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운상가 5층 팹랩 서울에서 바라본 을지로 전경. 1968년은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이자 국내 유일의 종합 가전제품 상가였던 세운상가의 준공 연도이다.
길종상가의 박길종 대표.
짝퉁 가구의 메카에 날아든 독창적 이방인 | 길종상가
을지로를 수식하는 표현은 많지만 ‘짝퉁 가구의 메카’만큼 대표적이고 동시에 불명예스러운 타이 틀도 없을 것이다. 얼마 전 모 방송 프로그램에 선 한 출연자가 을지로에서 해외 유명 디자이너 의 작품을 모방한 조명을 구매했다는 사실을 밝 혔다가 디자이너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실제로 을지로 가구 거리를 걷다 보면 ‘진품인 듯 진품 아닌 진품 같은’ 가구를 쉽게 만나게 된다. 지역이 이렇다 보니 길종상가와 을지로의 조합이 한층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길종상가는 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독창적 디자인으로 널리 알려진팀 아닌가. 결성 후 줄곧 이태원 일대에서 활동하던 길종상가가 을지로로 자리를 옮긴 것은 지난해 12월. 박길종 대표는 사무실을 옮기기 전부터 을지로라는 지역이 꽤나 익숙한 동네였다고 말했다.
“이태원에서 활동할 때부터 일주일에 3~4번은 이곳에 들러 재료를 구입했습니다. 그러다 재료 운송비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아예 이곳으로 작업실을 옮기기로 한 것이죠.” 길종상가는 목재상, 금속 가게 등 스튜디오의 오랜 단골 가게들과 가까워진 것을 장점 중 하나로 꼽았다. 넓은 제작 공간도 작업실을 이전한 이유 중 하나다. 스튜디오 연차가 쌓이며 프로젝트의 범주나 종류가 다양해졌지만, 주택가를 개조해 만든 이전 작업실에선 큰 규모의 작품을 만들기가 어려웠던 것. 공간에 대한 아쉬움이 컸던 탓일까? 신중부 시장 초입에 새롭게 터를 잡은 길종상가의 작업실은 유달리 층고가 높았다. 작업실을 이전한 것은 매우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지만, 박길종 대표는 그 외의 부가적 장점도 많다고 덧붙였다. “을지로는 매우 활력이 넘치는 곳입니다. 핸드카트, 리어카, 재료를 실어 나르는 소형 차량, 관광객들의 여행용 캐리어 등 온갖 바퀴달린 물건이 쉴 새 없이 움직이죠. 화려한 디자인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는 제작자들의 모습에 좋은 영향을 받습니다.” 재료들이 항상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도 디자이너에겐 좋은 영감을 준다고.
시장 한복판에 위치한 탓에 차량 진입이 어렵고 건어물 냄새가 조금 나긴 하지만, 이 외의 부분은 모두 만족스럽다는 것이 박 대표의 설명이다. 또 1~2층 월세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비싸지만,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임대료가 저렴해지기 때문에 소규모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가 입주하기에 알맞다는 귀띔 역시 잊지 않았다. 작업실을 이전하느라 한동안 숨고르는 시간을 가진 길종상가는 조만간 다시 피치를 올릴 계획이다. 2015년 봄 이후 매 시즌 협업을 진행 중인 에르메스 쇼윈도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하는 한편 3월 25일부터 5월 29일까지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에 참여해 그래픽 디자인 모티브를 입체화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짝퉁 가구의 왕국과 재료의 천국 사이 중첩 지대에 자리 잡은 이 6년 차 디자인 스튜디오는 전보다 더 신선하고 유쾌한 오라를 뿜어낼 준비를 이제 막 마쳤다. bellroad.1px.kr
명필름 아트센터 1층 카페의 이동식 책장. 색상별로 각기 다른 종류의 책을 비치할 수 있도록 했다.
합정동 편집 매장 뮤제드스컬프(Musee de Sculp)를 위해 제작한 테이블과 의자. 클라이언트로부터 ‘동글동글한 느낌으로 디자인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고 한다.
‘자연으로의 질주’라는 주제로 신라호텔에 설치한 2016년 봄 시즌 에르메스 쇼윈도. 길종상가의 세 멤버가 공동 제작한 작품이다. Photo Sangtae Kim ⓒ Hermes
길종상가
김윤하, 박길종, 송대영이 공동 운영하는 디자인 스튜디오다. 상가에 입점한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배우고 느끼며 겪어온 모든 것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이나 인력 등을 제공하는 곳이다. 설치 작품, 가구, 쇼윈도 디자인 등 다양한 영역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길종상가가 말하는 을지로의 장점 & 팁
“정작 우리는 신축 오피스에 작업실을 구하긴 했지만, 사실 을지로는 무척 흥미로운 공간이 많은 지역이다. 댄스 교습소와 전기상, 창고가 한 건물 안에 섞여 있는 모습은 고층 빌딩 숲으로 이뤄진 타 지역에선 쉽게 볼 수 없다. 다양한 삶의 형태, 그리고 삶에 맞게 변형된 공간을 바라보는 것이 재미있다. 넓은 공간보단 좁은 사무 공간이 많은 편인데, 큰 공간을 잘게 쪼개 임대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공간 크기에 구애받지 않는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겐 이점이 많은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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