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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Editors letter 물성의 제단 앞에 서서

몇 년 전 ‘북 호더book hoarder’라는 신조어가 부상한 적이 있습니다. ‘애서가’라는 뜻도 되지만, 사실 그 단어 안에는 책을 잔뜩 쌓아놓고 읽지는 않는 이들에 대한 약간의 조롱도 섞여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샤넬의 아트 디렉터였던 칼 라거펠트가 있죠.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책을 꼭 ‘읽어야만’ 할까요? 텍스트 생산자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책과 교감하는 방식을 텍스트 독해에만 한정 지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책은 내용 외에도 서체로, 레이아웃으로, 후가공과 종이라는 물성으로도 우리에게 말을 건네니까요. 독일 북 아트 재단과 라이프치히 도서전이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나 〈뉴욕타임스〉가 발표하는 베스트 북 커버를 볼 때 저는 그들이 속삭이는 비문자적 메시지를 감지합니다. 월간 〈디자인〉 창간 46주년 기념호의 주제로 책이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주제를 꺼내 든 것은 2022년 출판 시장 안에서 책이 건네는 여러 이야기를 담고자 함입니다.

사실 책은 발명 초기부터 줄곧 문자를 담는 그릇 이상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글을 쓰고 읽는 사람은 왕족과 귀족, 소수의 성직자였고 제작하는 사람 역시 숙련되고 특화된 장인(수도사)이었습니다. 이때 책은 권위적이고 종교적 혹은 주술적이기까지 했죠. 하지만 책의 아우라는 기술에 의해 해체됐습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유럽 사회를 뒤흔들어 깨우며 책의 본성이 변했습니다. 소수의 전유물에서 대중의 일상품으로, 신성과 권위의 상징에서 철저한 상품으로. 보들리헤드 출판사의 페이퍼백 혁명(*)을 거치며 초래된 탁상 출
판 시대에는 ‘거의’ 모두의 손에 책이 쥐어졌습니다. 상품이 되었으니 상품으로서 경쟁력을 갖추고자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죠. (일찍이 발터 베냐민은 산문집 〈일방통행로〉에서 ‘13번지’란 글을 통해 다소 자극적이지만 예리하게 이 현상을 짚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디자이너들은 과거 장인과 다른 방식으로 책이라는 우주를 설계해나갔습니다.

뒤늦게 산업화 를 일군 한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편집 디자인의 개념이 잡혀갔습니다. 정병규가 1977년 한수산의 소설책 〈부초〉(민음사)를 디자인한 것을 시작으로 안상수, 서기흔, 조의환 등의 디자이너가 등장했죠. 예술과 상업의 완벽한 밸런스. 하지만 이런 선구자적 식견의 디자이너들이 등장했음에도 기술 복제 시대에 말소된 아우라는 쉬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책이 직면한 위기는 자명합니다. 정보의 다발, 독해의 도구로서 아우라를 상실한 책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액정 화면에 권좌를 내줬죠. 한독 철학가 한병철은 〈사물의 소멸〉 서문에서 “정보 곧 반사물反事物이 사물의 앞을 가로막고 사물을 완전히 빛 바래게” 한다고 썼습니다. 정보를 전달하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추앙받던 책이 정보 때문에 퇴색되어가다니 실로 아이러니하죠. 전염병이 세상을 뒤덮고 모두가 칩거에 들어간 시국에도 OTT만 활황을 누렸다는 사실은 다시는 책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없을 거란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이번 호에 소개하는 디자이너들 대부분은 최후의 방어선을 치고 힘겹게 사물의 세계를 지켜내는 이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따지면 이번호는 그들에게 보내는, 전우애 절절한 서신 정도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인간은 존재의 위태로움을 느낄 때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나 봅니다. 책을 읽는다는 사람은 없는데 책을 위한 공간은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소셜 미디어를 타고 무서운 뒷심을 발휘한 의정부미술도서관이나 책의 숲이 우거진 소전서림, 정교한 큐레이션을 전면에 내세운 현대카드의 아트 라이브러리, DDP에 새로이 문을 연 매거진 라이브러리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 공간은 마치 물성(지성이 아닌!)의 신전처럼 느껴집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세계사물(Weltdinge)로부터 탈주할수록 인간이 디지털 세상의 위약함에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고 휘발되어가는 물성을 부여잡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그리드 위의 실험가들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집 한편에 마련한 서가 앞에 서서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 보들리헤드 출판사 편집장이었던 앨런 레인이 1935년 펭귄북스 표지와 본문 종이를 중질지에 인쇄·유통하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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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글 최명환 편집장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2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