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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그 디자인을 읽고 또 읽었다. 프린트하지 않는 디자이너
“정말 출력 안 하시겠습니까?” 프로페셔널한 솜씨는 파일 위에서 발휘되지만 독자는 손에 들고 있는 책의 지면을 통해서만 그 솜씨를 경험한다.

디자인 프로그램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프로그램에서 저장한 파일이 곧 결과물인 종류와, 후속 제작의 원고나 지침이 되는 종류. 인디자인은 어도비 크리에이티브 제품 중 유일하게 물질적인 완성품을 목적으로 개발한 프로그램이다. 그것도 가장 고전적이고 기술 진보에 초연한 책 디자인을 위해서. 중세 유럽의 인쇄소 모습을 그린 판화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공장에서 활자를 배열하는 조판공과 인쇄기를 작동하는 인쇄공이 각자 맡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들 틈에서 어린 수련공들은 잉크와 종이를 준비한다. 산업혁명기를 거치는 동안에도 출판은 공장의 일이었다. 소프트 커버가 등장하고 나서야 장정가의 엄숙한 일이 차츰 디자이너에게 넘어오게 됐다. 디자이너가 책 만드는 일에 개입한 것이 150년밖에 되지 않은데 비해, 디자이너가 알아야 할 지식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생겨난 것들이다. 중세 인쇄소에서 쓰던 기술과 공정도 그대로이고, 계몽 시대에 디자인한 글자체도 여전히 현역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성립된 현대 타이포그래피 규칙과 1990년대 이후 개발한 DTP 기술까지. 이런 지식은 알아두면 좋은 것 정도가 아니라, 북 디자이너 타이틀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넘어야 할 문턱이다. 다행히 북 디자이너 대부분은 이런 전통적인 지식과 인쇄 기술에 매력을 느낀다. 어떤 이는 인쇄소의 소음과 냄새도 좋다고 한다.

평소 북 디자이너가 일하는 모습은 이렇다. 그들이 마주하는 화면의 좌우에는 짙은 회색빛 도구 창이 세로로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 희고 창백한 문서가 열려 있다. 일의 시작은 일반 워드프로세서와 같다. 가로세로 수치를 입력해 새 문서를 만들고 여백을 정한다. 그리고 본문 자리에 원고를 불러들인다. 지면의 여백에 페이지 번호와 기둥 제목을 배치한다. 다음은 제목과 본문 글자체를 고르고 이것으로 판면의 면적과 밀도를 정한다. 사양이 정해지면 위계에 맞춰 스타일로 지정한다. 능숙한 디자이너는 한글과 숫자, 로마자를 합성해 맞춤 서체 세트를 만들거나 예외 규칙을 그랩grep 명령어로 찾아내 고칠줄도 안다. 자부심을 느끼는 디자이너가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따로 있다. 이런 부류의 디자이너는 기꺼이 자신을 아주 작게 만들어 글자의 세계로 내려가기를 즐긴다. 그곳에선 볼드체와 일반체의 크기가 달라 보이고, 따옴표의 꼬리 모양과 대시의 높이가 어색해 보인다. 괄호 앞뒤 공간은 항상 비좁아서 여분의 공백을 넣어야 한다. 온 신경을 집중하여 글자를 가지런 히 다듬는 동안에는 주변 소음도 사라지고, 시간도 다른 속도로 흐른다. 얼마나 지났을까, 화장실 가기를 미룰 수 없어 현실로 돌아온 디자이너는 파일을 저장하고, 긴 시간 멈춰 있어 경직된 몸을 일으킨다. 프.로.페.셔.널. 그런데 이 치열한 과정에서 뭐 빠진 거 못 느꼈나?

인디자인은 인쇄 제작을 위한 프로그램답게 충실한 출력 옵션을 탑재하고 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반의 반밖에 못 쓰는 게 안타까울 뿐이지만, 몇몇 미리보기 기능은 유용하다. 특히 소책자 인쇄 기능이 편리한데, 양면인쇄가 지원되는 레이저 프린터만 있으면 전문가급 가제본을 만들어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디자인하는 도중 테스트 출력을 하면 여러 이점이 있다. 책의 실물 크기와 비례에 익숙해질 수 있다. 그리고 지면에서 채워진 곳과 빈 곳이 적절한지 판단할 수 있다. 화면에서 정한 판면의 짜임새와 요소들의 위계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차를 감안하면 컬러도 감 잡아볼 수 있다. 놀랍게도 이 모든 게 보는 즉시 판가름 난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들여 조정한 글자 세계의 변화도 감지할 수 있다. 낱장을 출력하면 이런 걸 볼 수 있지만, 여러 페이지를 출력해보면 페이지 사이의 연결성과 리듬을 볼 수 있다. 일관성이 잘 유지되는지, 지나치게 반복적이라 지루해 보이지 않는지 깨닫게 된다. 그럼 책의 모든 페이지를 출력해보면? 가제본한 책을 처음 펼쳐 보면, 보통은 몇 페이지 못 넘기고 곧장 컴퓨터로 돌아가 고치기 시작한다. 며칠에 걸쳐 조각조각 디자인한 부분을 결합한 결과는 당연히 얼기설기하고 확연한 오류가 보이기 마련이다. 게다가 높이가 생긴 책을 대하면 그제야 예상 못 한 제작의 고민과 아이디어가 생겨나기도 한다.

프.로.페.셔.널.한 솜씨는 파일 위에서 발휘되지만 독자는 손에 들고 있는 책의 지면을 통해서만 그 솜씨를 경험한다. 그런 점에서 제작하지 않은 인디자인 파일은 무가치하다고 할 수 있다. 테스트 출력이 파일과 완성된 책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그걸 굳이 거르는 이유는 다음 중 하나일 거다. 축적된 경험을 과신하거나, 지나친 요행을 기대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게으르거나.

디자인 산업이 모두 비물질화로 몰려간 사이 인디자인은 위협적인 경쟁자 없이 20년 넘게 인쇄·출판 시장에서 유력한 지위를 유지해왔다. 당분간 어도비사를 바라봐야 한다면, 출력 안 하는 디자이너를 위해 증강현실 기술을 동원한 시뮬레이션 기능을 부탁하고 싶다. 그리고 그걸 개발하는 동안 “정말 출력 안 하고 계속하시겠습니까?” 같은 메시지를 파일 저장 때마다 띄우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비활성화 옵션 없이.




대학과 대학원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고 안그라픽스와 베이스Base 뉴욕 사무소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2011년 프랙티스를 설립하고 문화·예술, 건축, 출판 분야에 디자인 서비스를 제공해왔다. 2018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디자인학부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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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유윤석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2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