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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미스터 브라운, 그가 왔다 디터 람스 Dieter Rams
애플의 디자인 디렉터 조너선 아이브(Jonathan Ive), 미니멀 디자인의 대가 재스퍼 모리슨(Jasper Morrison)과 후카사와 나오토(Naoto Fukasawa) 등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존경을 넘어 경외하는 남자 디터 람스. 독일 가전업체 브라운(Braun)의 디자인을 40여 년 동안 이끌며 ‘미스터 브라운’으로 불린 그가 한국을 찾았다. 그동안 수 많은 유명 디자이너가 한국을 다녀갔지만, 이번 그의 방문은 한국 디자인사에서 단연 큰 의미로 기록될 것이다.


디터 람스는 걸치고 있던 바바리코트를 벗고 사진가가 원하는 자리로 천천히 이동했다. 브라운 음향기기의 스피커 부분에 일관되게 적용된 가로 홈과 펀치로 철판을 뚫어 생긴 형태를 아이콘화해 그려 넣은 대림미술관 전시장 벽면 앞에 선 뒤 배경을 가리키며 ‘좋은 선택’이라는 말로 화답했다. 우리 나이로 치면 올해 79세인 그는 지팡이에 의존하긴 했어도 180cm는 족히 넘을 몸을 꼿꼿이 세우고 전 일정을 소화할 만큼 정정했다.

profile
1932년생. 1955년 브라운에 입사해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에 디자인 부서 수석 디자이너가 된 뒤 40여 년에 걸쳐 브라운의 전설적인 디자인을 탄생시키고 이끌었다. 1997년 은퇴하기까지 ‘더 적게, 하지만 더 좋게(Less But Better)’를 모토로 오디오 시스템, TV, 주방 기구 등 브라운의 수많은 제품을 통해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구축하고 현대 산업 디자인의 표준을 제시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대량생산 제품이 갖춰야 할 올바른 자세’에 대해 탐구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대림미술관(관장 이해욱, www.daelimmuseum.org)에서는 오는 3월 13일까지 <레스 앤 모어_디터 람스의 디자인 10계명>전이 열린다. 이번 전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응용미술관(Museum fur Angewandte Kunst)과 일본 오사카 산토리 미술관(Suntory Museum)이 공동 기획한 것으로, 일본 오사카와 도쿄 그리고 영국 런던(디자인 미술관 Design Museum),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마침내 서울에 상륙했다. 디터 람스가 디자인하고 디렉팅한 브라운의 400여 가지 제품을 선보이는 전시지만, 그에 대한 단순 회고전이 아닌 ‘디자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어보려는 취지가 담겨 있다. 이러한 시도는 애플의 혁신적인 성공을 통해 애플의 디자인을 추적한 이들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인터넷에서는 애플의 디자인과 40~50년 전 브라운의 디자인을 직접 비교해놓은 사진을 찾아볼 수 있다. 더 이상 크게 주목받지 않는 한 기업의 과거 제품과 은퇴한 지 15년이 넘은 디자이너를 재조명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 이 전시가 일본과 유럽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한국을 거쳐 미국까지 이어가게 되는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자 월간 <디자인>이 잡지로는 유일하게 단독 인터뷰 기회를 얻어 그를 만났다. 고령이라 오랜 인터뷰가 힘들다는 주최 측의 요청 때문에 시작하기 전부터 걱정이 많았지만, 막상 인터뷰 중 그는 여러 차례 질문을 끊어가며 먼저 대답할 만큼 열정적이었다. 목소리는 힘이 담겨 있었고,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


