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건축가 마이클 옹이 디자인한 ‘도그룸’은 조형성과 기능성을 갖춘 40만 원대의 ‘디자이너 개집’이다.
하라 겐야가 <개를 위한 건축> 전시에서 선보인 D-터널은 개에게 맞는 보폭의 계단으로 연결해 인간과 눈높이를 맞추는 디자인에 초점을 맞췄다.
<월페이퍼>가 노르웨이의 건축 스튜디오 야르문/비스네스와 협업해 만든 폴더블 개집, 본 하우스.
‘디자이너 개집’의 등장
반려동물을 위한 디자인에 본격적으로 불을 지핀 건 2012년 하라 겐야가 기획한 <개를 위한 건축>이었다. 이는 콘스탄틴 그리치치, MVRDV, 소우 후지모토 등 13팀의 스타 건축가와 디자이너가 각기 다른 종류의 개를 위한 집을 13채 지어 일본, 미국, 중국을 돌며 전시한 글로벌 프로젝트였다. 전시 기획자이자 13년간 스피츠를 키워온 반려인 하라 겐야는 이 전시에서 티컵 푸들과 사람의 눈높이를 맞추는 개념에 주목한 D-터널D-Tunnel을 선보였다. 사각형, 소라, 의자, 쐐기 등 다양한 형태 내부에 계단을 설계한 시리즈였는데, 디자인의 핵심은 사람 보폭에 맞는 15cm 높이의 계단 대신 티컵 푸들의 몸체를 기준으로 바라본 낮고 작은 계단이었다. 강아지가 작은 문을 통해 위로 올라오면, 마치 하이 체어high chair에 앉은 아기처럼 역시 의자에 앉은 사람과 눈을 맞추고 ‘한몫’으로 존중받는다. 사실 하라 겐야의 진정성은 아이디어 대잔치에서 그치지 않고 이 13채의 3D 도면을 누구나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아 원하는 소재로 프린트해서 쉽게 따라 만들 수 있게 했다는 데 있다. 디자인 거장의 큰 그림은, 주인과 반려견이 DIY 집을 통해 추억을 쌓는 것은 물론, 완성품의 인증샷이 소셜 네트워크상에서 공유되며 개를 위한 건축에 더욱 많은 관심을 불러모으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 <월페이퍼>도 2012월 8월호 ‘핸드메이드’ 특집을 위해 노르웨이 오슬로의 건축 사무소 야르문드/비스네스Jarmund/Vigsnæs에 핸드메이드 개집을 의뢰했다. 이 집은 바로 이듬해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의 <월페이퍼> 부스에서 선보여 화제를 모은 ‘본 하우스Bone House’였다. CNC 밀링 기법으로 친환경 목재를 강아지 밀크 껌 모양으로 만들어조립한 개집은 노르웨이의 통나무 집을 닮았다. 이전까지 개집은 대부분 조악한 품질과 전형적인 디자인을 벗어나지 못했다.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조형성과 실용성을 갖춘 제품이 하나 둘 출시되기 시작했다. 호주의 리빙 브랜드 메이드 바이 펜Made by Pen과 멜버른에서 활동하는 건축가 마이클 옹Michael Ong이 협업한 미니어처 우든 하우스 ‘도그 룸Dog Room’은 보급형 디자이너 개집의 좋은 예다. 기본적인 개집 형태를 알루미늄 프레임으로 짠 뒤 벽과 지붕에 방수 처리한 플라이우드나 OSB 합판을 끼워 넣은 것으로, 손상됐을 경우 그 부분만 손쉽게 교체할 수 있다. 앞 문은 세로로 절반만 제작해 한쪽은 늘 열려 있게 했고, 뒤판에는 강아지 얼굴 크기에 맞는 둥근 창문이자 환기구를 냈다. 그레이, 그린, 핑크 중 고를 수 있는 매트리스까지 포함한 가격은 사이즈에 따라 각각 429달러, 499달러 정도다. “합리적인 가격대를 책정하기 위해 소재나 마감 방식의 품질을 낮추는 대신 디자인의 디테일과 제조 방식을 고민하는 방향으로 갔어요. 제품 자체를 납작하게 접히는 형태로 디자인해 버려지는 포장재를 없애고 운송이나 보관 비용을 절약하도록 한 식이죠.” 건축가 마이클 옹이 말한다.
이케아가 2017년 10월 선보인 반려동물 가구와 액세서리 라인, 루흐비그 컬렉션.
런던의 반려견 용품 브랜드 도트가 선보인 빗과 목욕 용품, 패브릭 액세서리의 프로토타입.
