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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정재완x정윤천 아파트 기록의 오래된 미래
우리나라 아파트의 평균 수명은 30년. 낡은 아파트를 부수면 그 자리에 새로운 아파트가 다시 들어선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한 생애에 여러 번 정든 집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오래된 아파트를 사진과 글, 다양한 매체로 기록하는 것은 누군가의 소중한 유년 시절을 간직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아파트가 더 나은 집으로, 더 살기 좋은 건축으로 나아가기 위한 참고서가 되기도 한다. 정재완은 오래된 아파트 외벽에 그려진 글자를 관찰하고 기록해 책 〈아파트 글자〉를 만들었다. 정윤천은 서울 여의도 시범아파트의 50여 년 역사와 기록을 토대로 〈일상화된 건축의 관찰과 기록〉전을 열었다. 이들의 기록은 아파트를 수단이나 상품으로 여기는 거시사가 아닌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역사, 주민들이 오래 지켜보고 겪어온 풍경을 누락하지 않은 다정한 미시사에 가깝다. 아파트 외벽에 그려진 조금은 촌스러운 글자와 여의도 시범아파트의 사적인 풍경 속에서 우리나라 아파트의 역사와 건축으로서의 가치를 흥미롭게 짚어봤다.


(왼쪽) 정윤천 홍익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맥길 대학교 건축 역사 및 이론 프로그램의 디렉터인 알베르토 페레즈 고메즈박사의 지도로 건축의 언어와 분위기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한국, 미국, 프랑스, 캐나다 등에서 다양한 규모의 건축설계 프로젝트를 맡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건축설계와 이론을 가르친다.

(오른쪽) 정재완 영남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졸업 후 정병규출판디자인과 민음사 출판그룹에서 북 디자이너로 일했다. 현재 출판사 ‘사월의눈’에서 사진책 디자인을 도맡고 있다. 거리 글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학생들과 함께 타이포그래피와 북 디자인을 공부한다.
정재완 출판사 사월의눈에서 책 〈아파트 글자〉를 펴내면서 아파트에 관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에도 거리 글자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어요. 이런 흥미가 2009년에 전가경 대표와 함께 대구로 내려가 살면서 아파트 글자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된 것 같아요. 대구는 아무래도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낮아서 5~10층 정도 되는 아파트의 글자가 서울보다 더 눈에 잘 들어와요. 그중 하나가 1982년도 초기에 지은 경북아파트의 글자였어요. 당시에는 아파트 외벽에 글자를 쓰기 위한 재료로 페인트가 유일했기 때문에 벽면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효과를 주기 위해 테두리를 넣어서 입체적으로 그렸어요. 아파트 글자에서는 당대의 미감뿐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역사적 배경 등 여러 가지를 읽을 수 있다는 것에 매료됐죠. 그때부터 대구, 부산, 전주 등의 지역을 다니며 아파트 글자를 모았고, 이후에는 글자 모양을 넘어서 테라스, 베란다 등 아파트 구조까지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정윤천 저는 서울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연구하고 〈일상화된 건축의 관찰과 기록〉전을 기획하기 전부터 이 아파트의 오랜 주민이었습니다. 건축설계와 건축 연구에 집중하다 보니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점, 당시 지은 주공 아파트와는 사뭇 결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처럼 여의도 지역과 시범아파트가 건축적으로 독특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도 여의도에 관한 이야기가 활발히 거론되지 않기에 직접 연구하기로 했죠. 보통 아파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어요. 이를테면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하고 저녁에 가족과 식사하고 TV를 시청하는 것이 전형적인 이미지죠. 그래서인지 한국에서 아파트는 건축 영역이라기보다 단순한 생활 공간으로만 다뤄진 것 같습니다. 아파트가 부동산 상품으로 비치는 현상을 그다지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진 않지만, 주거 문화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잖아요. 아파트와 건축의 접점을 새롭게 탐구하기 위해서, 마침 제가 오랫동안 머물며 지켜봤던 서울 여의도 시범아파트의 50년 역사를 기록하고 전시한 것이에요.



여의도 시범아파트 정문에 세운 붉은 벽돌의 조형 탑.

여의도 시범아파트 외관.
정재완 아파트 글자와 사진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기록이라는 행위의 이중성을 엿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번듯하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사물을 기록하진 않더라고요. 그보다는 시대에 다소 뒤떨어진 것을 완전히 없애기 전에 기록을 시작하곤 하죠. 제가 참여한 모 지역의 아카이브 프로젝트가 있어요. 시 차원에서 지역의 재개발을 추진했고 동시에 해당 지역을 기록으로 남기는, 언뜻 보면 모순적인 일을 진행했어요. 당시 재개발을 부정적으로 여긴 저는 ‘차라리 이 마을을 재개발하지 않고 보전하면 안 되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미 마을 사람들도 잘살고 있으니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인프라를 고민하는 게 더 현명해 보였던 거죠.