전에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나요? 혹시 한국 디자인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대략 20년 전쯤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는 국제디자인회의(International Design Congress)가 열렸는데, 저는 독일디자인협의회(German Design Council) 회장직을 맡고 있어 참석하게 됐습니다. 한국의 제품 디자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서 뭐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전설이 돼버린 이름, 브라운. 40여 년 동안 이곳에 몸담으며 기업의 디자인 언어를 구축한 디터 람스. 그의 디자인 인생은 디자인에 대한 태도와 재능을 물려받았다고 말하는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10대 초반부터 목수 기능장이었던 할아버지의 작업장을 자주 찾았다. 혼자 손으로 가구를 만드는 전통적 장인이었던 할아버지에게서 목공 기술을 배웠는데, 그는 당시에도 ‘꾸밈없이 단순한 것’을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디터 람스가 청소년기였을 때 독일은 나치 정부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ng Mies van der Rohe)나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같은 바우하우스의 영웅들에 의해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건축과 디자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한창이었다. 특히 ‘국민들에게 견고한 가재도구와 내부 설치물을 제공하는 것’과 함께 플라스틱 같은 ‘새로운 소재의 사용’이 강조됐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장식적이었던 나치 정부에 대한 반작용으로 당시 독일인들의 모더니즘에 대한 욕구는 필연적이었다. 대학에서 건축과 인테리어 디자인을 공부한 디터 람스는 졸업 후 2년 동안 오토 아펠 건축회사에서 일하며, 독일의 미국 영사관 건축 작업을 통해 모더니즘을 실제 작업으로 접하게 된다. 그리고 1955년 브라운과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브라운 형제는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계승한 울름 조형대학과의 협업을 진행했고, 당시 한창 떠오르기 시작하던 미드 센추리(Mid Century)의 모던한 인테리어 및 가구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제품을 구상 중이었다. 디터 람스는 이런 그들에게 반해 즉시 입사를 결정한다. 처음에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브라운에 합류했지만, 이듬해 본격적으로 제품 디자인을 시작하게 된다.


라디오-오디오 SK4
디자인: 디터 람스·한스 구겔로트, 1956년 발표, ©Koichiokuwaki
주파 표시판과 조절 장치는 윗면에 모으고, 스피커는 청취자 쪽을 향해 앞면에 설계했다. 철판과 플라스틱 그리고 나무까지 다양한 소재를 사용했는데, 특히 덮개에 사용한 투명 아크릴은 브라운의 홍보 전시관 내부에 사용했던 소재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당시에는 너무 파격적인 디자인이라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사실 별칭인 ‘백설공주의 관’이라는 것도 처음에는 비아냥대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건축이나 인테리어 디자인에 비해 제품 디자인은 규모가 작은데, 실제 작업에서 다른 점이나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나요? 큰 차이점은 없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건축과 디자인을 통합적으로 보고자 했습니다. 서로 다른 재료를 쓰고 규모도 다르지만 원칙적으로는 둘 다 기술적인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당시 브라운이 꿈꾸던 제품은 어떤 것이었나요? 그들은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당시 생활 환경에 어울리지 않아) 가리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제품을 원했습니다. 경영진 역시 새로운 스타일에는 전혀 집착하지 않았지요. 우리는 오로지 합리적인 제품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제품 디자인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에 구현하고 싶었고, 이를 요란하지 않게 조용한 방식으로 해내고 싶었습니다.


1921년 설립된 브라운은 1951년 설립자 막스 브라운이 죽고 두 아들 에르빈(Erwin)과 아르투르(Artur)가 물려받아 계승하게 된다. 형인 에르빈은 회사 경영을, 동생 아르투르는 기술과 설계 부분을 맡아 역할을 분담했다. 설립자 막스 브라운은 직원들로부터 ‘검소하고 엄격하며, 아는 게 많고 공평한 사람’이라는 평을 얻었고, 의사가 꿈이었던 에르빈은 사내에 사회복지시설을 마련하는 등 신교 기독교의 공정성을 기업 경영에 반영했다. 이는 젊은 디터 람스가 어떻게 기업 내에서 디자인의 윤리 의식을 중요히 생각하게 됐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설립 이후 브라운은 무선 기기 산업의 주요 부품 생산업체로 성장했으며, 오디오 시스템에 대한 높은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편 브라운 본사가 있던 프랑크푸르트는 모더니즘 건축 등 새로운 문물로 가득했고, 당시 독일 내 재즈 문화의 산실로서 진보적 문화·예술인들이 재즈 콘서트에 모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있었다. 또한 젊은이들은 당시 나치 정부의 선전 광고를 위해 제공된 ‘국민 수신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외국 방송을 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라디오-오디오의 폭발적 수요는 잠재돼 있었던 것이다. 디터 람스가 제품으로는 처음 디자인한 라디오-오디오 SK4는 그 즈음 탄생했고, 출시하자마자 폭발적인 반응을 얻게 된다. 울름 대학의 한스 구겔로트(Hans Gugelot) 교수와 함께 작업한 이 제품은 투명한 아크릴 덮개로 인해 ‘백설공주의 관’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베를린 건축 전시회에 SK4가 등장한 뒤 디터 람스는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는 동시에 기업 안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다지게 된다. 동시대에 생산해 성공적으로 판매하던 미국 파다(Fada)사의 라디오 불렛(Bullet)이나, 필립스의 필레타(Philetta)와 비교해보면 SK4 디자인이 얼마나 세련되었는지 알 수 있다.


