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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브랜드'라는 나무를 꾸준히 가꾸는 숲지기 베리준오 오준식
누구보다 빠르게 트렌드를 습득하며 변화를 거듭해야 하는 뷰티업계. 신속하게 결과물을 만드는 이들이 대세인 이 세계에서 베리준오 오준식 대표는 조금 다른 트랙을 선택했다. 오랜 시간 공들여 기업을 연구하고, 양적인 성장보다 정체성과 가치에 주목하며 브랜드를 가꾸어나가기로 말이다. 진정성을 바탕으로 견고한 디자인을 구현하는 그에게 브랜드란 느리지만 단단히 자라나는 나무와 같다.


제품, 공간, 브랜드, 그래픽 등 다양한 영역의 디자인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베리준오(VERY JOON OH Design Center) 대표. 홍익대학교 목조형가구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국립장식미술학교 가구디자인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현대카드, 아모레퍼시픽, 중앙일보 등을 거쳐 2017년 디자인 전문 회사 베리준오를 설립했다. 코스맥스, 삼성물산 등 다양한 기업과 협업 중이다. @very_joon_oh

이사무애 포터리 캔들 모시 초를 다 사용한 뒤에는 캔들 리드를 뒤집어 화병으로 활용할 수 있다. 캔들 리드 중앙부의 절취선을 따라 깨뜨리면 원형 홀이 만들어져, 그 안에 꽃을 꽂아두는 방식이다.
유수의 기업에서 디자인을 리딩한 후 2017년 독립을 택했다.
독립적으로 일하겠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갖고 있었다. 사실 한때 잠시 시도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내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았다. 40대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어 베리준오를 설립했다.

베리준오는 여러 산업의 기업과 협업했다. 그중 뷰티업계만의 특징이 있다면?
인류가 오래전부터 열망해온 아름다움의 가치를 표현한다는 점. 디자인에서 정확성과 감수성의 균형이 요구받는 분야이기도 하다. 제품의 원활한 생산을 위해 산업 디자인의 효율성이 필요한 반면, 고객이 브랜드를 정서적으로 가깝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 감성적 디자인도 활용한다. 이미 수백 년 동안 두 가지 디자인을 병행해온 글로벌 브랜드가 많은 상황에다 국내에도 뛰어난 뷰티 브랜드가 적지 않으니 업계에 진입해 살아남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막상 뛰어들면 일할 만한 매력이 충분한 업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고통이 수반되는 것도 무시할 수 없긴 하다.(웃음)



서울메이드 뷰티 컬렉션 서울산업진흥원과 진행한 뷰티 상품 개발 프로젝트. 홍대, 북촌, 가로수길을 각각 오렌지, 핑크, 레드로 재해석해 색상을 부여했다.
화장품 ODM 기업 코스맥스와는 어떻게 일하게 됐나?
아모레퍼시픽을 퇴사할 즈음 우연한 기회에 이경수 회장을 소개받았다. 몇 차례 만남을 통해 진실한 경영 철학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후 디자인 프로젝트를 의뢰받았고, 첫 디자인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 6개월 동안은 디자인 작업을 하지 않고 기업을 알아가는 데 주력했다. 회의에 직접 참여해서 현안을 파악하려고 했다. 어떤 디자인을 하는 것이 코스맥스에 진정으로 도움이 될지 관찰하고 고민했다. 그다음에 25주년을 목표로 BI와 CI 리뉴얼 작업을 하기로 결정하며 디자인 프로젝트가 구체화되었다.

