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Design News
에토레 소트사스 탄생 100주년 #2 거장 디자이너로서의 삶

총 대신 붓을 든 젊은 디자이너
1917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태어난 소트사스. 본명은 에토레 소트사스 주니어로 건축가였던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자신을 이어 아들이 건축가가 되기를 애타게 소원하던 아버지는 갓 태어난 그의 손에 연필을 쥐여줬다. 이런 영향으로 소트사스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길을 따를 것을 결심한다. 1939년 토리노 폴리테크니코 공대에서 건축을 공부한 그는 졸업 후 건축가의 길로 들어섰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이내 유고슬라비아 몬테네그로로 징집된다. 예술과 건축을 사랑한 그에게 폭력적인 전쟁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어머니가 보내준 물감으로 보급품 종이에 틈틈이 그림을 그리고, 처음 접한 이슬람 문화에 감탄하며 건축과 시민들의 일상을 따뜻한 감성으로 사진에 담아내는 등 여느 군인과는 다른 병영 생활을 이어갔다. 휴머니즘에 대한 열망은 훗날 그의 디자인 철학에도 자연스럽게 반영됐다.

인간적인 디자인으로 스타덤에 오르다
종전 후 이탈리아로 돌아온 소트사스는 밀라노에 스튜디오를 열고 본격적으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 전까지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산업 영역에서 그는 금세 두각을 나타낸다. 오직 기능과 효율성만 강조하던 밋밋하고 지루한 제품에 인간적 감성과 온기를 불어넣으며 이목을 집중시킨 것이다. 그가 디자인한 올리베티(Olivetti) 타자기가 대표적. 1950년대에 이 회사의 디자인 컨설턴트를 맡은 소트사스는 효율적이면서도 편안함을 주는 세련된 디자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57년 전자계산기 리 9003(Lea 9003)으로 디자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가운데 하나인 황금콤파스상을 수상했고, 기존 타자기에서 볼 수 없었던 색상과 유머를 담은 휴대용 타자기 발렌타인(Valentine)으로 1970년 다시 한번 이 상을 거머쥐었다(이 모델은 소트사스의 대표작이자 1960년대 디자인 아이콘으로 손꼽힌다). 산업 디자인, 건축, 인테리어, 패션 디자인 분야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한 그는 교육과 저술 활동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피렌체에서 강의하던 시절 안드레아 브란치(Andrea Branzi), 마시모 모로치(Massimo Morozzi) 등 젊은 건축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어 이탈리아 아방가르드 디자인과 건축 운동이 태동하는 데 기여했다. 훗날 이들은 아르키촘(Archizoom) 그룹을 결성하며 탈권위적이고 급진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소트사스 아소치아티 사무실에서 근무 중인 소트사스의 모습. 그는 아침 9시면 어김없이 가장 먼저 출근해 라바차 커피와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루카 프레고소(Luca Fregoso)


울프 하우스(Wolf House), 1986년.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의 서막을 열다
당시 세계 디자인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것은 모더니즘과 기능주의로 대변되는 독일이었다. ‘간결한 것이 더 아름답다(Less is more)’로 요약되는 독일식 기능주의는 분명 종전 후 황폐해진 세계를 빠르게 복구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규격화되고 미니멀한 공간과 물건에 둘러싸인 사용자들은 서서히 숨이 막혀왔다. 디자이너들 역시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오직 부유한 소수만을 위한 제품을 생산하는 위치로 전락해 있었다. 소트사스와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은 이런 흐름에 반기를 들며 정형화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을 다양한 디자인 언어로 표현하는 실험을 이어갔다. 특히 소트사스는 ‘간결한 것은 부족하다(Less is less)’는 말로 기능주의의 한계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한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1980년대 초, 60대 중반의 에토레 소트사스는 20대 건축가 제자들과 함께 디자인 그룹 멤피스(Memphis)*를 결성한다. 그리고 1981년, 이들이 선보인 전시가 전 세계 디자인계를 강타했다. 디자인사 최초의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이 선보인 파격적인 디자인 문법과 강렬한 색상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것이었다. 특히 소트사스가 디자인한 라미네이트 책장 ‘칼톤(Carlton)’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트로피가 되었다. 다채로운 색상과 자유분방한 형태가 빛을 발휘했고, 과일 상자로나 쓸 것 같은 라미네이트에 플라스틱 조각을 붙인 소재의 활용도 새로운 시대정신을 보여줬다. 이 전시를 통해 당시 무명 디자이너였던 미켈레 데 루키 (Michelle De Lucchi), 안드레아 브란지, 알도 치비크(Aldo Cibic), 마테오 툰(Matteo Thun) 등이 스타덤에 올랐고 세계 디자인의 헤게모니는 이탈리아로 넘어오게 됐다. 고령의 나이에도 멘토 역할을 자청한 소트사스의 지속적인 헌신이 이탈리아 디자인을 스쳐 지나가는 유행이 아닌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에토레 소트사스를 지금까지도 ‘이탈리아 디자인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스타 디자이너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세대를 넘어 협업을 주도하며 디자인에 헌신했기 때문이다.

* 이 이름은 밥 딜런의 노래 ‘Stuck Inside of Mobile with the Memphis Blues Again’에서 무작위로 따온 것이다. 고대 이집트 도시의 이름이면서 미국 도시의 이름이기도 한 멤피스는 정형화된 디자인을 탈피하고자 하는 그룹의 색깔을 잘 보여준다.



발렌타인 타자기, 1969년. 인간의 얼굴을 닮은 배치와 디자인, 1960년대 팝아트 열풍에 어울리는 컬러풀한 색감이 특징이다.


소트사스의 드로잉 ‘야만적인 가구’, 1986 년. 전통과 미래, 양식을 조합·해체해 개성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언어를 만들어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상징이 된 소트사스의 칼톤 책장, 1981년.

신화가 된 이탈리아 디자인의 대부
소트사스는 1980년 밀라노 브레라 지역 멜로네 거리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디자인 스튜디오 소트사스 아소치아티를 설립했다. 이후 세계 각국의 유명 브랜드와 협업하며 제품, 인테리어, 건축 등 다양한 분야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와 함께 순수 예술 활동과 저술 활동, 큐레이션 등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당시 디자인 명사로는 드물게 카셀 도쿠멘타, 퐁피두 센터 등에 초청받기도 했다. 그렇게 전방위에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2007년의 마지막 날,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전날까지도 중국의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동료 마르코 팔미에리(Marco Palmieri)와 머리를 맞대고 고심했던 그의 마지막은 갑작스러웠다. 아내 바르바라가 유품을 정리하던 중 그의 옷 호주머니에서 작은 연필 하나가 나왔다고 한다. 아버지가 그토록 염원했던 건축가로서의 사명을 훌륭히 완수한 것을 치하라도 하듯, 그가 태어나던 1917년 가장 먼저 그의 손에 쥐여준 연필 한 자루는 아흔한 살의 나이로 타계하던 순간에도 그의 곁을 지켰다.


■ 관련 기사
에토레 소트사스 탄생 100주년
#1 왜 다시 에토레 소트사스인가?
#2 거장 디자이너로서의 삶
#3 너그러운 친구였던 따뜻한 멘토
#4 에토레 소트사스를 기억하는 디자인 명사들

Share +
바이라인 : 글: 여미영(D3 대표), 담당: 최명환 기자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17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