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저소득층을 위한 칠레의 공공 주택, 미국 뉴욕의 적정형 주택 공급 서비스 개선, 영국 정부의 통합 웹사이트, 덴마크의 산업분류 코드 서비스, 핀란드의 지속 가능한 건물 디자인 공모전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살펴보았다. 각기 다른 맥락에서 다른 문제를 해결한 프로젝트들이지만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수요자 중심으로 사고하고, 둘째, 문제를 표면적으로 바라보기보다 구조적으로 이해하며, 마지막으로 통합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디자인 결과물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무엇이 이러한 접근을 가능하게 할까? 아래의 사례를 살펴보자.
유럽의 작은 지자체에 수영장이 하나 있다. 수영장은 인구가 많지 않은 이 마을의 중요한 시설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즐겨 찾는 공공장소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지역 공무원들이 한가지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작년에 비해 올해 수영장 이용객이 급감한 것. 현장을 찾은 공무원들은 깨진 유리나 낡은 샤워 시설, 현대적이지 못한 입장 시스템 등을 발견하고 낙후 된 수영장 시설이 이용자 급감의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건축가에게 새로운 수영장 디자인을 의뢰했다. 하지만 몇 주 후 회의실에 나타난 건축가의 해답은 공무원들의 생각과 크게 달랐다. 수영장을 찾는 이용객 수가 줄어든 진짜 이유는 낡은 시설이 아닌 갑자기 바뀐 버스 시간표 때문이라는 것. 정각에 오던 버스 도착 시간이 15분 늦어지면서 출근전 30분 수영을 하거나 퇴근 후와 귀가 전 30분 수영장을 이용하던 사람들이 겨우 15분 수영을 하기 위해 수영장에 들르거나 종전보다 15분 일찍 집을 나서야 했던 것이다.
아침 출근을 해본 사람이라면, 더욱이 챙겨야 할 아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공감할 것이다. 만약 문제의 원인을 수영장 시설에만 국한해서 찾았다면 버스 시간표가 주민들의 수영장 이용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문제를 표면적으로만 이해하고 건물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던 공무원들과 달리, 건축가는 주민들이 수영장을 이용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수영장 밖으로 나와 주민의 이야기를 경청함으로써 아이를 등교시키는 부모에게 15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길고 소중한지 공감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새로운 수영장 시설을 제공할 것이 아니라 버스 시간표를 제자리로 되돌려야 한다는 제안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공무원 들은 왜 버스 시간표가 문제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까?
핀란드 혁신 기금의 전략 디자인 유닛을 이끌었던 마르코 스테인베리(Marco Steinberg)의 말을 빌리면 ‘우린 우리가 아는 것은 알지만 무엇을 모르는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버스시간표가 바뀌어 더 이상 수영장에 갈 수 없게 된 주민 중 대부분은 굳이 자기 시간을 내가며 해당 부서에 불만을 표하지 않는다. 개선을 요구할 정도로 적극적인 주민은 극히 드물고 공무원들은 공무원대로 ‘변화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늘 있기 마련이니까’라고 넘겨짚기 십상이다.
이처럼 공공을 위한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파악해낸다는 것은 ‘문제 해결’ 이전에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핵심적인 활동이다. 예를 들어 디자이너의 현실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독거노인들을 위한 프로젝트라면, 설령 관찰이나 인터뷰를 한다고 해도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지 알기 어렵다. 하물며 건축물의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프로젝트라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조차 잡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난제를 풀어나갈 실마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디자인을 활용하면 한국의 정부와 공공 기관이 조금 더 효율적인 정책을 펼칠 수 있다고 믿는 정책 입안자들과 미래의 디자이너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책들을 소개한다. 이 책들이 소개하는 다양한 접근법은 공공 서비스와 정책을 디자인하는 데 길잡이가 될 것이다.
행동경제학
2002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경제학자가 아닌 심리학자였다. 그가 정립한 행동경제학 이론은 인간의 사고를, 즉각적이고 수고는 덜하지만 부정확한 ‘빠른 사고’와 느리고 수고롭지만 정확하고 이성적인 ‘느린 사고’로 나눠 설명한다. 또 이를 통해 왜 사람들이 일상에서 합리적인 결정보다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더 많은지, 그리고 이를 이해하지 못한 정책 입안자들이 ‘이론적 맹목’이나 ‘계획 오류’에 빠지는지 등을 설명한다. 행동경제학은 애덤 스미스 이후 세계 각국의 정책 결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온 주류 경제 이론인 ‘합리적인 인간’에 정면으로 도전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최근 유럽 정부들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고려한 정책 입안 실험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넛지: 똑똑한 선택을 이끄는 힘>
리처드 탈러ㆍ캐스 선스타인 지음, 안진환 옮김, 리더스북, 2009
오랜 시간 대니얼 카너먼과 협력한 경제학자 리처드 탈러 (Richard Thale)와 법학자 캐스 선스타인(Cass Sunstein)이 지은 <넛지>는 행동경제학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을 공공 서비스와 정책 결정에 활용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 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 연구자 도널드 노먼(Donald Norman)이 이름 붙인 ‘지각된 유도성(perceived affordance)’을 바탕으로 행동경제학을 설명하기도 해, 디자인과 행동경제학의 연결지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다양한 예시를 통해 행동경제학을 쉽게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책이다.
