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W 그룹 안에는 BMW, 미니, 롤스로이스라는 3개의 브랜드가 자리한다. 고유한 헤리티지를 가진 각 브랜드를 BMW 그룹이라는 우산 안에서 연결하고, 큰 그림을 그리며 같은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부서가 바로 BMW 디자인웍스다. 이곳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이정훈 디자이너는 TUI(Tangible User Interface) 디자인부터 디지털 경험 디자인까지 총괄한다. 자율주행차와 메타버스 영역을 넘나드는 그를 통해 미래 모빌리티 디자인을 미리보기했다. bmwgroupdesignworks.com
미국 디자인 컨설팅 회사 티그Teague와 독일의 테크 컴퍼니 브라기Bragi에서 디자이너로 경력을 쌓았고 산업 디자이너 컬렉티브 ‘12monthly’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2016년 BMW 디자인웍스에 시니어 디자이너로 합류한 뒤 리드 디자이너를 거쳐 올해부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다.
BMW 디자인웍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이정훈
원래 자동차 디자인에 관심이 있었나?
관심사가 워낙 다양했다. 내게 맞는 분야를 찾기 위해 대학을 두 번이나 졸업했으니까.(웃음) 처음에는 패션디자인학과에 입학했다가 다시 수능을 보고 도자공예과로 진학해서 시각 디자인을 부전공으로 졸업했다. 이후 SADI에 다시 입학해 제품 디자인을 전공하며 삼성 디자인 멤버십에 참가했다. 자동차 디자인을 따로 공부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경로로 습득한 디자인 방법론과 문제해결 방식이 지금까지 도움이 되고 있다.
BMW 그룹 입사 전에는 보잉 777X의 실내 디자인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첫 직장인 티그의 독일 뮌헨 지사에서 맡은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티그는 창립 초기부터 보잉사와 협업해온 터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보잉사에는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없어서 티그의 직원 100여 명이 보잉 본사에 출근해 디자인 업무를 했다. 내가 담당했던 영역은 보잉 777X의 실내 공간과 승무원 좌석 디자인이었다. 곡선형 커브를 활용해 공간감을 극대화하고 천장에 프로젝션을 투사해 정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디자인을 구현했다. 기체 공간은 디자인 개시 시점으로부터 최소 10년은 지나야 상용화되는 터라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적합한 소재와 형태를 반영한 최적화된 공간 디자인을 제안하더라도 수많은 안전 요구 사항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긴 시간 티그에 있으면서 전 과정을 지켜봤으면 좋았겠지만 1:1 스케일의 프로토타입이 나올 무렵 감개무량한 순간을 뒤로한 채 이직하게 됐다.
브랜드별로 메타버스 플랫폼을 특색 있게 경험할 수 있도록 2021년부터 추진해온 미니 버스(위), BMW 조이 토피아 프로젝트.
2016년 BMW 디자인웍스에서 시니어 디자이너로 새롭게 출발했다.
티그와 브라기에서 일하면서 보잉 777X 외에도 다양한 가전제품과 전자 디바이스를 디자인했다. 동시에 뜻이 맞는 디자이너들과 ‘12monthly’ 활동을 병행하며 회사에서 다룰 수 없는 실험적인 주제로 제품 디자인 아이디어를 선보였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품 디자인이 이성적인 접근으로 솔루션을 찾는 것에 가깝다면 운송 디자인은 감성을 더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BMW 디자인웍스는 BMW, 미니, 롤스로이스 등 각기 고유한 헤리티지를 가지고 있는 BMW 그룹 산하 브랜드를 연결하고 미래 트렌드를 선도하는 제품을 개발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면접 때 제품과 운송 디자인을 두루 경험한 내가 BMW 디자인웍스에서 일한다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피력했다.(웃음)
매번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다 보면 쉽게 지칠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래 일하는 비결이 있나?
각 브랜드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인풋이 있어야 하기에 전략적으로 외부 회사와 디자인 협업을 진행한다. 포르쉐, 메르세데스-벤츠, 포드, 폭스바겐 그룹이 2017년 설립한 합작회사 아이오니티Ionity와 함께 개발한 유럽 전기차 초고속 충전소 디자인, 대만 에바 항공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 디자인, 2028년 상용화를 목표로 두바이에서 아부다비까지 연결하는 초음속 진공관 자기부상 열차 ‘하이퍼루프’ 내부 캡슐 프로토타입 디자인 등이 모두 협업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도 지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
MINI 비전 어바너트. 지난 4월 킨텍스에 열린 2023 서울모빌리티쇼에서 아시아 최초로 공개해 눈길을 모았다.