도쿄의 디자이너 고미야마 요의 네코는 ‘아트 갤러리에 두고 싶은 캣 타워’를 표방한다.
고양이와 강아지 본능 저격한 디자이너들
이런 변화는 다행히 개집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고양이 집이자 캣 타워, 다양한 액세서리에서도 한결 세련되고 친환경적인 디자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2017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돋보인 영국의 신생 브랜드 도트Dote는 폐기된 공업용 펠트를 사용해 고양이 집이자 놀이 기구인 월 클라이머Wall Climber 프로토타입을 선보였다. 가구 디자이너 닉 월렌버그Nic Wallenberg와 헬레나 헤덴슈타드Helena Hedenstedt가 자신들의 고양이를 위한 집을 찾다 직접 고안한 월 클라이머는 거친 펠트를 고온에서 압축한 소재로 마음껏 스크래치해도 되고, 모듈 형태라 캣 타워나 커다란 선반을 들이기 힘든 좁은 공간에도 무리 없이 설치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도쿄의 제품 디자이너 고미야마 요Komiyama Yoh가 만든 네코Neko는 거실 플로어 등에서 비주얼 모티브를 가져온 극도로 모던한 캣 타워다. “가장 현대적인 건축이나 아트 갤러리 안에 두어도 어색하지 않을 고양이 타워는 어떤 모습일까 구상해봤어요. 막혀 있지 않은 나무 발 틈새로 고양이가 보이니까 각자의 공간에 있지만 서로의 존재는 인식하기에 따로 또 같이 있는 느낌을 주죠. 고양이들이 현관문 앞에 대자로 누워서 몸의 열을 식히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캣 타워 아래 받침은 대리석으로 마감했고요.” 근사한 오브제 역할을 하는 캣 타워의 원활한 청소를 위해 나무 발은 여닫기 쉬운 문 형태로 만들었다. 1000만 원이 조금 넘는 가격의 근거는 이러한 세심함은 물론 럭셔리 반려묘 브랜드 린Rinn의 그리스산 대리석 밑받침, 덴마크 크바드라트Kvadrat의 패브릭 러그, 100년 전통의 일본산 헴프 노끈 스크래처에서 찾을 수 있다.
대량생산의 아이콘 이케아도 질세라 2017년 10월 반려동물 가구와 액세서리 라인업 루흐비그Lurvig 컬렉션을 선보였다. 기존 선반 제품에 넣어 사용하는 모듈형 수납함 칼락스를 아늑한 고양이 집으로 개조하는가 하면, 베스트셀러 3인용 소파 키플란의 미니어처 버전을 만들었다. 총 62종의 컬렉션은 스페인 발렌시아 출신의 디자이너이자 강아지 세 마리의 견주인 인마 베르무데스Inma Bermude´z가 디자인했다. “조언을 해준 숙련된 수의사인 바르바라 셰퍼Barbara Schafer 박사는 반려동물을 ‘사람화’하지 않는 게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이라 하더군요. 대신 본능적인 습성과 행동을 그대로 반영하는 데 주력했어요. 강아지는 주변 물건을 잘 씹고요, 산책 후 외부 먼지를 붙이고 들어와요. 고양이는 모든 표면을 긁어대고 냄새와 재질에 특히나 예민하고요. 그래서 무엇보다 안전하면서 오래가는 용품을 만드는 데 주력했어요.” 도넛 링 모양으로 움푹 파여 사료를 천천히 먹도록 고안한 개 밥그릇부터 고양이 화장실용 모래 삽까지 디자인한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건 펫 쿠션이다. 언뜻 보면 지퍼 달린 노트북 커버처럼 생긴 수건 천 소재의 평범한 쿠션이다. “내부 충전 솜은 쉽게 제거할 수 있는데요, 저는 솜 대신 견주의 스웨터나 담요, 수건 등 체취가 배어 있는 천 조각을 넣을 것을 추천해요. 촉감뿐 아니라 냄새까지 가장 편안한 쿠션이 될 겁니다.”
남가좌동 펫빌라 엘리베이터의 펫 버튼. 타고 내릴 때 버튼을 눌러 안에 반려견이 타고 있음을 표시할 수 있다.
용인시청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반려견 주택 단지. 현재 16가구가 입주해 살고 있다.
초인종 소리에 깜짝 놀라는 반려견을 위해 소리를 반짝이는 불빛으로 바꾼 인터폰.
반려견이 스스로 화장실을 오갈 수 있도록한 펫 도어와 미끄러운 바닥에서 관절을 보호해주는 미끄럼 방지 패브릭.