<생각에 관한 생각>
대니얼 카너먼 지음, 이진원 옮김, 김영사, 2012
<넛지>만 읽은 독자들은 행동경제학의 메시지를 자칫 소비자나 수혜자들이 ‘우매한 결정’을 하기 쉬우니 그들의 결정을 ‘조작’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대니얼 카너먼이 평생에 걸쳐 연구한 행동경제학의 정수를 압축해 담은 이 책은 이런 오해를 바로잡는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수많은 실험을 통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빠른 사고’에 의한 오류에 빠질 수 있으며, 정책 입안자와 디자이너 등의 전문가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공공을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일독을 권한다.
공감적 관찰 도구
행동경제학을 풀어 쓴 <넛지>는 개개인에게 무엇이 ‘좋은 선택’인지 이미 알고 있을 때 사람들을 유도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다. 그런데 그 좋은 선택이 과연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뉴욕의 퍼블릭 폴리시 랩은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수혜자 및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문제와 해결안에 대해 고민했다. 마인드랩의 디자이너들은 덴마크의 표준 산업 분류 코드인 브랜치코드를 개선하기 위해 새 사업을 등록하는 사람들과 이들을 매일 대하며 문제를 해결해주는 상담 직원들 사이의 소통을 관찰하고, 양쪽이 경험하는 어려움에 공감하려고 애썼다. 이렇게 디자인에서 ‘공감적 이해’란 사람들의 환경에 밀착해 들어가 그들의 삶을 경험함으로써 겉으로 드러난 행동 이면에 숨은 맥락을 파악하고 그들에게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포착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는 매우 정성적이며 관찰자의 민감성과 통찰력을 요하는 작업이다. <서비스 디자인: 실무에서 들춰보는 인사이트>
앤디 폴라인ㆍ라브란스 로이빌ㆍ벤 리즌 지음, 배상원ㆍ임윤경ㆍ정은기 옮김, 카오스북, 2016
서비스 디자인 실무에서 활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팁에 목말랐던 이들의 갈증을 해소해줄 수 있는 책. 다양한 실제 사례를 곁들여 서비스 수요자 및 공급자에 대한 이해와 그들의 협력을 도모하는 도구를 서비스 디자인 단계별로 심도 있게 설명한다. 병원, 금융, 교통 서비스 등의 다양한 프로젝트에서 도구를 활용한 예를 따라가다 보면 각각의 서비스 디자인 도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떤 현실적 제약을 수반하는지 배울 수 있고 해결 방법에 대한 통찰력 또한 얻을 수 있다.
<새로운 디자인 도구들>(가제)
이정주ㆍ이승호 지음, 인사이트, 2016(출간 예정)
사용자 중심 디자인과 협력 디자인이 시작된 곳 중 하나가 바로 북유럽이다. <새로운 디자인 도구들>은 이곳에서 일하고 수학한 저자들이 최근 쏟아지는 ‘디자인 툴킷’의 홍수 속에서 혼란에 빠진 디자이너들을 돕고자 쓴 책이다. 사용자 관찰과 협력 디자인의 핵심 도구를 ‘현장 관찰, 소통, 협력, 해석, 활용’으로 나누어 각각의 원리와 요구되는 마음가짐, 단계별 활용법 등을 국내외 사례를 들어 상세히 설명한다. 특히 국내에는 상세히 소개된 적이 없는 프로브(probes), 코디자인 워크숍(co-design workshop) 등의 협력 디자인 도구 활용법을 다루었다.
디자인 싱킹
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은 프로젝트의 목표와 제약,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새로운 아이디어로 발전시킬 수 있는 접근법을 제시한다. 기존 접근법과 차별화되는 디자인 싱킹만의 특징은 문제를 바라볼 때 단순히 현재 상태를 분석하는 것을 넘어 ‘무엇이 가능한가’에 대한 미래지향적 의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또한 아이디어를 빠르게 프로토타입으로 만들어 적용해보고 그 실현 가능성을 파악하여 수정ㆍ재적용하는 과정을 거친다. 칠레의 공공 주택 프로젝트 ‘킨타 몬로이’는 이런 접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부족한 예산 안에서 수혜자들이 진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벽을 세우고 지붕을 올릴 수 있는 이들의 능력을 문제 해결 과정의 핵심 요소로 삼았다. 정부와 공공을 위한 디자인 활용 보고서가 최근 유럽을 중심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단행본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아래 소개하는 두 권의 책에선 미흡하나마 디자인 싱킹의 실체와, 이를 통해 혁신을 이끌어낸 다양한 프로젝트를 살펴볼 수 있다. <디자인 씽킹: 아이디어를 아이콘으로 바꾸는 생각의 최고 지점>
로저 마틴 지음, 이건식 옮김, 웅진윙스, 2010
우리말 제목과는 다르게 원제는 ‘비즈니스의 디자인: 왜 디자인 싱킹이 떠오르는 경쟁력인가(The Design of Business: Why Design Thinking is the Next Competitive Advantage)’
에 가깝다. 캐나다 로트만 경영대학 학장인 로저 마틴(Roger Martin)은 이 책을 통해 디자인 싱킹이 디자인 분야를 넘어 ‘큰 그림’, 즉 경영과 전략 개발에 사용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이 책에서 소개하는 가추법(abductive thinking)과 휴리스틱 깔때기(heuristic funnel)는 디자인 싱킹이 어떤 원리로 가능성의 기회를 포착하는지 설명한다.