SK4를 발표했을 당시 반응은 어땠나요? 옆면은 나무로, 덮개는 투명 플라스틱으로 된 제품이었죠. 나무를 사용한 것은 일종의 기존 가구에 대한 회상이었습니다. 금속을 사용한 것은 비용 문제 때문에 필수적이기도 했고, 재질 면에서 나무로부터의 결별을 의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이러한 기술적인 기계를 집 안 환경과 조화롭게 맞춰 사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더군요.

모두의 생활 환경이 서로 다를 텐데 ‘주변과 어울리는 조화’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제 기본 원칙 중 하나가 ‘간단함으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간단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환경에 잘 어울리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 영국의 집사로 비유해볼 수 있습니다. 집사는 필요할 때 그 자리에 있다가 필요 없을 때는 뒤로 물러납니다. 즉 좋은 디자인 역시 눈에 띄지 않다가 필요할 때 비로소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절제입니다. 가구 역시 자기 존재를 부각시키지 않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고요. 가구는 책이나 다른 여러 물건을 만족스럽게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1 스피커 LE1
디자인: 디터 람스, 1959년 발표, ©Koichiokuwaki
영국 쿼드(Quad)사가 생산하던 제품을 브라운이 새롭게 디자인한 것이다. 기존 제품은 목재와 금속에 천을 대 가구 느낌이 더 강했지만 디터 람스는 금속 테두리에 얇은 철제 막(멤브레인)을 앞뒤로 덮고, 가는 받침대로 마무리해 더욱 간결한 제품을 선보였다.

2 휴대용 오디오 TP1
디자인: 디터 람스, 1959년 발표, ©Koichiokuwaki
납작한 원통 부분에 레코드를 얹어 사용하는 것으로 최초의 휴대용 음향기기로 알려진 소니 워크맨보다 20년이나 앞선 브라운의 제품이다. 브라운의 독보적인 기술을 적용한 트랜지스터로 발열이 심하고 부피를 많이 차지하던 기존 진공관을 대체함으로써 크기를 현저히 줄였고, 바늘이 아래쪽에서 레코드 판에 닿게 해 이동시의 불편함을 없앴다.


금속과 플라스틱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소재를 사용한 SK4는 뒷면도 앞면처럼 신경 써서 디자인했다. 이는 으레 벽 쪽에 붙여 놓고 사용하던 라디오를 집 안 어디에나 놓고 사용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즉 제품에 자유를 줌으로써 생활 공간을 해방시키려고 한 것이다. 흔히 SK4를 언급할 때 형태의 혁신이나 소재의 파격에만 초점을 맞추지만, 삶의 개념이 변화하던 당시를 비춰보면 이 부분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터 람스는 제품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언제나 ‘삶’이라는 환경 속에서 생각하려고 했다. 브라운에 처음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입사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실내 공간에 대한 관심은 늘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토 자프(Otto Zapf)와 덴마크 가구 상인 닐스 비제 비초에(Nils Wiese Vitsoe)는 디터 람스의 가구 디자인을 실현하기 위해 시스템 가구회사 ‘비초에 & 자프(이후 비초에로 바뀜)’를 설립한다. 비초에는 선반, 의자 등 주로 사무 가구를 생산했으며, 모듈 개념을 적용해 사용자가 선반의 개수와 형태를 자유롭게 조합할 수 있게 디자인했다. 이에 대해 일본의 건축과 문화에 관심이 많던 디터 람스가 가벼운 모듈 시스템을 채택한 일본의 전통 건축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제품과 가구라는 서로 다른 분야를 동시에 작업하셨는데, 어떤 시너지 효과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기업에 속해 있으면서 다른 회사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는 아니었어요. 그러나 에르빈 브라운은 늘 인테리어 디자인의 발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1955년 당시 모던한 인테리어를 원했던 소수가 결국 우리의 라디오를 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랬기에 젊은 나이에 디자인 팀장이 됐음에도 비초에를 위한 사외 활동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브라운은 비초에를 위한 작업이 라디오 판매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실제 브라운 제품과 꼭 맞는 조합을 위해 비초에의 선반 시스템에 브라운 오디오를 쉽게 설치할 수 있도록 설계함으로써 두 제품 모두 판매를 높일 수 있었다.)


