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ork
타임 스퀘어를 가득 채운 대형 광고판, 하늘 높이 치솟은 건물들, 화려한 뮤지컬.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뉴욕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활기찬 도시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공존한다. 치솟는 물가와 수입 격차로 인해 뉴욕 시민 상당수가 합리적인 가격의 주택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젠트리피케이션을 동반한 지역사회 붕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2012년엔 뉴욕 전체 가구의 3분의 1 이상이 수입의 절반 이상을 월세로 지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지난 2년새 뉴욕의 집값 상승률은 임금 인상률의 13배에 이르고 있다.
지원 과정 안내서. 적정형 주택을 신청하는 데 필요한 각 단계를 시각화하고 직접 체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수요자와 함께 문제점을 찾다
시 당국이 이런 문제를 방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뉴욕 시는 1980년대에 이미 시민들에게 저렴한 주거 환경을 제공하는 공공 주택 공급 서비스 ‘적정형 주택(Affordable Housing)’을 시작해 그 규모를 꾸준히 확대해왔다. 가계 총수입의 30% 이상을 월세로 지출하는 ‘월세 부담 위험 가구’가 주요 신청 대상이었는데, 문제의 심각성을 눈치챈 마이클 블룸버그(Michael Bloomberg) 전 시장은 2008년 6만 5000가구로 잡혀 있던 적정형 주택 공급 및 확보량을 2014년까지 16만 5000가구로 확대하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뉴욕 시의 주거지 보존 및 개발부(NYC Department of Housing Preservation and Development), 싱크탱크 퍼블릭 폴리시 랩(Public Policy Lab), 그리고 파슨스 디자인 대학(Parsons New School)은 록펠러 재단의 펀딩을 따내 ‘공개 협력: 적정형 주택 공급 서비스 개선을 위한 시범 서비스(Public & Collaborative: Designing Service for Housing)’를 실행했다. 프로젝트의 핵심은 수요자들이 기존 적정형 주택서비스를 더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고, 기획과 공급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를 위해 제일 먼저 한 일은 서비스 혼선의 요인과 불편함을 주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프로젝트 팀은 서비스 정보를 제공하는 온ㆍ오프라인상의 다양한 매체를 검토했고, 신청 서류 제출을 위해 방문하는 담당 부서를 직접 찾아가 서비스 제공 과정을 관찰했다. 또 담당 공무원 및 수혜자를 인터뷰하고 시민, 임차인 협회, 지역 공동체, 정책 전문가, 금융 담당자 등 여러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워크숍도 진행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퍼블릭 폴리시 랩은 다음와 같은 디자인 원칙을 도출해냈다.
1. 적정형 주택에 지원하는 사람들의 진짜 삶을 고려하라.
2. 사용자 중심의 정보 디자인을 통해 다양한 옵션을 충 분히 고려한 뒤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라.
3. 지역 공동체를 자산으로 인식하고 함께 서비스를 구현 하고 홍보하라.
홍보와 시범 서비스 평가를 위해 거리로 나선 뉴욕 시 주거지 보존 및 개발부 직원들.
수요자들의 눈높이를 배려한 개선안
프로젝트 팀은 이 원칙을 바탕으로 서비스를 개선해나갔다. 공급자 위주로 구성되어 있던 관료적 절차를 수혜자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1차 목표였다. 이들은 지원 대상자 중 상당수가 전문 용어를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외국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또 기존 양식만으로는 복잡한 신청 절차를 이해하기 어렵단 사실도 알게 됐다. 따라서 프로젝트 팀은 서류 템플릿을 가급적 쉬운 단어로 재구성했으며 지원부터 입주까지 전체 프로세스와 각 프로세스마다 필요한 준비 서류, 그리고 방문해야 할 기관들을 명료하게 시각화한 지원 과정 안내서를 제작했다.
지원자들이 가장 어렵게 느끼는 수입 관련 증빙 서류 를 위해서는, 각 가족 구성원의 수입을 뉴욕 시의 주거지 보존 및 개발부의 기준에 맞추어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이 쉽게 단계별로 설명되어 있는 ‘온라인 지원을 위한 소득 가이드’를 함께 제공했다. 프로젝트 팀은 지원 대상자들의 온라인 검색 빈도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에 착안해 기존 정보 전달 방식을 오프라인으로 전환시켰다. 이들은 지원 대상자들이 자주 찾는 저렴한 식당과 구직 광고 게시판, 그리고 공공 세탁소에 전단지를 부착했다. ‘적정형 주택 홍보 대사’ 위촉과 뉴욕 시 관계 부처의 거리 홍보 활동 등 대면 활동도 병행했다. 뉴욕에는 이웃 모임과 지역 공동체가 활성화되어 있었고, 이들은 보수를 받지 않고도 지원자들을 도울 의지가 있었다. 이들을 공식 홍보 대사로 위촉해 서비스 및 정보 기획 과정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정보의 벽을 낮추고 공식 정보가 지원 대상자들에게 주기적으로 도달되도록 유도했다. 즉 가까운 이웃을 통해 뉴욕시가 제공하는 공식 정보를 접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현재 뉴욕 시는 시범 서비스를 통해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개선된 서류 템플릿을 제공하고 있으며, 홍보 대사 활동도 확대 시행하고 있다. 2014년에는 향후 10년간 20만 가구의 적정형 주택을 확대 공급하는 계획안도 발표했다. 뉴욕과 마찬가지로 서울을 포함한 대한민국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을 동반한 심각한 주택난을 겪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에서는 공공 임대주택 보급량을 늘리고 있다. 시민과 지역사회 주도의 공동체 토지 신탁 등 적극적인 움직임도 있지만, 수혜자 입장과 눈높이를 고려한 정보가 효과적으로 제공되고 있는지, 적극적으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소통이 이뤄지고 있는지를 먼저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글: 정욱섭(쾰른 국제 디자인 대학원 통합 디자인 전공)
홍보물 템플릿. 프로젝트 팀은 여러 번의 제작과 실제 수혜자들의 피드백을 거쳐 템플릿을 완성했다. 이 홍보물들은 비용을 절감하고 갱신을 용이하게 하는 차원에서 일반 사무용 프린터로 인쇄할 수 있는 크기로 제작했다.
지역별로 신청 가능한 적정형 주택을 표시한 전단지.
협력적 서비스 구현에 기여하는 역할
전통적으로 전문가 영역으로만 여겼던 서비스 기획과 제공은, 다양한 책임을 지는 주민들에 의해 협력적으로 구현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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