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재(왼쪽)와 홍은주(오른쪽).
불과 4~5년 사이 을지로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고층 신식 건물과 호텔이 하나 둘 생겨나며 지역 의 얼굴을 바꿔나간 것. 실제로 대로변을 걷다 보 면 테헤란로를 거닐 때와 비슷한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이곳을 지나 조금만 더 깊숙이 골목 안 으로 들어오면 낡은 건물들이 길게 늘어선 인쇄 소 단지가 나온다. 이것이 을지로의 진짜 모습이 라고 느끼는 건 너무 낡은 생각일까? 그래픽 디자인 듀오 김형재ㆍ홍은주의 스튜디오는 이 오래된 인쇄소 단지 안에 있다.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2010년. 초기에는 여러 디자이너들과 테이블을 공유하는 수준이었는데, 당시 멤버는 그래픽디자이너 신덕호와 신동혁, 사진작가 김경태 등이었다. 해가 지나며 멤버들이 하나 둘 새 사무실을 얻어 떠나고 결국 두 사람만 남아 이곳을 지키게 된 셈. 을지로에 스튜디오를 얻게 된 이유를 묻자 홍은주는 절반의 로망과 절반의 현실 감각이 적절히 작용한 결과라고 답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저와 달리 김형재 씨는 서울 토박이에 종로통이기도 했어요. 서울극장에서 을지로3가까지 이어진 길을 좋아했고 인쇄소 골목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것도 있었죠.” 상대적으로 저렴한 임대료와 종로, 명동, 광화문이 모두 5분 거리에 있다는 지리적 이점 역시 을지로의 장점이었다. 실제로 을지로 일대엔 예술가와 디자이너의 사무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고.
일찍이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참여하는 사람은 기록하지 않고, 기록하는 사람은 참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홍은주는 을지로 일대로 소위 ‘출사’를 나온 사진 동호인들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그런 이질적 정서가 흥미롭다고 말한다. 자신들에겐 생활권이자 일상인 공간이 누군가의 눈엔 낯설고 독특한 풍경이 된다는 사실을 종종 깨닫는다는 것이다. 김형재는 을지로의 ‘참여자’이자 ‘기록자’이다. 2014년의 도시문자탐사단을 예로 들 수 있는데, 타이포잔치 2015 프리 비엔날레로 진행한 이 행사에서 그는 자신이 소속된 또 다른 팀 옵티컬 레이스(Optical Race)를 통해 을지로 일대를 들여다보았다. ‘페이퍼 시티(Paper City)’라는 이름의 이 프로젝트는 을지로를 비롯해 퇴계로, 종로 등 인근 도심 일대에 스폿을 선정한 뒤, 그 지역 등기부를 열람해 도시 행위자들의 타임라인을 상상해 보는 것이었다. “을지로는 일제 강점기 이후 다양한 역사가 축적된 지역입니다. ‘페이퍼 시티’는 부지 소유권을 둘러싼 오랜 분쟁부터 최근의 재개발 동향까지 다양한 도시의 궤적을 문서를 통해 추적해보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이들의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는 인쇄소 건물은 과거와 현재의 경계선에 놓여 있다. 불과 몇 년 사이 이 일대엔고층 건물이 3채나 들어섰는데 건물 옥상에 올라가면 바로 코앞에 호텔 건물이 서 있다. 재개발이란 가파른 변곡점이 턱밑까지 밀고 들어온 셈. 하지만 변화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담담하기만 하다. “이 지역을 재개발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1970년대부터 있어 왔어요. 실제로 수많은 정책가들이 이곳을 재개발하고 싶어 했죠. 하지만 누구도 이뤄내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일이 어렵다는 방증 아닐까요? 언젠가 이 도시의 풍경도 바뀌겠지만 그리 쉽게 변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도시에 새로운 기억을 주입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개발 논리와 낡은 건물 터 켜켜이 기억을 쌓고 있는 오래된 풍경의 힘겨루기는 아직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겠다. www.keruluke.com
1 싱가포르 국립대학 전시홀에서 열린 전의 도록 디자인.
2 패션 화보집 의 편집 디자인.
요리사 안아라의 ‘홈그라운드’ 아이덴티티.
국립현대무용단의 2016년 시즌 아이덴티티를 담은 포스터 ‘접속과 발화’.
김형재ㆍ홍은주
2007년 독립 출판물 <가짜잡지>를 시작으로 함께해온 디자인 듀오. 인쇄물, 모바일, 공간 등을 넘나들며 따로 또 같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비정기 매체 <도미노>를 발간하기도 한다. <아프리카 나우: Political Patterns> 전시 그래픽으로 지난해 코리아 디자인 어워드 그래픽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형재ㆍ홍은주가 말하는 을지로의 장점 & 팁
“역시 도심 한가운데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사실 도심 한가운데 이런 산업 단지가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이다. 인쇄소가 가깝다는 장점도 있지만, 이런 현실성을 떠나 도시의 기억을 간직한 오래된 건물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꽤 즐거운 일이다. 인근에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집이라는 안동장과 두 번째로 오래됐다는 오구반점이 있다. 참고로 안동장은 면 요리에 강하고 오구반점은 군만두와 볶음밥이 맛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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