3 믹서 MPZ 2 / 21 / 22 citromatic
디자인: 디터 람스·위르겐 그로이벨(Jurgen Greubel),
어시스트: 가브리엘 유예에스(Gabriel Lluelles), 1972년 발표, ©Koichiokuwaki
1962년 브라운은 스페인의 가전제품 회사 피머를 인수해 브라운 에스파뇰라로 이름을 바꿨다. 이 주스 믹서는 브라운 에스파뇰라가 스페인 시장에 내놓기 위해 출시한 제품이다. 디터 람스는 금속과 함께 플라스틱을 제품 소재로 자주 사용했는데, 단순히 소재로 쓰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플라스틱 제조 과정에 관여해 더욱 순수한 색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했다.

4 수신기 T 1000
디자인: 디터 람스, 1963년 발표, ©Koichiokuwaki
브라운의 최첨단 기술을 접목해 장파와 중파, VHS 및 8개의 단파 수신이 가능하도록 했다. 주로 해상에서 위치를 파악하는 용도로 쓰였는데, 소프트웨어의 수명이 2년을 못 넘기던 시절에 T1000은 탁월한 성능과 오랜 수명으로 대량생산된 제품이 아니었음에도 많은 판매고를 올릴 수 있었다. 여러 버튼이 가로세로 줄에 맞춰 정렬됐고, 앞에는 덮개를 달아 사용하지 않을 때는 덮개를 덮어 내부가 보이지 않게 보관할 수 있었다. 아울러 덮개 홈에 설명서를 넣어 잃어버릴 염려가 없었다. 브라운 제품은 기능에 충실한 디자인만으로도 기계가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디터 람스와 그의 디자인 팀은 1955년부터 1995년까지 오디오 시스템부터 시작해 라이터, 계산기, TV 등 가전제품 전 분야에 걸쳐 그들의 재능을 불어넣었다 디터 람스가 처음 브라운에 입사했을 때 사내에는 그래픽 디자이너 단 한 명뿐이었다. 점차 디자인 부서가 만들어지고 인원이 늘어났지만 가장 많았을 때도 16명에 불과했다. 그는 팀별로 프로젝트를 나누어 수행하게 했는데, 특히 게르트 뮐러(Gerd Müller)와 로널드 비겐트(Ronald Weigend)에게 제품의 상당 부분을 일임하고, 자신은 라디오, 녹음기 등의 프로젝트에 더욱 집중했다.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브라운 디자인은 결코 자신만의 업적이 아니며, 브라운 디자인 팀 전체가 함께 만들어낸 것이라고 강조한다. 디터 람스는 오늘날 디자인뿐만 아니라 리더십의 측면에서도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는 1988년 당시 디자이너로는 파격적으로 브라운 임원 자리에 올라 기업 경영 일선에도 참여했다. 그는 협동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려면 인간적 유대감이 강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디자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들이 이룬 성취를 존중하며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은 다른 견해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곳이기 때문에 의견 조율이 쉽지 않았을 듯합니다. 과거의 중소기업, 특히 가족 경영 기업의 경우 일반적인 대기업보다 의사소통 과정이 그리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질레트(브라운은 1968년 질레트에, 그리고 2005년 프록터 & 갬블에 차례로 인수됐다)에 재직하던 당시 회사는 2년마다 이사진을 바꿨습니다. 이사진의 규모가 더욱 커졌는데 다행히도 회사를 떠나기 전까지 과거의 이사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요. 모든 기획이 성공적으로 끝났던 것은 아니고 늘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되돌아보면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었습니다.