<디자이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이절 크로스의 생각하는 디자인>
나이절 크로스 지음, 박성은 옮김, 안그라픽스, 2013
이 책의 원제는 ‘디자인 싱킹: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일하는가(Design Thinking: Understanding How Designers Think and Work)’이다. 디자인 연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학자 중 한 명인 나이절 크로스(Nigel Cross)는 이 책을 통해 디자이너들이 사고하고 일하는 과정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F1의 수석 자동차 디자이너 고든 머리(Gordon Murray)가 더 빠른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차 뿐 아니라 정비공들의 일하는 방식과 핏스톱(pit-stop) 혁신을 통해 F1의 패러다임마저 바꾸어버린 사례는 디자인 싱킹의 정수를 보여준다.
시스템 싱킹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믿었던 접근이 또 다른 문제를 낳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엘레멘탈이 프로젝트에 뛰어들기 전 칠레 정부가 들고 나온 ‘중산층형 주택’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 제안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도시 외곽과 내부에 슬럼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주거를 직업과 수입, 교통수단 등 다양한 요소가 얽힌 구조적 문제로 보지 못한 데서 온 패착이다. 반대로 시트라의 전략 디자인 유닛은 로투노(Low2No) 프로젝트를 통해 100년 전 만들어진 소방법을 바꾸어 8층까지는 목골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단지 특정 지역에 짓는 건물뿐 아니라 앞으로 지을 수많은 건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며 잠재적으로 핀란드 산업의 첨병이었던 목재업을 키우고, 로투노의 궁극적 목표인 탄소 침수 효과를 핀란드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 문제를 구조적으로 이해하고 통합적인 해결안을 내는 데 도움을 주는 접근법이 바로 시스템 싱킹이다.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말로 번역된 책은 없지만 관심이 있는 독자들을 위해 아래의 두 책을 소개한다. < Thinking in Systems: A Primer > 시스템으로 사고하기: 입문서
도넬라 메도즈 지음, 다이애나 라이트 엮음, Chelsea Green Publishing, 2008
세계 환경 과학을 선도한 과학자이자 저술가, 시스템 분석가인 도넬라 메도즈(Donella H. Meadows)의 수업 자료를 그녀의 사후에 묶어낸 책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시스템 싱킹을 가
장 쉽게 설명한 책. 특히 사회에 한번 들인 잘못된 구조를 왜 쉽게 바꾸기 어려운지 그 이유에 대해 시스템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챕터 ‘Why Systems Works So Well’, 구조적인 문제 안에서 해결점을 찾기 위한 지혜를 주는 챕터 ‘System Traps and Opportunities’는 정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하고 싶다.
< Learning for Action: A Short Definitive Account of Soft Systems Methodology, and Its Use / Practitioners, Teachers and Students > 행동을 위한 참고서: 실무자, 교사, 학생을 위한 짧고 확실한 소프트 시스템 방법론, 그리고 그것의 사용 / 피터 체클랜드 지음, JW, 2007
경영학자이자 시스템 이론가인 피터 체클랜드(Peter Checkland)가 영국 국가 보건 서비스 개혁을 위해 오랫동안 협력하면서 개발한 방법론 SSM(Soft Systems Methodology)을 소개하는 책이다. 체클랜드는 시스템 싱킹을 현업에서 적용할 때 이해관계자들의 기대와 불만을 중심으로 한 시스템 모델링을 제안했다. 관찰과 공감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디자인 싱킹과 맞닿아 있는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소개한 책들이 모든 해답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현실은 밝혀진 부분보다 밝혀내야 할 부분이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들이 미래에 다가올 새로운 디자인을 준비하는 첫걸음이 되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책장을 넘길수록 더 이상 디자인의 대상이 심미적이고 가시적인 결과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승호
핀란드 알토 대학교 박사과정중에 있다. 동 대학에서 ‘정부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Government)’ 수업을 만들어 핀란드 행정부 프로젝트를 수주해 수행하고 있다. 2013년부터 싱크탱크 ‘데모스 헬싱키 Demos Helsinki)’의 사외 이사로 일하고 있다.
이정주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조교수. 현재 싱가포르 노동부, 정보통신개발처, 건강관리처를 비롯한 다양한 정부기관에 디자인 역량을 함양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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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를 위한 디자인 | 시리즈 기사 보기
- 정부를 바꾸는 디자인
- 킨타 몬로이 Quinta Monroy
- 주거를 위한 서비스 디자인
- GOV.UK
- 덴마크 산업 분류 코드 서비스 브랜치코드 Branchekode
- 로투노 Low2No
- 인간 중심적 사고로 정부를 돕는 싱크탱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