용인 반려견 주택 단지 내 한 입주민은 방 안에서도 거실에 있는 반려견과 눈을 마주칠 수 있도록 벽을 창으로 개조했다.
개집과 내 집이 굳이 따로일 필요가 있을까?
더욱 급진적이고도 근본적인 관점에서 솔루션을 제공하는 회사도 있다. 용인과 남가좌동에 각각 반려견 주택 단지와 반려견 빌라를 설계해 운영 중인 박준영 소장의 반려견주택연구소다. <개 키우는 사람은 집 구조부터 다르다>의 저자이기도 한 박 소장은 “반려견을 잘 먹이고 잘 입히는 게 능사가 아닙니다. 가족으로 제대로 대접하고 최적화된 주거 환경을 만들어주는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세심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반려동물의 부상과 스트레스에 직결된 문제니까요.”라고 강조한다. 그가 일본의 보험협회 자료에 기반을 두고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강아지 슬개골 탈구는 활동성이 극대화되는 0~5세 사이에 발생하고 증상의 70%가량이 미끄러운 바닥과 연관이 있다. 이에 반려견주택연구소는 일본에서 수입한 미끄럼 방지 코팅 시공을 솔루션으로 제공한다. 3.3㎡당 10만 원 수준으로 사람용, 실외용과 구분되는 ‘강아지 전용’ 코팅이라고 강조한다. 이 외에도 강아지가 드나들 수 있는 펫 도어가 설치된 문은 물론 야외에 설치한 세족 시설, 현관문 옆에 리드 줄을 걸어놓을 수 있는 후크, 반려동물이 타고 있음을 알리는 엘리베이터 내 ‘펫 버튼’ 등 실제로 개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필요성을 느낄 만한 시설을 갖췄다. 현관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전실에는 보통 가정집에서 보기 어려운 고기능성 이중창을 덧대고, 욕실의 배수구 또한 털 뭉침을 고려해 흔히 쓰는 직경 50mm보다 큰 75mm의 배관을 묻었다. 전기 코드 노출을 최소화하고자 천장 매립형 에어컨을 기본으로 설치하고, 낯선 소리에 불안해하는 반려동물을 위해 초인종 소리를 불빛으로 바꿔주는 비디오 폰도 갖췄다. 물론 이것만으로 솔루션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 1998년부터 각광받아온 반려견 아파트 단지의 관리 규약을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들은 입주할 때부터 반려동물의 이름과 나이, 접종 여부 등을 꼼꼼히 기재하고 잘 키우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확인하더군요. 무엇보다 자체적으로 꾸린 반려동물위원회가 있어서 각종 세세한 사안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결정하는 문화가 조성되어 있어요. 건축적 솔루션이 반, 그곳에 실제로 사는 분들의 커뮤니티가 반이라고 봐요. 국내는 이제 시작 단계니까 우선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끼리 반려견을 매개로 안정적인 커뮤니티를 만들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인터뷰 말미에 문득 ‘그런데 이렇게 내 반려동물에 맞춤으로 고안된 곳에서 살다 반려견이 죽은 다음에는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어 물었다. 박 소장은 일반 반려인은 평균 1.5마리의 반려견을 키우지만, 반려견 주택에 관심이 있는 사람(운영 중인 ‘개빌라 짓는 사람들’ 카페 회원)의 경우 평균 2.1마리로 조사되었으며 1마리가 먼저 떠나더라도 곧 다른 반려견을 입양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성실한 사전 조사에 의거한 답안이었지만 사실 듣고 싶은 건 이런 말이었는지 모른다. ‘방음이 잘되는 조용한 집, 에어컨을 천장에 매립해 생활 공간이 더 넓은 거실, 미끄럽지 않은 바닥, 서로 안부를 묻는 커뮤니티가 있는 공간은 갓난아이가 있는 집이나 몸이 불편한 어르신에게는 물론 우리 인간 모두에게도 당연히 더 좋은 집 아닐까요? 그런 집이 있으면 개가 없더라도, 아니 개가 아니라도 누구나 살고 싶지 않을까요?’ 역시나 반려동물은 인간이 기르는 게 아니라 우리를 길러주고 많이 참으며 살아주고 있음을 오늘도 깨닫는다.
■ 관련 기사
- 개와 고양이와 나 그리고 디자인
- 티어하임 베를린
- Tierheim Berlin(영문 기사)
- 반려동물과 나를 위한 궁극의 집을 찾아서
- 길고양이를 위한 건축
- 호텔 카푸치노
- 달려라 코코
- 너를 위한 똑똑한 리빙용품 10
- 21그램의 펫포레스트
- 너의 무병장수를 위한 IT 제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