질레트가 브라운을 인수한 뒤에도 브라운의 디자인 부서만큼은 CEO 직속 부서로 인정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질레트 인수 뒤의 상황은 어땠나요? 질레트의 첫 회장은 1968년 브라운을 어떻게 해서든 인수하고자 했습니다. 한 회사가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상대적으로 단기간 내에 자사 디자인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는 점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브라운을 인수하자마자 제게 와서 필기구를 새로 디자인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는 정말로 문화적인 부분에 관심이 많았어요. 자신이 인수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물론 저도 브라운에 그렇게 오래 있지 않았을 겁니다. 사실 브라운 외에도 규모가 작은 회사이긴 하지만 비초에가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좋지 않았다면 브라운에 꼭 남을 필요는 없었지요.

지금의 브라운 디자인은 이전과 너무 달라 다른 회사 디자인이 아닌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저는 이를 제한적으로 정확히 1995년까지만 보려고 합니다. 그 이후 브라운 정책이 변경됐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브라운은 질레트와 프록터 & 갬블에 인수되며 회사 정책이 계속 바뀌었습니다. 현재 프록터 & 갬블 같은 기업은 단지 마케팅의 기반 위에서 기업을 경영하지만, 지금의 제품은 이전의 브라운 제품과는 전혀 무관한 제품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브라운도 심사숙고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새로운 경영진 아래에서 다시 이전의 노선을 따를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1년 전에 수석 디자이너가 바뀌기도 했습니다. 아직 새로운 제품은 없지만, 적어도 그런 것들이 새롭게 논의되고 있는 듯합니다. 한번 기다려봅시다.

기술과 디자인이 그토록 뛰어난 브라운도 결국 다른 회사에 인수될 만큼 경영 악화를 겪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다고 생각하나요? 당시 일본으로부터 브라운 제품보다 훨씬 저가의 비슷한 제품들이 들어왔습니다. 우리로서는 바로 그것에 대응해야만 했지요. 그 해답은 명백히 품질에 투자함으로써 더 높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 품질 낮은, 저가품이 경쟁하는 시장에 덜 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습니다. 신제품은 생산 시설만 보더라도 높은 투자 비용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상당한 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이 비용은 될 수 있는 한 빨리 회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케팅적인 책임이 제품 개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어떤 제품을 생산할 것인가? 신제품은 어느 정도 혁신적일 수 있는가? 이는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사하는 마케팅을 통해 결정됩니다. 저는 이것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는 늘 중급 제품만 나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왜 전 세계적으로 디자인을 진지하게 여기는 기업이 정말로 적은가’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브라운은 1995년까지 매년 지속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애플도 좋은 디자인이 얼마든지 성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구글 역시 친환경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분도 좋은 디자인과 함께할 수 있다는 충분한 예가 됩니다.