동시에 기록이라는 행위가 개발의 알리바이를 만드는 수단이 되는 것만 같았어요. 국가기록원의 자료만 봐도 시민 입장에서 그것을 기록하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누군가의 구술을 아카이빙할 때도 마을에 사는 동네 사람보다 권위 있는 유명 인사의 말을 남기고요. 정윤천 교수가 기획한 전시의 제목 ‘일상화된 건축의 관찰과 기록’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기록물이 더 흥미롭고 다양한 이야기를 내포한다고 봐요. 저 역시 처음에는 거리의 글자를 단순히 재미를 위해 수집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니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다양한 의미가 생성되더라고요.

정윤천 맞습니다. 어쩌면 기록은 그 자체로 권위적인 행위일 수 있어요. 과거 식민 지배 시절 일본이 우리나라를 기록한 자료를 보면 그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향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죠. 기록할 때 누가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내용도 완전히 달라져요. 이러한 이유로 〈일상화된 건축의 관찰과 기록〉전에서 저의 시선만 담지 않고 텍스트, 이미지, 드로잉 등 다양한 매체를 다루는 작가들의 시선을 함께 담았어요. 전시에 참여한 사람들이 공통적인 주제를 말하면서도 서로 어긋나거나 충돌하는 부분이 있었죠. 그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관람객들이 여의도 시범아파트의 이야기를 통해 단순한 아파트가 아닌 건축을 느끼길 바랐어요.



〈아파트 글자〉 표지. 자료 제공 사월의눈

〈아파트 글자〉에 수록된 대구 신세계타운아파트. 자료 제공 사월의눈
정재완 정윤천 교수의 말씀을 들으니 떠오르는 문장이 있습니다. “파리의 진정한 자랑거리는 물리적 외형이 아니라 파리 사람들이 그곳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벤 윌슨Ben Wilson은 그의 저서 〈메트로폴리스〉에서 프랑스 파리가 강압적인 계획으로 설계된 도시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방식대로 아름답게 변했다고 말했습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 역시 건축가가 초반에 설계해놓은 틀이 있었겠지만, 주민들이 오랜 시간 살면서 그곳을 삶의 방식에 맞게 변화시킨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희가 사진 촬영을 위해 여의도 시범아파트에 들렀을 때 유심히 살펴봤는데요. 베란다를 확장하기도 하고, 아파트 벽면을 다 터서 공간을 마음껏 활용하는 세대도 있더라고요.

정윤천 그렇죠. 저 역시 건축물에 시간이 쌓이면서 사용자에 의해 변화하는 것이 비로소 건축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저는 〈아파트 글자〉 앞부분에 나온 ‘유토피아 아파트’의 이름이 참 인상적이더라고요. 사람들이 그 이름을 보면서 저마다의 유토피아를 떠올리고 시적인 상상을 하게 될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건축물에 이름을 붙이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또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이니까요.

정재완 과거에는 사람들이 거대한 콘크리트 아파트의 모습이 낯설었기 때문에 ‘개나리’, ‘백합’ 같은 친숙한 꽃 이름을 붙여 정감이 가도록 했다고 해요. 하지만 이제 도시에서 아파트는 전혀 낯선 존재가 아니기에 그런 미감이 필요 없어진 거죠. 한편 건축 자체가 이름이 된 사례도 있습니다. 건물 벽을 타일로 마감했는데, 그것을 계획적으로 배열해 마치 픽셀 글자처럼, 이름과 건물이 한 몸을 이루도록 설계한 것이죠. 저는 건축물이 완성된 다음에 이름을 붙인다고 생각했는데, 재료의 크기와 건물 구도가 서체와 딱 들어맞는 이 사례를 보면서 건축과 이름이 일체가 될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아파트 글자〉에 수록된 유토피아 아파트. 자료 제공 사월의눈
정윤천 그와 비슷한 사례로 한 건축가는 알파벳 모양으로 건물을 짓기도 했어요. 위에서 내려다보면 알파벳 모양이고, 그 안에 방을 설계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좀 유치할 수도 있지만요. 정재완 교수의 책을 보면서 특히 궁금했던 것이 스케일이었어요. 책의 스케일인지, 아파트 같은 대형 건축물의 스케일인지에 따라 타이포그래피 작업도 달라지는지요? 책에 쓰는 글자와 다르게 사람보다 더 큰 건물에 글자를 쓴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건축적인 작업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정재완 〈아파트 글자〉에서 윤민구 디자이너가 유영욱 아파트 외벽 도장공과 인터뷰한 대목이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윤민구 디자이너 입장에선 두 매체가 서로 다르니까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접근법이 전혀 다를 것이라 예상했는데 막상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글자를 그리는 작동 방식이 거의 유사했다고 해요. 단지 외벽에 매달려 페인트로 글씨를 쓰느냐, 컴퓨터 앞에 앉아서 프로그램으로 글자를 그리느냐의 차이만 있었다는 거예요. 글자를 그리는 일은 매체가 달라져도 원칙적으로는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봅니다.

