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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잃어버린 배움을 찾아서 Next Level: '재학생 유지율'과 '취업률' 너머, 디자인 교육의 광야에는 구원이 있을까?
이 광야에서 창의적인 우물을 발견한 대학은 소문이 날 수밖에. 이야기는 힘이 세다. 그렇게 본질을 향해 깊게 판 창조적인 우물 몇 개만 남을 것이다.

I’m on the Next Level
2017년 9월 1일, 나는 동양미래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조교수로 첫 출근을 했다. 신임 교원으로 참석한 교수학습개발센터 주관 세미나는 재학생들의 학생 유형 검사 결과 통계자료를 제공하며 우리 대학 학생들의 특성에 맞는 교수법으로 가르칠 것을 독려하는 자리였다. 전문대 학생, 그들은 누구인가. 주어진 통계자료는 이들 대부분의 학습 유형이 다음과 같다고 설명한다. “순수한 내적 호기심 보다는 외적 동기에 의해 공부하며, 전체적이기보다는 순차적으로 학습 정보를 습득하고, 학습 내용의 가치보다는 실제 적용 가능성을 중시하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보다는 재생산하는 과제에 높은 수행성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쉽게 말하자면 학습계의 MBTI 같은 거다. 순간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어라, 내 방식대로 가르쳤다가는 학생들을 망치겠는걸?’

절대적 룰을 지켜
이때부터 나는 학생 특성에 맞게 학습 모듈을 잘게 쪼개기 시작했다. 5주 이상 걸리는 과제물보다 2주에 한 번씩 체크할 수 있는 분량의 과제물, 학생들의 일상생활에서 실제 적용할 수 있는 실습 예제, 기존 디자인 모범 사례를 참고해 재생산하는 과제를 설계하는 일이다. 정보 습득 과정에 비약적 도약이 일어나지 않도록 인과 관계를 세분화해 설명하고 더 많은 사례를 제공한다. 구인구직 웹사이트를 찾아보고 학생 개개인의 ‘사람인’과 ‘잡코리아’ 찜하기 목록을 함께 검토한다. 연습 게임이니까 무조건 지원해보자며 학생의 등을 떠밀어준다. 그런 식의 지도에 도가 틀 무렵, 업계 전문 용어인 ‘재학생 유지율’과 ‘취업률’의 의미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교육부가 대학을 평가하는 두 가지 핵심 지표를 관리함으로써 대학은 입학 경쟁률을 높이고 ‘생존’할 수 있다는 것. 대학이 이 두 가지 지표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입학한 학생이 자퇴하지 않도록 쉽게 가르치고 취업으로 이어지도록 교수를 적절히 평가하고 독려해야만 한다.

광야로 걸어가
그렇게 2년이 지나고 나는 2019년 대학에서 강의 평가가 우수한 교원에게 수여하는 우수 강의 교수상을 수상했다. ‘나다움’을 버리고 ‘전문대다움’이라는 통계자료에 맞춰 설계한 수업이 안겨준 수상이다. 퇴직 전까지 단 한 번만 주어지는 상이라는데 어쩐지 만족스럽지 않다. 일단 쉽게 가르친다는 건 성공한 듯한데 쉽게 가르친다는 게 대체 뭘까? ‘전문대 학생’의 평균이란 무엇일까? 재학생 학습 유형 통 계자료가 평균이 실종된, 지극히 개인화된 Z세대와 접속하(고 싶어하)는 코드 넘버로 제공된 것이라면, 그 코드는 허무 할 수밖에 없다. 대학 평가 지표는 대학의 존립에 기본이 되는 자격 시험 같은 것이니 잘 관리해야 하는 것은 맞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분명히 무언가 중요한 게 빠져 있다.