브라운의 경영난에 마케팅이 일부 원인을 제공했다고 보는 것인가요? 소비자들은 항상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합니다. 디자이너가 가야 할 길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른 이에게 묻는다면, 결국 그것으로부터 최대한 평균적인 것만을 얻게 될 겁니다. 최대한으로 말입니다. 이 점이 제가 마케팅을 비판하는 이유입니다. 디자이너가 해야 할 일을 누군가 다른 사람, 즉 대중이 하도록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기능주의 디자인을 가장 잘 실현했다고 평가받는 디터 람스는 언제나 내면과 외면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에게 ‘기능적 디자인’이라는 것은 결국 기술과 디자인의 궁극적인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과정이었다. 기계를 기계답게 디자인한 것은 어떤 스타일을 보이려는 게 아닌, 제품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미디어는 그의 디자인을 단순히 ‘군더더기 없다’는 말로만 쉽게 표현한다. 그렇다면 과연 ‘군더더기 없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이 전시의 최초 기획자 중 한 명인 게이코 우에키 산토리 미술관 큐레이터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단순함. 이 말은 요즘 너무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형태는 필수적인 것만을 고집함으로써 극소화된다. 그저 단순함을 위해 제품을 만들면 오히려 원래 목적에 위배되는 제품이 될 수 있다. 단순함이 일종의 장식이 되는 것이다. 기능에 부합하는 장식만을 허용하는 제품이 요즘 유행하는 그저 ‘단순한’ 제품보다 훨씬 더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선생님의 모토인 ‘더 적게, 하지만 더 좋게(Less but Better)’에서 말하는 ‘더 적게’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무조건 덜 표현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사실 유명한 디자인 명제 중 하나인 ‘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Less is More)’이라는 표현은 20세기로의 전환기에 베를린에서 아에게(AEG)를 위해 일하던 건축가 페터 베렌스가 잘 건설되지 않은 자신의 몇몇 건축물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해석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저는 베를린 전시회에서 그 내용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개념이 자주 남용된 것이 문제였습니다. 저급한 건축가들은 그들의 건축물에 대해 무조건 ‘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다’라고 말하고, 이것이 마치 현대의 전통인 양 여겨온 것이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들 건축물의 품질은 너무나도 수준이 낮았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기에 ‘더 적은 것은 지루하다(Less is Bore)’라는 말이 나온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이번 전시의 이름을 ‘더 적게 그리고 더 많게(Less and More)’라고 한 것은 관람객이 직접 ‘더 적게’와 ‘더 많게’ 사이에서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유롭게 선택하라는 뜻입니다. 형식에서나 내용에서 더 많은 것을 원하든, 더 적은 것을 원하든 선택할 수 있는 것이죠.


녹음기 TS45 / TG60
디자인: 디터 람스, 1964년, 1965년 발표, ©Koichiokuwaki
1956년 발표한 라디오 SK4의 진보된 모델로 오디오, 라디오, 스피커의 위치를 자유롭게 배열해 쓸 수 있도록 모듈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버튼, 서체 등 브라운의 제품을 이루는 부수 요소들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버튼의 윗면은 누르기 쉽게 약간 오목하고, 서체는 작으며 이 모든 것은 반드시 정갈하게 정렬돼야 한다. 색은 꼭 필요한 자리에 필요한 만큼만 사용되며, 그 ‘꼭 필요한 자리’란 오늘날 말하는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을 통해 분석된 사용 경로와 일치한다. 예를 들어 계산기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버튼인 ‘=’에 다른 색을 넣어 사용성을 높이는 식이다.

 
디자이너의 윤리 의식을 강조하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세상에 너무도 나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디자인 교육도 이에 더욱 주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아마 지금 나와 있는 디자인도 그 수가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 대신 디자인이 더 철저해 지겠지요. 무엇보다도 윤리는 항상 시끄럽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조촐하게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브라운 제품에 들어가는 브랜드명도 될 수 있는 한 작게 넣어야 한다고 늘 주장했습니다. 마케팅 쪽에서는 될 수 있는 한 크게 넣기를 바랐지만 말이에요. 어느 공간에 자기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들어서는 게 아니라 조용히 들어가는 것도 윤리에 속하며, 제품의 등장도 이와 비슷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경제 악화 이후 많은 기업이 윤리를 외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오늘날 기업은 자신의 입장을 정립하고 임의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많은 회사가 오늘은 빨간색, 내일은 파란색 그리고 모래는 보라색을 만듭니다. 도대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내 입장은 무엇인지,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디자인 역시 윤리를 정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처럼 디자인을 그냥 주변에서 잡아내는 것보다는 ‘무엇이 가능한지’가 아니라 ‘왜 가능한 것이고, 얼마나 가능한 것인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20세기 중반과 지금을 비교하면 소비자의 욕망과 요구 사항이 더 늘어났습니다. 왜 그런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독일 말에서의 ‘사용(gebrauch)’과 ‘소비(verbrauch)’의 의미를 정확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소비는 물건을 버리는 의미를 포함하지요. 그동안 우리가 가지게 된 이러한 물건을 버리는 행태와 성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계속 버리는 이 모든 쓰레기를 가지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제품의 생산이 이성적인 수준을 넘어서다 보니 이제는 주변의 모든 물건을 다 사용해야 하는 지경까지 왔습니다. 이제 우리가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다 쓴 물건을 올바른 용도로 다시 사용할 수는 없는지를 고려해야 할 때입니다.

