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의 프리미엄 전기차 스타트업 ‘루시드 모터스Lucid Motors’는 일명 ‘테슬라의 대항마’로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 새로운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곳에서 제니 하Jenny Ha로 불리는 하지연 디자이너는 새로운 자동차 브랜드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되어 유서 깊은 자동차 기업에서의 커리어를 뒤로하고 루시드 모터스로 이직을 결심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그에게 모빌리티 혁신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로서의 삶에 대해 질문했다.
루시드 모터스의 외장 디자인 매니저. 아트 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Art Center College of Design에서 수송 디자인을 공부하고 닛산 아메리카, 제너럴 모터스에서 외장 디자인 인턴을 거쳤다. 캘리포니아의 아우디 디자인 센터에서 일한 뒤 2015년부터 현재까지 루시드 모터스에서 일하고 있다.
루시드 모터스 외장 디자인 매니저
하지연
현재 외장 디자인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소개해달라.
디자인 팀장과 유사한 역할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한 프로젝트를 잘 마칠 수 있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관리·감독한다. 다양한 부서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외장 디자인 팀의 대표로 나서서 의견을 제시하는 일을 맡는다. 젊은 신입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을 잘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끄는 것도 나의 역할이다. 물론 스케치를 비롯한 디자인 실무도 병행한다.
아우디에서 일하다 2015년 루시드 모터스에 합류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자동차 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아우디에서 믿고 의지하던 훌륭한 동료들이 먼저 이직한 뒤 내게 입사를 제안했다. 이들이 추천하는 기업이라면 괜찮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자동차의 디자인 DNA를 처음부터 개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이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전통적인 자동차 기업에서는 분명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우디에서의 직장 생활도 만족스러웠지만 자유와 도전이 내게는 더 중요했기에 이직을 선택했다.
루시드 에어의 디테일과 전면부. 항공기의 유선형 디자인에서 영감받아 공기역학에 충실한 외장 디자인을 구현하고자 했다.
입사할 당시 회사 상황은 어땠나?
지금은 6000여 명에 이르는 직원들이 일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100여 명에 불과했다. 루시드 모터스는 전기차 배터리와 파워트레인을 다른 전기차 기업에 공급하던 ‘아티바Atieva’가 전신인데, 내가 이직할 때까지만 해도 아직 자체 전기차 생산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루시드 모터스’라는 사명도 내가 입사한 뒤인 2016년에 바뀌었다. 자동차 엔지니어링 팀과 디자인 팀이 이제 막 꾸려지던 와중이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나 역시 새로운 팀원들을 모으는 일에 디자인 업무만큼이나 시간을 쏟아야 했다. 스타트업 특성상 한 사람이 많은 일을 감당하던 시절이었다. 시설도 다소 열악했다. 하지만 이제는 뛰어난 설비가 갖춰진 스튜디오에서 유능한 팀원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게 되어 감개무량하다.
루시드 모터스가 다른 전기차 스타트업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전기차 스타트업 중 상당수가 부서별로 제각기 다른 국가와 도시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디자인 스튜디오는 유럽이나 미국, 엔지니어링 부서와 본사는 중국 등에 위치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부서가 한 공간에서 일하고 있어 시차 없이 빠르게 소통해 사안을 결정할 수 있다.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야말로 좋은 디자인과 제품을 만들 수 있는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디자인적 측면을 보자면, 독창성을 강조하기 위해 화려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타 스타트업 대비 루시드 모터스는 정제되고 타임리스한 디자인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루시드 모터스 디자인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심플함에서 비롯되는 대담함. 자잘한 라인이나 세부적인 특징을 되도록 생략하면서 디자인을 발전시킨다. 여러 면을 하나의 면처럼 느낄 수 있도록 처리하고, 꼭 들어가야 하는 요소가 있다면 다른 디자인 요소와 함께 묶을 수 있을지 고려한다. 루시드 에어에도 이러한 디자인 방향성을 반영했다. 차량 전면부로 들어오는 공기가 옆면으로 넘어가도록 돕는 사이드 에어덕트를 방향표시등과 합쳤다. 군더더기 없이 최대한 간결하게 표현하면서도 기술적으로 꼭 들어가야 하는 부품에서는 최대한 디테일을 살린다. 출시 준비 중인 루시드 그래비티 역시 브랜드의 방향성과 가치를 SUV 차종에서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연의 루시드 에어 외장 디자인 스케치.
루시드 에어의 디자인 과정이 궁금하다. 처음으로 출시하는 모델인 만큼 내부에서도 고민이 많았을 텐데.
