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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Editor's letter 세상에서 제일 장구한 예술

지난 4월 15일부터 5월 14일까지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는 ‘크리에이터들의 크리에이터’였던 이어령 선생을 추모하는〈이어령 장예전〉이 열립니다.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낸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기호학자, 문학평론가, 언론인, 교육자로서 언제나 우리 사회에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한 시대의 지성을 기리기 위해 많은 창작자들이 이번 전시에 참여했는데, 저는 무엇보다 ‘장예長藝’라는 전시 타이틀에 특히 마음이 갔습니다. ‘긴 예술 이야기’라는 의미가 선생의 삶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선생이 지성과 영성의 무대에서 예술을 일궜다면, 삶과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예술을 일군 이들도 있습니다. 바로 농부들입니다. 고개를 갸웃거릴지 모르지만, 예술가를 ‘예술이 무엇인지 규정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세상에 색다른 시각적 경험을 선사하고, 특별한 방법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하며, 사물을 의미 있게 만들고, 예술가로서 할 일을 해야 하는 존재’(●)로 정의한 미학자레너드 코렌Leonard Koren의 관점에서 비춰봤을 때 농부만큼 예술적 삶을 영위하는 이도 드뭅니다. 이번 특집에 소개한 유승종 라이브스케이프 대표의 인터뷰처럼 농사는 ‘아주원초적인 디자인 행위’이기도 하죠.

실제로 19세기 초 미국 정치인 대니얼 웹스터Daniel Webster가 “경작지가 생기는 곳에 다른 예술(기술)이 따라온다. 따라서 농부는 인류 문명의 선구자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평생을 밭고랑 기어 댕기는’(정성숙 작가의 단편소설 ‘기다리는 사람들’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것이 무명의 여성 농민이든, 농업용 드론과 로봇으로 중무장한 애그리테크agritech 전문가든 관계 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일상의 예술을 펼칩니다. 최근 농업이 새롭게 주목받게 된 배경에는 공교롭게도 시대의 위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와 곡물 자급률 저하에 따라 촉발된 식량 안보 위기, 농촌 인구 감소에 따른 지역 소멸 등 어쩌면 인간을 가장 역동적으로 만드는 것은 역경과 위기인지도 모르겠네요. 이유야 어쨌든 언저리에서 불어오는 혁신의 바람은 꽤 무섭습니다. 미국의 시장조사업체 마켓앤드마켓은 2023년 애그리테크 산업의 시장 규모가 135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는데, 이를 입증하듯 뉴저지 기반의 스마트팜 기업 에어로팜은 기업 가치가 무려 12억 달러(약 1조 3590억 원)에 달해 ‘농업계의 애플’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밖에 롱테일 법칙에 입각한 D2C의 활성화와 젊은 영농인의 증가가 농가에 고도화된 브랜딩을 덧입히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고, 콘크리트 틈새를 비집고 출연한 도시 농부들과 이들을 연결하는 인프라가 도시와 농촌을 가르던 이분법을 영리하게 교란시키고 있습니다. 디자이너는 여기에 문화와 미학, 콘텐츠를 접붙이며 산업을 한층 풍요롭게 만듭니다. 아름다운 패키지와 정교한 브랜딩 전략, 매력적인 공간 디자인은 인류 문명의 선구자를 다시금 소환하며, 도시 문명의 베일에 가려져 있던 풍요와 대지의 여신을 가시화시키죠. 문득 이어령 선생이 모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바람을 본 사람은 없어도 바람개비를 통해 바람을 볼 수 있다”라고 한 말씀이 기억납니다. 보이지 않는 문화와 산업의 영향력을 환기시키는 힘, 디자인에는 바로 그런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 〈예술가란 무엇인가〉, 레너드 코렌 지음, 안그라픽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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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글 최명환 편집장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2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