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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Editors letter 지갑 속을 유영하던 철갑상어

불과 몇 년 전까지 저는 늘 지갑 속에 자그마한 철갑상어 장식을 넣고 다녔습니다. 보드카 브랜드 ‘벨루가 노블’의 라벨에서 떼어낸 금속 조각이었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 중 손에 넣은 것이었죠. 이걸 지니고 다녔던 건 순전히 그곳 민박집 아주머니의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이걸 갖고 있으면 행운이 온대요.”

거나하게 취했던 탓인지, 제 마음이 유독 가난했던 탓인지 미신이나 속설 따위에 눈 하나 깜빡 안 하는 성격이지만, 그땐 왠지 그 말을 믿고 싶더군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벨루가가 이 양각 심벌을 사용하는 건 프리미엄 브랜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 행운 따위와 별 상관없습니다.) 즐거운 술자리에서 가벼운 농이었는지 몰라도 이 철갑상어 심벌은 한동안 제게 부적 같은 존재였습니다. 40도짜리 독주에 걸린 농염한 마법인 셈이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에피소드지만, 사실 저는 가끔 술에 실제로 어떤 주술적인 힘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봅니다.

무엇보다 술은 사람들을 이합집산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축제를 관장했다는 이야기나 중세 시대에 등장한 펍pub이 ‘퍼블릭 하우스 public house’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술의 공동체적 성격을 방증합니다. 수도원이 오랫동안 증류와 양조의 중심지였던 것도 가톨릭 문화권이 와인을 사회 통합의 중요한 상징으로 여겼기 때문이죠. 동시에 술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 해당하기도 하는데, 최근 트렌드로 자리 잡은 혼술 문화와 술 구독 서비스가 대표적입니다. 이 유기화학물은 인간의 정신을 높은 수준까지 고양시키기도, 반대로 철저히 바닥까지 끌어내리기도 합니다. 토론회의 일종인 ‘심포지엄’은 사실 고대 그리스의 술자리를 의미했죠. ‘함께(sym)’ ‘마시는(posis)’ 자리에서 사람들은 대화를 통해 지식을 축적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도 저서 〈모크샤〉에서 알코올은 ‘가난하고 문맹인 이들을 문학과 심포니 콘서트가 열리는 곳으로 데려간다’고 말했죠. 반면 보들레르와 랭보, 반 고흐 등이 즐겨 마셨다는 압생트는 수많은 예술가의 삶을 파멸로 이끈 악마의 술로 악명 높습니다. 특유의 중독성, 시그너처가 된 녹색 병, 그리고 여러 스토리텔링이 얽히고설켜 도시 전설 수준의 강력한 ‘브랜드’가 형성되었죠. 어쩌면 이 극단의 양면성이 술을 더 매혹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브랜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번 호에 소개하는 여러 주류 브랜드의 브랜딩은 술의 마력을 더욱 증폭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증류주이든 희석주이든, 고급 위스키이든 서민의 술이든, 내추럴 와인이든 수제 맥주든 상관없이 결국 모든 술은 에탄올로 수렴되지만, 브랜드는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더합니다. 소비자는 결코 제조 방식이나 원료만으로 상품을 선택하지 않죠. 결국 우리는 술자리에서 알코올과 더불어 의미도 함께 마시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 의미를 만드는 게 바로 디자이너와 브랜드 기획자의 몫이죠.

디자인, 예술, 문화와 페어링한 비즈니스들의 풍미가 상당하니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음미하길 바랍니다. 물론 이 의미는 고정불변한 것도, 생산자에 의해 단일하게 규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늘 그렇듯 소비자는 기억, 감정, 상황에 따라 브랜드의 의도를 입맛에 맞게 변주하고, 재해석 합니다. 메시지 발신자 입장에서는 속상한 일일 수도 있지만, 뭐 어떤가요? 창작자의 손에서 미끄러지듯 탈주한 이 의미는 예측은 어려워도 더 다채롭고 흥미진진해지니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술이든, 브랜드든, 인생이든 다 마찬가지죠. 프리미엄 보드카의 심벌이 제 손에 들어와 소소한 행운의 부적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나저나 여러분에게 술은 어떤 의미인가요?


PS 지갑 속에 들어 있던 철갑상어 장식이 어느 날 정말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행운이 필요한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해 유유히 헤엄쳐 건너간 셈 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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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글 최명환 편집장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2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