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촬영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은 전시 디자이너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다.
논스탠다드 스튜디오 논스탠다드 스튜디오 대표. 홍익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에서 실내 건축 전공으로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유희적 상호작용 증진을 위한 미술관 전시 디자인 모델 연구’로 디자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큐레이터로 시작한 업력과 1년에 100건 이상의 전시를 관람하고 기록하는 애정이 현재의 기술과 태도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seyounglee.com
“중요한 건 디자인을 하기 전에 전시라는 ‘숲’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매체와의 대면 인터뷰는 처음이라고 하니 의외다.
인터뷰 요청이 종종 있었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열심히 피해 다녔다.(웃음) 전시 디자이너라는 호칭이 어색해서다. 스튜디오를 차리고 이 일을 시작한 지 9년째이지만 나를 전시 디자이너로 정식으로 소개한 지는 1년 남짓 되었다.
모마에서의 경험을 듣고 싶다. 어떤 일을 맡았나?
큐레이터 사라 마이스터Sarah Meister의 어시스턴트로 일했다. 주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 글로 기록하는 사진학예부 큐레이팅 인턴이었다. 한국에서 박사과정 수료를 한 학기 남긴 시점에서 모마 인턴에 지원했다가 덜컥 뽑힌 것이다. 예술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사진을 전문적으로 공부했고, 미국에서 실내 건축을 전공하면서도 끈을 놓지 않은 채 사진 수업을 듣고 전시했던 경험이 좋은 점수를 딴 배경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곳에서 일하면서 전시라는 매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지 지켜볼 수 있었다. 나아가 전시 디자인이 관객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관찰하는 흥미로운 시간을 보냈다.
솔직히 말하면 모마에서 일하는 동안 전시 디자이너를 만난 일이 별로 없었다. 사진학예부만의 특성일 수 있지만 그곳 큐레이터들은 전시실의 기존 골격과 환경을 유지하는 선에서 작품 배치만으로 전시 의도를 표현하고자 했다. 새로운 전시 기획에 들어가면 큐레이터는 1:50 스케일의 전시실 모형을 들고 같은 비례로 만든 작품 모형을 이리저리 배치해가며 설치 계획을 한다. 전시 디자이너는 그 과정에서 큐레이터의 기획 의도를 공간적으로 전환하는 큰 구조와 뼈대를 잡아나가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이었다.
〈SF 2021: 판타지 오디세이〉전(2021). 사진 김상태
〈SF 2021: 판타지 오디세이〉전. 맛깔손이 이끄는 MHTL에서 홍보물 그래픽 디자인을 맡았는데 여기에 사용한 연한 민트색을 전시장 곳곳에 적용해 통일감을 주었다. 사진 이세영
이후 대림미술관 큐레이터로 입사했다.
귀국할 때 2013 광주비엔날레 국제 큐레이터 코스에 지원했다. 그때 만난 연구자, 큐레이터, 예술가들의 열정에 반해 계속 전시 영역의 일을 하고 싶었다. 이후 ‘일상이 예술이 되는 미술관’을 모토로 대중적인 전시를 선보이는 대림미술관이 내가 일하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모마에서 일할 때는 큐레이팅 파트에서 일어나는 기획과 리서치, 연구에 집중했다면 대림미술관에서는 작품으로써 디자인을 돋보이게 하는 부가적인 디자인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해야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시 오브제가 아닌, 작품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각종 부산물을 전시장에서 아름답게 보여주는 기술에 대한 고민이다. 또 모마에서는 큐레이터 업무가 연구와 전시 기획에 치중되어 있고 레지스트라, 보존, 설치는 각 전문가에게 맡겼는데 대림미술관에서는 모든 일을 큐레이터가 담당해야 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다양한 영역을 폭넓게 경험할 수 있었다.
어쩌다 전시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전환하게 됐나?
대림미술관에서 보낸 시간은 큐레이터로서 전시 디자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기획하는 전시에 어떤 디자인이 필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전시를 관람 및 기획하면서 일종의 데이터를 쌓아왔는데, 나는 이 데이터를 디자인이란 도구로 가공할 줄 알았다. 그렇게 내가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주변의 큐레이터나 작가로 일하는 동료들을 돕다 보니 전시 디자인에 깊숙이 들어오게 됐다.
