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박근호, 이영호
이함 캠퍼스에서 열리고 있는 〈사일로랩 AMBIENCE〉전. 해가 물에 반쯤 잠긴 풍경을 연출한 ‘파동’은 수면 위로 잔잔하게 그려지는 동심원을 바라보며 물멍에 빠져들기에 좋다.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가 디지털 시대의 포토 존이 된 지 오래다. 초기에는 고흐, 클림트 등 누구나 알 만한 화가들의 원작을 영상으로 재구성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근래 들어서는 디스트릭트의 아르떼뮤지엄, DDP에서 열린 〈팀랩: 라이프〉전처럼 자연의 한 장면이나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 형식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공간 전체를 빛과 사운드로 채운 사일로랩의 작품 ‘풍화, 아세안의 빛’은 이러한 트렌드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다. 작품을 마주한 관람객들은 마치 ‘불멍’을 하듯 멈춰 서서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은 평균 17초 내외다. 하지만 사일로랩은 6분 간격으로 사운드와 조명의 깜박임, 밝기를 계산해 ‘풍화, 아세안의 빛’에 극적이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를 담아냈다. 그저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기승전결이 있는 미디어 아트인 셈이다. 쇼트폼 콘텐츠가 대세인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작품 같지만 ‘멍 때리기’가 뇌 건강에도 좋다고 하지 않던가. 스크린에 투사되는 미디어 아트를 짧은 시간 동안 눈으로 훑고 지나쳐버리는 것이 아닌 한자리에 오래도록 머무르도록 유도하려면 그만큼 고도화된 기획이 필요하다는 것을 사일로랩은 증명한다.
하늘의 달빛과 별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바다를 표현한 ‘윤슬’이 전시의 대미를 장식한다.
‘잔별’은 우주에서 쏟아지는 듯한 은하수를 표현한 미디어 아트다.
2021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 선보인 ‘풍화, 아세안의 빛’을 통해 잠재력을 알아본 두양문화재단은 양평에 건립한 복합 문화 공간 ‘이함 캠퍼스’를 채울 적임자로 사일로랩을 점찍었다. 그렇게 지난해 7월 정식 오픈한 개관전 〈사일로랩 AMBIENCE〉는 이들의 작품 세계를 담아낸 하나의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이곳에서 선보인 작품 7점 ‘잔별’, ‘해무’, ‘채운’, ‘칠흑’, ‘파동’, ‘찬별’, ‘윤슬’은 모두 은하수, 물안개, 저녁 노을, 오로라 등에서 영감을 얻은 결과물이다.
제주 바다에서 배를 탔을 때 멀리 보이는 등대의 불빛에서 영감을 받은 ‘해무’.
‘풍화, 아세안의 빛’. 2019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일상에서 보기 힘든 찰나의 풍경을 공간에 녹여내고자 했습니다. 여타 미디어 아트는 스크린 안에서만 움직이지만 우리는 키네틱 라이트를 사용하거나 수조를 설치하는 등 물성을 가진 소재를 활용해 공간 전반을 연출합니다.” 사일로랩은 ‘와우’ 포인트 요소로 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데 그다지 흥미가 없다. 대신 작품을 통해 어떤 감정을 이끌어낼 것인지, 사람들을 온전히 작품에 집중하게 하려면 어떤 요소를 가감해야 할지가 이들의 주된 관심사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극에 맞지 않는 이질적인 요소가 시청자의 눈에 띄면 스토리를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집중도가 떨어지듯이 감상자 입장에서 몰입을 방해하는 기술 장치의 노출을 최소화하는 것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2020년 포르쉐코리아의 전기차 타이칸 출시를 앞두고 푸른색 말이 서울 곳곳을 달리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홀로그램 시스템을 구축했다. 협업 J4D
2022년 개관한 ‘하이커 그라운드HiKR Ground’. 2층 케이팝 그라운드를 한류 테마 실감형 전시 체험 존으로 기획했다.
이제 사일로랩은 지속적으로 작품을 보여주는 상설 미디어 아트 갤러리를 조성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해 4월 리얼타임 콘텐츠 기업, 자이언트스텝 자회사로 편입된 이유도 클라이언트 작업보다 미디어 아트라는 본업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광고 아트워크를 비롯해 팝업 공간 조성, 라이팅 인스털레이션 등 커머셜 영역에서도 꾸준히 포트폴리오를 쌓은 덕분에 소규모 스튜디오 체제에서 벗어나 전문적으로 팀을 꾸려 좀 더 체계적으로 프로젝트에 대응할 수 있게 됐다.
현재 사일로랩 멤버는 20여 명으로 박근호, 이영호 작가를 주축으로 브랜딩, 설치, 기술 개발, 공간 기획 등을 분담한다. 올해는 F&B 영역으로 발을 넓혀 청담동 파인다이닝 레스토랑과 교외의 대형 카페 등지에 몰입형 미디어 아트 작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이 완결하지 못한 것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말했다. 사일로랩은 미디어 아트를 통해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자연현상을 모방하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고 있다.
벤츠 EQ 퓨처 팝업 전시관 내에 미디어 라이트 인터랙션을 연출했다.
자신을 표현하는 단어 세 가지
스펙트럼, 경계 없는, 공간 감각.
지난해 날 설레게 한 디자인
이영호(이하 이) 디즈니 플러스 다큐멘터리 〈이매지니어링 스토리The Imagineering Story〉를 인상 깊게 봤다.
박근호(이하 박) 페이스갤러리에서 열린 팀랩의 개인전 〈Massless Suns(질량 없는 태양들)〉.
올해 꼭 만나고 싶은 클라이언트
테이트 모던과 국립현대미술관 등 문화 예술에 후원하는 기업인 현대자동차.
자신과 직결되어 있다고 보는 사회적 이슈
슬로라이프 트렌드.
지난해 소비 중 가장 만족하는 것
이 디즈니 아트 컬렉션 포스터.
박 아이코스.
디자이너를 건강하게 만드는 습관
이 전시나 공간 사례를 한 달에 3곳 이상 가보기.
박 시간적 여유 갖기.
새해 계획
커머셜 프로젝트보다 미디어 아트 작업에 더 비중을 두고 작업할 예정이다.
〈사일로랩 AMBIENCE〉전 웹사이트 바로가기
- 2023 월간<디자인>이 주목하는 디자이너 15팀 - 사일로랩 서정적으로 펼쳐지는 빛의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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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디자인을 전공한 이영호와 미디어학과를 졸업한 박근호를 주축으로 설립한 사일로랩은 2013년 갤러리아 백화점 크리스마스트리 라이팅 인스털레이션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젠틀몬스터, 현대백화점 판교점, 나이키, 포르쉐, 벤츠, 현대자동차, 한화갤러리아, 아모레퍼시픽 등과 일했다. 2019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선보인 ‘풍화, 아세안의 빛’이 부산, 담양, 서울을 순회하며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사일로랩을 알렸다. 그리고 지난해 4월 자이언트스텝의 자회사로 편입되며 새 출발했다. 현재 이함 캠퍼스 개관전으로 〈사일로랩 AMBIENCE〉를 선보이는 중이다. silolab.krShare +바이라인 : 글 서민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3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