정윤천 1970~1980년대에 미국 라스베이거스가 번화하기 시작하면서 광고판이 건축물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어요. 자동차의 속력으로 거리를 달릴 때 길을 따라서 쭉 광고판이 보이도록 한 것이죠. 건축물보다 전면에 나선 간판이 건축의 새로운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어요. 아파트도 마찬가지로 그 건축물을 인식하게 하는 간판이 있고 그 뒤에 거대한 주차장이 있고 건물이 있잖아요. 사람이 공간을 지향하는 속도와 방식이 바뀌면 건축물의 모습도 달라지는 걸 볼 수 있어요.



‘여의도 시범아파트 읽기’, 김지애, 〈일상화된 건축의 관찰과 기록〉전. 자료 제공 정윤천

‘상상된 삶의 모습과 변화하는 건축’, 정윤천, 〈일상화된 건축의 관찰과 기록〉전. 자료 제공 정윤천
정재완 머지않은 미래에 드론이 교통수단으로 활성화되면 아파트 맨 꼭대기에 이름을 써야 할 수도 있겠네요. 공중에서 아파트 건물을 분간할 수 있도록 말이죠.(웃음)

정윤천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움직이는 방식이 달라지면 아파트 글자의 위치나 폰트도 그에 맞게 변할 테니까요. 아파트가 지금보다 더 높아지면 과연 어디에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도 고민하게 될 거고요. 저는 〈일상화된 건축의 관찰과 기록〉전을 준비하면서, 사람들이 예전에 살았던 모습 자체가 앞으로 건축을 설계하는 데 도움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단순히 사업화된 부동산 가치만을 따져서 아파트를 짓는 게 아니라, 아파트라는 주거 환경의 세밀한 장면과 그에 대한 기록이 더 큰 가치를 발휘하길 바랍니다.

요즘 건축업계에서 큰 이슈 중 하나가 아파트 단지에 일정 부분 공공 임대 주택을 포함시키는 것이잖아요. 재개발을 준비하는 단지에서는 이를 아파트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거세게 반대하기도 하고요. 아파트가 점점 폐쇄적인 단체가 되어가는 데 반해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오래전부터 열려 있는 장소였어요. 누구든 들어와서 무성한 나무 사이를 산책할 수도 있고요. 또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은 아파트가 낡았어도 여전히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필요한 부분을 고쳐가면서 살기 좋은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어요. 이런 모습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으면 기존 아파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와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정재완 동의하는 바입니다. 앞으로 아파트 분야에서도 좋은 건축가들이 목소리를 많이 내주면 좋겠어요. 아파트가 점차 노후하면서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가 배관이라는 것을 어디선가 본 적 있어요. 아파트가 낡았을 때 오래된 배관을 좀 더 손쉽게 교체할 수 있도록 대안을 마련하면 좋을 것 같아요. 마치 퐁피두 센터의 외피처럼요. 제가 엄청난 환경주의자는 아니지만 이 많은 아파트를 짓고 부수는 과정에서 발생한 건축 폐기물이 대체 얼마나 될지 생각하면 끔찍해요. 지금 대구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고요. ‘아파트를 짓지 말자, 아파트는 흉물이다’라는 식의 담론은 이제 유효하지 않은 것 같아요. 아파트를 짓되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건축설계와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봐요.




정윤천 여의도에 서울아파트라는 곳이 있어요. 1970년대에 지은 거라 거의 50년이 다 됐는데, 한강 변에 있어서 시끄럽지도 않고 주민 간의 커뮤니티도 좋은 편이에요. 이렇게 살기 좋은 아파트에서는 웬만하면 재개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요. 하지만 서울아파트 같은 사례는 드물고, 많은 사람이 아파트를 부동산 관점으로 바라보죠. 게다가 한국의 아파트 역사를 보면 예전부터 자기 돈 들이지 않고 아파트를 재개발했어요. 그런 인식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아파트를 제 돈 들여 고칠 생각은 잘 하지 않는 것 같아요. 하지만 서울아파트의 사례처럼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정말 좋다면 직접 투자해 집을 고쳐서 충분히 오래 살 수 있다고 봐요.

정재완 그리고 일상으로부터의 기록이 여러 겹 쌓일수록 건축과 도시의 관계를 좀 더 깊이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정윤천 교수가 유토피아 아파트를 보고 시적인 감흥을 느낀 것처럼 건축과 글자는 어떤 공간과 장소의 큰 힌트가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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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글 백가경 객원 기자 담당 정인호 기자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3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