기의 역사와 스토리를 가진 건물을 천천히 물색하다 드디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일광전구의 조명뿐 아니라 글로벌 브랜드와 한국 디자이너들의 조명을 볼 수 있는 공간이자 갤러리로 꾸밀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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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글: 김은아 기자 사진: 박순애(스튜디오 수달), 이창화 사진기자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18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