알아 네 Home Ground
요즘 학생들에게 없는 건 ‘궁금증’이다. 학생들에게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다. “학교 정문 앞에서 대중교통을 타면 20분 만에 홍대입구역에 도착한다. 전시장, 서점, 카페, 무엇이든 문화예술 경험을 많이 해보라고 권유해도 잘 가지 않더라. 왜 가지 않는 걸까? 궁금하지 않은가?” 학생들은 ‘주중에는 들어야 할 수업이 많고, 방과 후에는 매일 다음 날 수업에 제출할 과제를 하고,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 답했다. 눈앞에 주어진 것을 성실히 수행하기에도 벅찬 생활이다. 인천, 광명, 부평, 부천 등 서울 서남부에 인접한 경기권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은 주중에는 서울 끝자락에 위치한 구로구 고척동까지 수업 들으러 왔다가 돌아가기 바쁘고, 주말에는 자신의 생활권에서 아르바이트하느라 밖으로 나올 일이 없다. 대학은 ‘인 서울’ 로 입학했지만 학생들의 삶의 좌표는 결국 생활권역으로 회귀한다. 이는 취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직주 거리 계산은 자신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디자인 회사일지라도 집에서 너무 멀면 취업을 고사한다. 디자이너 초봉이 서울에서 1인이 생활하는 주거 비용까지 감당할 만큼 여유롭지 않은 것도 이유다. 서울 중심, 4년제 대학 중심, 중산층 중심 사고에서 나오는 편견을 벗어던지고 학생들의 삶으로 들어가니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있었다.

위협에 맞서서 제껴라
4년제와 2년제 시각 디자인 커리큘럼을 비교하면 학습 완성 단계에서 요구하는 디자이너의 전문성에는 차이가 없다. 전문대학교 시각디자인과에서는 짧은 시간 내에 충족시켜야 할 시수(*)가 많고 필수 교과목이 거의 정해져 있어 수강하는 과목의 선택 폭이 적을 뿐이다. 실험적인 디자인 교과목은 빼고 실용적인 교육으로만 채우기에도 바쁘니까. 그러나 학생들이 무엇을 궁금해할지 이야기를 나누면 이들은 의외로 반가워한다. 궁금증의 존재를 아는 순간 답이 궁금해지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그렇게 학생들 한 명 한 명을 ‘나답게’ 만나기 시작했다.

저 너머의 문을 열어 
10년 전쯤인가, 어떤 분이 회사에서 만든 브로슈어를 보여주며 내게 의견을 구했다. BTB 제품이라 일상에서 접할 수도 없는 어떤 부품에 대한 설명서였다. 나는 오만하게도 “이런 건 디자인이 아닙니다” 같은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그런’ 장르를 디자인 생태계 지도에 포함시키지는 않는다는, 인식의 편협함을 드러낸 말이었다. 지금 우리 학생 들은 ‘그런’ 브로슈어를 만들고 있다. 나의 타이포그래피 수업의 종착지는 ‘그런’ 지면의 레이아웃이다. 아직도 익스프레스를 쓰는(존재한다!) 신문사 조판 팀에서 일하다 ‘선취업 후진학’ 트랙으로 공부하러 온 학생도 있다. 나와 학생들은 ‘사람인’에 접속해 집에서 가까우면서 작지만 강한 강소기업, 중소기업 디자인 취업처를 찾아 눈에 불을 밝힌다. 그곳에 취업한 우리 학생들은 ‘그런’ 브로슈어를 디자인한다. 나한테 타이포그래피를 배웠으니 그 많은 ‘그런’ 브로슈어가 얼마나 읽기 좋아졌을까 상상해본다. 조만간 찾아오겠다는, 충무로 편집디자인실에서 일하는 졸업생이 꼭 작업물을 가지고 와줬으면 좋겠다.

난 궁금해 미치겠어 이 다음에 펼칠 Story
재학생 유지율과 취업률로 선방할 순 있지만 본질을 채워줄 순 없는 이 게임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건, 결국엔 ‘스토리’다. 학생들 개개인의 삶에 대한 이해에 기반해 개인화된 궁금증을 발명하고 나만의 Next Level에 도전해 성취하는 이야기. 승부수를 둘 만한 곳은 오히려 이 정성적인 영역이다. 이 광야에서 창의적인 우물을 발견한 대학은 소문이 날 수밖에. 이야기는 힘이 세다. 그렇게 본질을 향해 깊게 판 창조적인 우물 몇 개만 남을 것이다. 무엇에 시간과 정성을 쏟을 것인가? 학생들이다. 그들의 삶이다.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지탱되는 디자인 선진국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광야의 신기루가 아니기를. Next Level 제껴라 제껴라 제껴라.


(*) 교육법 시행령에 의거해 각 교과목을 이수하는 데 소요된다고 결정한 시간 단위.




동양미래대학교 시각디자인과에서 타이포그래피, 편집출판디자인을 가르친다. 제7대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학술출판이사로 활동하며 학술, 디자인 현장, 교육 생태계의 문제의식을 대내외로 공유하기 위해 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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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글 김린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3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