BMW i 인터렉션 EASE. 자동차라기보다 안락한 셸터를 연상시킨다.
이를테면 어떤 프로젝트가 BMW의 미래 비전을 제시했나?
CES 2020에서 발표한 ‘BMW i 인터렉션 EASE’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싶다. ‘Change Your Perception’을 슬로건으로 한 이 프로젝트는 자율주행차의 미래를 상상하도록 한다. 차량 외형을 심플하게 디자인한 의도는 내부 공간에 더욱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차는 단순히 승객을 목적지로 데려다주는 이동 수단에서 나아가 AI를 활용해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모빌리티가 된다. 이듬해 뮌헨에서 열린 ‘디지털 라이프 디자인 서머 콘퍼런스’에서 실물 공개한 ‘MINI 비전 어바너트’도 빠질 수 없다. ‘느긋함(Chill)’, ‘여행(Wanderlust)’, ‘분위기(Vibe)’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미니의 순간(MINI Moments)’로 정의하고, ‘방향 없는(Directionless)’이라는 콘셉트로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하는 최적의 공간과 탑승 환경을 디자인했다. 지속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재활용 소재를 적용하고 감각을 자극하기 위해 향과 소리까지 제안한 프로젝트였다.
보통 이러한 프로젝트는 어떤 프로세스로 진행되나?
양산을 담당하는 팀과 긴밀한 협업을 한다. ‘MINI 비전 어바너트’도 MINI 양산팀과 함께 아이디어를 주고받았다. BMW 디자인웍스 소속 디자이너들이 각자 본인의 아이디어를 발표하면 피드백이 오가고 일정 시점이 되면 의견을 하나로 모은다. 최종 선정 아이디어를 제안한 디자이너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콘셉트를 발전시키는 식으로 업무를 진행한다.
디지털 인터랙션을 강조하는 BMW 그룹의 BMW i 비전 Dee는 MX 기술을 통한 몰입형 주행 경험을 제공한다. QR 코드를 이용해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메타버스를 모빌리티에 접목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라고.
얼마 전 CES 2023에서 선보인 ‘BMW i 비전 Dee’는 BMW의 비전 ‘Digital Emotional Experience’의 방향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프로젝트다. 이 비전의 앞 글자에서 코드명 ‘Dee’를 따왔는데 비밀을 하나 공개하자면 우리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디렉터의 닉네임이기도 하다.(웃음) ‘BMW i 비전 Dee’는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BMW의 브랜드 DNA를 이어가면서 혼합 현실(mixed reality)을 다채롭게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차세대 모빌리티다.
디지털화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차 내·외부에는 꼭 필요한 요소만 남게 된다. 형태가 단순해지는 대신 인간이 감각하는 경험의 폭은 더욱 확장된다는 콘셉트를 제시하고자 했다. 이와 함께 메타버스를 통해 사용자와 손쉽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확장하는 여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BMW 조이 토피아’와 ‘미니 버스MINI Verse’ 등이 현실과 가상 세계의 경계를 허무는 메타버스 플랫폼의 예시다. 내부 보안 때문에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각 브랜드만의 정체성을 담아내고자 여러 가능성을 시도하고 있으니 기대해달라.
마지막으로 모빌리티 디자인의 미래를 예측해보자면?
자율 주행 기술과 공유 경제로 인해 스타일링보다 모빌리티 경험 디자인이 중요한 시대가 왔다. 사용자들이 차 안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 디자이너들은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공유화된 모빌리티에 각 사용자의 개성을 맞춤형으로 담아낼 수 있는 방법, 주행 중 제공되는 정보와 인터랙션 범위 등에 대한 고민이 수반되어야 하지 않을까? 집이 주는 안락한 경험이 모빌리티로 확장될 것이고 소유라는 개념 또한 희박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차량을 소유함으로써 부유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장은 그대로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 모빌리티 4.0시대를 질주하는 한국인 디자이너들 인간과 감정을 교류하는 모빌리티 상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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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개념이 근본부터 흔들리는 요즘, 자동차 기업들은 잇따라 모빌리티 기업으로 전향을 선언하며 격변의 파도를 타고 있다. 사실 그 방식은 제각각이다. 모빌리티의 범주 안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되레 오랜 세월 축적한 전통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세계적인 모빌리티 기업에서 활약 중인 한국인 디자이너들에게 변화에 대처하는 그들만의 방법에 대해 들어보았다.Share +바이라인 : 글 서민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3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