전시 디자인에 있어서 강조하고 싶은 덕목은 무엇인가?
디자인을 하기 전에 전시라는 ‘숲’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전시 디자인을 디자이너만의 고유한 역할로 보기는 어렵다.
아무래도 전시 하나에 수많은 의도와 전략이 존재하고 엄청난 예산과 사람들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이라는 고유 영역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실제 전시에서 디자이너의 독창성을 얼마나 존중해줘야 하는지는 늘 의구심이 있다. 2019년 교토에서 열린 국제박물관협의회(ICOM) 콘퍼런스에서 전시 디자이너는 ‘중재자(mediator)’ 역할이라는 내용으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2016 광주비엔날레 디렉터로 만난 마리아 린드Maria Lind가 큐레이터의 중요한 덕목이 ‘중재’라고 강조했는데 나는 국내에서는 오히려 전시 디자이너에게 더 필요한 역할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큐레이터와 디자이너의 역할을 칼로 자르듯 나눌 수 있을까? 전시란 누구 하나가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늘 서로가 톱니바퀴처럼 부족한 점을 메우며 상호 보완해나갈 때 좋은 전시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린 〈백남준 플럭서스〉전(2016).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영상 디스플레이를 연출했다. 사진 김상태
스스로 경계하는 지점이 있다면?
전시 디자인이 작품의 일부처럼 보이는 순간. 그건 위험하다는 신호다. 관람객은 전시장에서 마주한 장면으로 그 작품을 기억하지 않나. 그렇기에 결국 내 결정으로 인해 어떤 작품의 감상에 영향을 미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이건 작가와 관람객, 나아가 전시 자체에도 좋은 일이 아니다. 내가 큐레이터로 미술관에서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갖게 된 시각인지도 모르겠다. 디자이너는 전시를 디자인적으로 해석하기보다 큐레이터가 해석한 전시를 관객에게 디자인으로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시장에서 전시와 관련 없는 조형적인 요소를 마주할 때 나는 그것이 작품인지 아닌지 혼란스럽다. 지금껏 전시 디자인 업무를 하면서 작품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려고 관람객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연결 방식을 고민하던 내 시간은 과연 무엇이었나 싶다. 대림미술관에서 일할 때 관람객 유치를 위한 포토존을 중요한 기획 포인트로 삼았지만 이미 10년 전의 일이다. 이제는 그 역할을 더 세련되고 화려한 연출의 상업 공간이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미술관이 연출적 요소를 계속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맡았다.
내 전시 디자인 커리어의 대부분을 쌓은 곳이다. 혹자는 내가 서울시립미술관 소속 전시 디자이너인 줄 알더라.(웃음) 서소문본관은 옛 법원 건물을 리모델링한 곳이라 전시실 대부분이 정방형이고 기둥이 많다. 전시장으로 사용하기에는 시설적인 면에서 한계가 많지만 중앙 아트리움 공간을 둘러싸고 전시실이 배치되어 있다는 점은 이곳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그래서 디자인할 때마다 아트리움을 염두에 두고 통합적인 디자인을 유도하려고 한다. 건물 입구부터 중앙 계단을 거쳐 전시실로 이동하는 경로가 꽤나 길어서다. 평소 전시 그래픽 디자인과 공간 디자인이 따로 분리되지 않고 시각적 통일감을 주는 전시 디자인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그래픽 디자이너와 초기부터 의견을 주고받고 가능하다면 전시실 내부 공간으로도 그래픽 디자인 영역을 확장시키려고 하는 편이다. 그래픽 디자인이 적용되는 공간적 구조와 형식까지 염두에 두는 것이 전시 완성도를 높이는 지름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SF 2021: 판타지 오디세이〉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전(2021). 발달장애 창작자 16명, 정신장애 창작자 6명의 작품을 소개했다. 사적인 작업 공간에서 완성한 작품을 미술관이라는 공적 장소로 옮기면서 내재된 에너지가 폭발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밝고 다정한 이미지로 공간을 연출했다. 사진 이세영
특별히 기억나는 전시가 있다면?
