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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Editors letter 호혜와 연대

영국 출신 아티스트 토머스 트웨이츠Thomas Thwaites는 2000년대 후반 ‘토스터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영국 RCA에 재학 중이던 그는 졸업 작품으로 직접 토스터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죠. 토스터 하나 만드는 게 뭐 대수인가 싶지만, 방점이 ‘직접’에 찍히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토머스 트웨이츠는 일단 토스터 한 대를 사서 낱낱이 분해하고 제작에 필요한 원재료부터 채집하기 시작합니다. 이를테면 토스터의 뼈대 역할을 하는 강철을 구하기 위해 광산을 찾아가 철광석을 구해 오는 식이죠. 이 기발하고 해괴한 프로젝트는 약 9개월 만에 막을 내립니다. 토스터 제작에 필요한 부품은 150여 종이었지만, 그가 직접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고작 22개였고 우여곡절 끝에 만든 토스터는 토스터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빵을 구울 수 없었거든요. 이 에피소드 혹은 퍼포먼스를 처음 접했을 때 저는 토머스 트웨이츠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유로지비(*)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현대식 우화는 ‘디자이너 만능주의’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줍니다(아, 저는 여전히 디자인 지상주의자이긴 합니다). 하나의 아름다운 제품이, 공간이, 의상이 만들어지는 데 디자이너의 영민함과 비범함을 빼놓을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죠. 디자인이 세상에 현현하기까지 색상, 소재, 마감이 매 구간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여기서 잠깐 책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물을 응시해보세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매우 높은 확률로 수많은 전문가와 생산자가 연구하고, 탐구하며, 고민한 것들이 녹아 있는 물건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눈앞에 놓인 수많은 인공물은 결국 고도로 집적된 ‘관계의 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22-23 CMF 디자인 사전’은 제품, 공간, 패션 등 여러 디자인 분야에서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컬러, 소재, 마감을 다룹니다. 전국 곳곳에 포진한 소재 라이브러리나 가공업체를 소개해 실질적이고 영양가 있는 정보를 전달합니다. 지속 가능성을 둘러싼 다양한 디자인 프로젝트,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허무는 소재 실험, 올해 CES에서 단연 최고의 화두였던 BMW의 E-잉크와 독점권 논란을 일으켰던 반타 블랙 등은 꼭 전문 디자이너나 디자인 전공 학생이 아니어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기사입니다. 그런데 저는 솔직히 여기서 조금 더 욕심을 내보고 싶습니다. 실용적인 정보와 매력적인 읽을 거리도 좋지만, 저는 이번 호가 궁극적으로 창작 생태계를 폭 넓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2억 달러짜리 요트이든 2달러짜리 우유병이든 이 거대한 생태계 안에서 촘촘하게 엮인 관계의 미학을 거쳐 탄생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주변을 향한 이해로, 더 나아가 호혜와 연대로 이어집니다. 요즘 저는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건 1984년 LGSM(**) 과 웨일스의 광부들이 보여줬던 연대의 힘이며, 측은지심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열쇠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물론 그것이 늘 이상적인 모습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오해와 불신, 부족한 섬세함 때문에 서로의 가슴에 의도치 않게 생채기를 내기도 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맞잡은 손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배제와 분열이 득세할수록 더 필사적으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번 호를 접한 독자 여러분도 그런 마음으로 창작 생태계에 구성원들을, 열강들의 셈법 가운데 핍박받는 동유럽의 한 나라를, 문명의 이기에 소리 없이 신음하는 지구를 바라보는 2022년 봄이 되었으면 합니다.

PS 꼭 1년 전 ‘편집자의 글’을 통해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사이 세상은 더 조각난 것 같아 좀 씁쓸하네요.


(*) 성스러운 바보 혹은 미치광이 성자를 뜻하는 러시아어. 미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남들이 이해 못 하는 진리를 알고 있는 현자를 의미한다.
(**) 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 영국에서 마거릿 대처 집권 시절 석탄 노조 파업을 지지했던 성소수자 운동가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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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글 최명환 편집장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2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