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라는 주제를 듣고 가장 먼저 떠올린 질문이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교육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배우는 입장에 초점을 두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배움에는 학생뿐 아니라 선생도 참여하지 않는가? ‘선생은 제공하고 학생은 수용한다’는 위계를 거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여러 디자인 교육자는 학생을 가르치면서 자신도 배우는 바가 많다고 말하곤 한다. 그렇다면 정확히 무엇을 배운다는 말일까?
자신이 익히 아는 바를 타인에게 설명하고 전달하려면 이를 명료한 언어로 정리해야 한다. 이렇게 암묵지를 명시지로 외화하는 과정은 몸에 밴 지식에서 편견이나 모순 같은 불순물을 걸러내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디자인을 포함한 창작활동에서는 체화된 지식을 남김없이 언어로 환원하기가 어려우니, 가르치려는 노력을 통해 역설적으로 명시지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이 한계에 부딪히다 보면, 선생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관해 겸손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문학자 프레더릭 샘슨은 제자들에게 “여러분의 무지는 얕지만 내 무지는 깊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꼭 학생을 직접 대하지 않아도, 예컨대 책을 쓰거나 온라인 강좌를 준비하면서도 얻을 수 있는 효과다. 실제 학생과 함께 공부하는 선생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내 경험을 돌아보니, 우선 새로운 폰트나 그래픽 스타일 같은 최신 트렌드를 배웠던 생각이 난다. 틱톡 같은 동영상 기반 소셜 미디어도 학생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새로운 유행이나 기술은 청년에게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지식에 속한다. 다만 그런 배움은 대체로 단편적이고 우발적이다. 그리고 일방적이다. 선생에게 도움을 주는 학생이 거꾸로 얻는 바가 없다.
분명히 해두자. 학생이 비싼 학비를 치르는 건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이지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보수를 받는 선생이 비용을 치르는 학생에게 뭔가 배우기까지 하려 든다면 학생 입장에서는 불공평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 질문에 적절한 사자성어가 있다. ‘교학상장(敎學相長)’. 배우고 가르치며 서로 성장한다는 말이다. 사자성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단 어르신들 말씀대로 이 말에 어떤 진리가 있다고 치자. 배우는 학생이 뭔가를 가르칠 수도 있다면, 그건 학생에게도 그만큼 성장의 기회가 생긴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질문은 선생의 욕심이 아니라 더 보편적인 교육의 효과를 가리키게 된다.
학생의 자발성이 요구되는 연구 활동에서는 ‘교학상장’이 사실상 요구된다.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는 학생은 자신의 연구를 지도 교수와 심사위원들에게 설명해야, 즉 어떤 의미에서는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생은 얼마간 배우는 위치에 서게 된다. 나부터도 행동의 시각 언어로서 스코어 개념이나 한국에서 나온 성 소수자 간행물의 역사에서부터 3D 그래픽을 초현실적으로 사용하기, 온·오프라인 매체의 차이를 창의적으로 해석하기, 소셜 미디어를 생산 도구로 전용하기, 기괴하고 섬뜩한 감각을 창출하고 제어하기, 소수자 혐오의 언어를 전유해 뒤집기 등 다양한 접근법을 학생들의 연구를 곁눈질하며 배웠다. 이들을 ‘가르쳤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고작해야 일정한 제도적, 물리적, 시간적 한계 안에서 학생 개개인이 사적, 비평적 관심을 계발하고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왔을 뿐이다. 자율성이 얼마간 보장되는 학교에서 한시적으로 작동하는 비평 공동체에, 선생과 학생은 일정한 기능적 역할 분담에 따라 참여한다. 이 관계에 ‘지도’라는 무거운 이름을 붙이는 건 제도의 관행이지만, 이 말에 너무 취하지 않으면 선생도 학생의 연구에서 배우는 게 많고, 학생은 능동적인 지식 생산자로서 제 역할을 인식하게 된다.
그렇다면 학부 과정에서는 학생에게 배우기가 불가능할까? 이에 대한 답은 디자인 교육의 방점을 기존 지식 전수에 두느냐, 아니면 스스로 원리를 찾고 규정하는 과정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예컨대 쓸 만한 타이포그래피의 기초는 몇 가지 규칙(추천 폰트 목록, 글자 크기와 행간·자간 등 몇몇 수치 계산법 등)을 공식처럼 외우게만 해도 어느 정도 전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교육은 가르치는 입장에서나 배우는 입장에서나 즐겁지도 않고 실제 효과도 제한된다. 스스로 발견하지 않고 그냥 외운 원리는 기억에 남지 않으며 다른 맥락에서 응용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교학상장’은커녕 ‘교학’만도 효과적으로 성취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반대로 학생 스스로 원리를 찾아 나선다면 훨씬 효과적으로 지식을 체득할 수 있음은 물론 ‘정답’을 찾아 어둠 속을 더듬는 동안 디자인에서는 여러 다른 경로를 통해 같은 원리에 다다를 수 있다는 점, 때로는 모순되는 듯한 원리들이 똑같이 타당할 수 있다는 점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면 당장은 스스로 납득하기도, 그렇다고 반증하기도 어려운 원리가 있다 해도 건강한 회의를 품은 채 일단 비판적으로 존중하고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안내하고 지켜보는 선생은, 스스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지식을 배우거나 단순히 외워두기만 했던 지식을 재검토하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처음에 던진 질문이 어쩐지 우문 같다. 우리가 해야 하는 질문은 오히려 이게 아닐까. “선생님은 학생에게 충분히 배우고 계신가요?”
최성민은 최슬기와 함께 ‘슬기와 민’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를 가르친다. sulki-min.com
- 잃어버린 배움을 찾아서 디자인을 가르치는 선생은 학생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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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성이 얼마간 보장되는 학교에서 한시적으로 작동하는 비평 공동체에, 선생과 학생은 일정한 기능적 역할 분담에 따라 참여한다. 이 관계에 ‘지도’라는 무거운 이름을 붙이는 건 제도의 관행이지만, 이 말에 너무 취하지 않으면 선생도 학생의 연구에서 배우는 게 많고, 학생은 능동적인 지식 생산자로서 제 역할을 인식하게 된다.Share +바이라인 : 글 최성민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3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