‘디자이너는 미래에 대해 엄청난 책임이 있기에 낙관주의자가 돼야 한다’고 하신 적이 있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그 생각이 변함없는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낙관적인 사람이었다면 디자인 공부를 시작하지도 않았겠지요. 그렇다고 비관적으로 세상을 본다 해도 세상이 더 좋아지지는 않습니다. 낙관적으로 미래를 볼 때만이 미래가 더 좋아질 수 있지요. 그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말이에요.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많습니다.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아직 쓸 수 있는 물건은 버리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런 물건을 수선하는 산업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리디자인을 개발하는 겁니다. 새로운 것만을 원하는 소비 심리는 본질이 아닌 문제의 겉 부분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 시대에는 모든 것이 ‘빨리’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천천히’ 가야 합니다. 이때도 혁신성을 절대로 놓치면 안 됩니다. ‘더 적게, 하지만 더 좋게, 그리고 더 천천히’ 말입니다. 일을 피상적으로 빨리 하지 말고, 기본에 충실하면서 철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품을 만들 때는 이것이 꼭 필요한 것인지 두 번 생각해보는 겁니다. 한편 기능적인 디자인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까지도 평가 절하되고 있어요. 아마도 새내기 디자이너 또는 디자인 비전공자들에게 목적에 맞게 제품을 디자인하는 것이 더 쉽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같아요. 그러나 기능적인 디자인이 환경을 고려하는 측면에도, 제품의 과도한 생산을 막는 데도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세계의 모토는 더욱 ‘더 적게, 하지만 더 좋게’여야 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의 일상을 나의 일과 상관없는 것으로 접근하는 것이 디자이너가 범할 수 있는 유일한 죄입니다. 결국 기능에 충실한 디자인은 인간의 삶, 욕구, 필요, 감정, 소망에 대해 인내심을 갖고 광범위하게 집중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 전시는 일본과 유럽에서 이미 열렸는데,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40~50년 전 디자인에 열광하게 했다고 보십니까? 저도 정말 놀랐고,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합니다. 특히 방문객 상당수가 젊은 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미래가 낙관적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기쁩니다. 그들이 단지 과거에 대한 향수로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살고 계신 집은 어떤지 궁금해지네요. 1969년부터 1970년까지 설계해 1971년에 집이 완성됐습니다. 카펫이나 가구를 들여놓기 전이었는데, 내부 공사를 하는 인부들이 바닥과 벽이 모두 흰색인 것을 보고는 저에게 우유 가공 공장을 해야겠다고 농담을 하더군요.(웃음) 집의 경우에도 제품 디자인과 마찬가지로 간결하게 설계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고칠 것이 별로 없는 상태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신가요? 이제 더 이상 디자이너로서의 일상적인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너무 나이가 들어버렸지요. 하지만 이 전시회를 통해 제가 그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웃음) 우리가 미래에 무엇을 해야 할지, 미래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또 필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그대로 둬야 할지 같은 것에 대해, 우리의 환경을 위해 조심스럽게 고려해봐야겠습니다. 미래의 디자인 주제는 ‘이 지구를 어떻게 살려야 하는가?’가 될 겁니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교황도 아닌데 설교 좀 그만하라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남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라고 말이죠. 하지만 저는 제 자신을 항상 발전시켜야 했습니다. 현상 유지는 싫거든요.” 이러한 성직자 같은 강직함이 있었기에 그의 디자인 철학이 40년 동안 변함없이 브라운 제품에 표현될 수 있었다. 얼마 전 작고한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디터 람스의 진가는 그러한 확신에 있다고 봅니다. 그는 무척 놀라운 자질을 가졌는데, 확신에 가득찬 주장을 펼치면서도 시적 감성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늘 확실성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디터 람스는 자신의 이상을 디자인을 통해 구현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가장 순수한 본보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성공적인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는 애플과, 이제는 역사가 된 과거의 브라운 디자인을 단순 비교하거나 다시 돌아온 또 하나의 유행으로 바라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는 본질에 대한 깨달음과 이를 구현하는 방식에 대한 공유, 아울러 ‘진정으로 좋은 디자인은 무엇인가?’에 대해 같은 답을 얻은 것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시점에서 디터 람스 디자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가 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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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최태혁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11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