그렇다. 그래서 스케치보다는 시장 분석과 방향성 정립을 먼저 고려했다. 루시드 모터스가 왜 전기차 시장에 존재해야 하는지 고민해본 뒤 브랜드를 구축해야 우리만의 디자인이 나올 테니까. 미국의 자동차 회사는 대부분 동부의 미시간에 위치해 있고, 캘리포니아에서 럭셔리카를 만드는 브랜드는 사실상 우리가 유일했다. 그래서 지역성에 집중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제품의 종류를 막론하고 현존하는 캘리포니아 태생 브랜드는 모두 자신만의 개성이 돋보였기에 그것이 리서치의 토대가 되었다. 캘리포니아의 럭셔리 디자인을 연구해 도출한 특징을 우리는 ‘포스트 럭셔리post luxury’라고 명명했다. 화려함보다는 미니멀한 우아함과 스포티함, 미래지향적이지만 휴먼 터치가 느껴지는 따뜻함. 이러한 감성이 캘리포니아 럭셔리 브랜드의 특징을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외장 디자인 팀은 새로운 차량에 적합한 비례를 찾기 위해 여러 차례 콘셉트 디자인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캘리포니아만의 정체성을 발견해 루시드 모터스만의 아이덴티티에 적용했고, 이것이 곧 구체적인 디자인으로 정립되기 시작했다.
전기차 디자인에 지역성을 반영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항공기의 유선형 디자인에서도 영감을 받았다고.
뛰어난 엔지니어링 기술로 우리의 심플한 디자인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항공기를 선택했다. 항공기야말로 첨단 기술의 집약체이자 공기역학에 따른 탁월한 유선형 디자인을 지니고 있지 않나. 그래서 항공기처럼 모든 표면이 매끄럽게 공기의 흐름에 조율된 모습으로 디자인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헤드라이트는 항력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가장 작은 면적에서도 밝은 빛을 낼 수 있도록 설계했다. 트렁크는 적재량을 최대한 늘릴 수 있도록 중간이 갈라져 위아래로 나뉘어 열리는 클램셸clamshell 형태로 디자인했는데, 화물기가 열리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유리 캐노피 지붕 역시 항공기를 닮은 루시드 에어의 특징 중 하나인데, 차체 상단부에 메탈 트림 처리를 해 멀리서도 루시드 에어를 알아볼 수 있는 시그너처 요소로 만들었다.
요즘 주목하고 있는 업계의 변화가 있다면 말해달라.
디자인 과정에 첨단 기술이 도입되는 현상을 눈여겨보고 있다.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그동안 스케치와 디지털 렌더링을 주로 활용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블렌더, 그래비티 스케치 등 3D 스케치 모델링 프로그램의 수준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해 속도와 비용을 절감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디자인 아이디어나 자체 생성한 렌더링 이미지를 바탕으로 디자인 방향성을 정하는 스튜디오도 있다고 들었다. 인공지능이 자동차 디자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출시 준비 중인 SUV 루시드 그래비티.
전동화와 자율 주행도 모빌리티업계의 중요한 변곡점이다. 자동차 디자인은 어떻게 변화할까?
전동화에 따라 공기 저항을 줄이는 데 유리하도록 지금보다 더 낮은 차체로 날렵한 인상을 주는 차량이 더욱 많이 등장하리라 생각한다. 자율주행차는 각종 카메라와 레이더, 센서를 차체에 탑재하게 될 텐데, 이러한 요소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도록 구성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테크 기업이 자율 주행 택시를 개발해 통근용 차량을 소유하지 않는 시대가 온다면, 다채로운 이동 경험을 위해 내장 디자인이 강조되지 않을까? 혹은 주말과 휴가철에 운전하기 위해 자동차를 소유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운전 경험을 극대화한 화려한 디자인이 유행할지도 모르겠다. 디자인의 양극화 현상이 대두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해외 취업을 준비하는 후배 자동차 디자이너들을 위해 조언한다면?
미국이나 유럽의 디자인 대학에서 자동차 디자인을 배우고 현지에서 인턴 과정을 통해 커리어를 쌓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한국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나 졸업자라면 국내에서 일하면서 해외 기업에 지원하는 것도 가능하다. 특히 링크드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해당 기업의 디자이너나 디자인 매니저, 디렉터를 찾아 직접 포트폴리오를 보내는 방법도 추천할 만하다.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동차 디자인은 어느 나라에서 일했든 모두 똑같은 경력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특히 다양한 국적의 디자이너들이 모여서 일하는 분야인 것 같다.
- 모빌리티 4.0시대를 질주하는 한국인 디자이너들 제로 베이스에서 일궈낸 전기차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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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개념이 근본부터 흔들리는 요즘, 자동차 기업들은 잇따라 모빌리티 기업으로 전향을 선언하며 격변의 파도를 타고 있다. 사실 그 방식은 제각각이다. 모빌리티의 범주 안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되레 오랜 세월 축적한 전통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세계적인 모빌리티 기업에서 활약 중인 한국인 디자이너들에게 변화에 대처하는 그들만의 방법에 대해 들어보았다.Share +바이라인 : 글 박종우 기자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3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