일이 안 풀릴 때마다 늘 떠올릴 만큼 만족스러운 전시 중 하나가 2017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린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 기획전 〈하이라이트〉다.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과 전시 디자이너로 계약한 형태였기에 무엇보다도 재단 입장에서 까르띠에 소장품에 대한 철학과 태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에 과감한 레드 컬러와 파리 재단 건물 앞에 설치된 금속 파티션을 입구에서부터 적용해 시선을 끌고 작품 배치를 통해 소장품 간의 관계성을 드러내려고 했다. 그로부터 1년 전 같은 장소에서 열린 백남준 10주기 추모전 〈백남준 플럭서스〉는 미술계에 나를 전시 디자이너로 알린 계기가 되어준 전시다. 마주 보는 두 전시실에 붉은 카펫이 깔린 어두운 미디어 룸과 밝게 오픈된 아카이브 룸으로 대비되는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써 전시 맥락에 풍성함을 더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두 전시 모두 나에게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이곳에서 새롭게 오픈하는 전시를 준비 중이다.
4월 20일부터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리는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전이다. 서울시립미술관과 휘트니 미술관의 공동 기획인 만큼 두 기관의 정체성을 조화롭게 담아내려고 한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작품을 소장한 다른 기관들은 대부분 전시할 때 컬러링한 벽에 디스플레이를 하는 반면 휘트니 미술관에서 얼마 전 개최한 〈에드워드 호퍼: 뉴욕〉전은 작품을 흰 벽에 거는 방식을 택해 새로웠다. 그 가변형의 흰 벽이 마치 휘트니 미술관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여기에 착안해 이번 전시에도 화이트 큐브 형식을 최대한 살리려고 한다. 대형 소장품 전시 디자인을 할 때는 시간당 예상 관람객 수에 따른 줄 서는 동선, 입장 동선, 관람 동선 등을 고려해 관람 편의를 최우선으로 챙겨야 한다. 관람객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작품을 안전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디자인으로 잘 풀어볼 계획이다.
SeMA 소장품전 하이라이트 〈자연을 들이다: 풍경과 정물〉전(2017). 팬데믹 기간에 관람객들에게 위로를 주고자 작품에서 느껴지는 자연의 생명력을 전달하는 따뜻한 무드의 공간으로 디자인했다. 사진 이세영
전시 디자인을 잘하기 위한 노하우가 있나?
프로젝트 여러 개를 동시에 하지 않고 하나에 집중한다. 개인전일 경우 1~2개월, 회고전이나 대규모 소장품전의 경우 6개월을 꼬박 준비하는 편이다. 그만큼 리서치 시간에 투자한다. 흥미로운 전시가 열리는 곳이라면 해외 어디든 달려가는데 그러다 보니 한번 본 작품을 다른 전시에서 만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동일한 작품을 어떻게 다르게 설치했는지 꼼꼼히 살펴보는 것은 공부가 된다. 작품이 전시되는 곳의 맥락, 그러니까 장소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번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전을 준비하기에 앞서 뉴욕 전시도 다녀왔다.
가까운 시일 안에 출간 계획이 있다고 들었다.
5월 중 마로니에북스에서 〈예술이 필요한 시간〉을 펴낼 예정이다. 예술 애호가이자 전시 디자이너로서 국내외 미술관과 예술 기관 21곳에서 보고 느낀 이야기를 담았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아, 나 전시 디자이너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 디자이너가 전 세계 예술 현장을 돌아다니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면 추천한다.(웃음)
인물 사진 김잔듸(516스튜디오) | 전시 사진 제공 논스탠다드 스튜디오
- 이세영 논스탠다드 스튜디오 큐레이터 출신의 전시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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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의 독자적인 해석보다는 전달, 공간보다는 전시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세영. 그래서 그는 끝까지 ‘전시’와 ‘디자인’ 사이의 얇고 작은 틈을 집요하게 추궁한다. 전시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왜 이렇게 보여져야 하는가? 이것이 작품의 가치와 큐레이터의 의도를 어떻게 표현하는가? 스스로 새로운 창작을 시도하기보다 기획이란 창작물을 제대로 드러낼 때 좋은 전시 디자인이 완성된다고 믿는다. 논스탠다드 스튜디오를 ‘전시를 만드는 스튜디오(exhibition making studio)’라고 소개하는 것 또한 같은 이유다.Share +바이라인 : 글 윤솔희 객원 기자 담당 서민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3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