국내 화장품 산업의 발전에는 코스맥스 같은 중견 기술 기업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한데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을뿐더러 종종 저평가되곤 한다. 할리우드에서 수많은 영화배우와 감독이 주목받는 데 비해 상대적으로 영화사와 스태프의 역할은 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디자인 리뉴얼을 통해 이러한 인식을 바꾸고 싶었다. 코스맥스는 화장품 생산 전문 기업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300여 명에 이르는 화장품 개발 연구원들이 일하는 기술 개발 기업이기도 하다. 이 점에 주목해 화장품 연구 기업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강화하고자 기술 브랜딩과 함께 CI 리뉴얼 작업을 진행했다. 창업자의 가치관을 글로벌하게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리뉴얼 작업 후 반응은 어땠나?
프로젝트 완성까지 1년 6개월이 걸렸는데, 피드백을 받기까지는 그로부터 1년 6개월이 더 걸렸다. 대기업이나 스타트업은 변화가 생길 때마다 대외적으로 빠르게 홍보하는데, 코스맥스 같은 ODM 기업은 현실적으로 이러한 소식을 알리는 데 관심을 쏟기 어려운 편이다. 그래서 리뉴얼에 대한 반응은 해외 클라이언트, 협력사, 고객사들이 변화를 받아들인 뒤, 그에 대한 암묵적 합의가 생겼을 때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이사무애 포터리 캔들 스모크 잉크
피드백을 받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후에도 협업을 이어갔나?
고문으로서 디자인적 관점에 기반해 기업 경영에 관한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제품 개발 TF 팀 회의와 연례 워크숍에도 종종 참여한다. 지금도 수시로 소통하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현재는 코스맥스 차이나의 상하이 사옥 설계와 고객 응대 환경 디자인 등에도 참여하고 있다. 앞으로도 함께 할 일이 많다. 한 기업의 여러 프로젝트에 오랫동안 참여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숲을 관리하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숲이 울창하려면 토대가 되는 땅도 좋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코스맥스는 좋은 경영 철학과 흔들리지 않는 디자인 기조를 갖고 있기에 돈독한 관계를 오래 유지하며 협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난해 말에는 프리미엄 비건 한방 브랜드 ‘이사무애’를 론칭했다.
그동안 진행한 디자인 프로젝트보다 더 높은 층위에서 관여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바를 담아내고자 했다. 베리준오는 브랜드 철학을 설정하고 브랜드 네이밍과 더불어 디자인 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맡았다. 코스맥스는 화장품 연구 개발을 통해 높은 품질을 확보해주었다. 독창적인 콘셉트의 향까지 완성했다. 브랜드 이름은 ‘이상과 현실에 걸림이 없다’는 뜻의 사자성어에서 따왔다. 불교 용어이지만 한국적 가치관을 대변하면서도 대단히 현대적인 단어라고 생각했다. 현재 운영은 뷰티업계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전문 경영인들이 맡고 있다.



이사무애 크로니클 하이드레이트 28 크림 PCR-PP 단일 재질을 사용해 재활용이 가능하다.
이사무애는 기존 한방 뷰티 브랜드와 어떤 점에서 다른가?
브랜드의 ‘성장’을 정의하는 방식이 다르다. 어느 브랜드나 매출 증대를 성장의 주요 지표를 삼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가령 이솝 같은 브랜드에 판매량의 극적인 증가가 절대적 가치일까? 아마 브랜드의 팬덤이 꾸준히 늘어나는 것 역시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이사무애도 마찬가지다. 브랜드의 철학과 가치를 이해하는 소비자들을 위한 한방 뷰티 브랜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이사무애의 론칭으로 이어졌다. 패키지 디자인에도 이런 생각이 반영되었다. 자극적인 그래픽이나 화려한 색으로 시선을 끌지 않는다. 한마디로 튀지 않는 디자인이다. 제품의 무게도 그리 무겁지 않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포장재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기는 제품을 다 쓴 뒤에는 재사용 가능하도록 했다. 이러한 사전 작업을 준비 과정에서 이미 다 해놓았기에 이사무애에는 트렌드에 맞춰 급조된 스토리가 없다. 브랜드의 핵심 가치에 따라 만들어진 근거 있는 이야기를 우직하게 제시할 뿐이다.

앞으로 어떤 브랜드로 거듭나길 바라나?
성장은 천천히 하더라도 큰 기복 없이 이어지며 한방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브랜드가 되길 바란다. 이제 막 론칭한 브랜드이니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숙성’의 과정이 필요하다. 사실 브랜드 네임과 패키지 디자인, 화보 이미지가 사람들의 눈과 귀를 곧바로 사로잡지는 않는다. 다만 많은 뷰티 브랜드가 자신을 내세우는 데 비해, 정갈한 이사무애가 그 사이에서 조용히 자리 잡았으면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시선이 집중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리뉴얼한 코스맥스 BI와 CI를 적용한 사무용품.
요즘 들어 K-뷰티의 인기가 식었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오곤 한다.
인기가 식었다기보다는 매출량이 줄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서 생긴 거품이 걷어지는 시기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때 하루 만에 몇억 개의 제품을 팔아 폭발적으로 규모를 키운 뷰티 브랜드가 정말 많았다. 그리고 디자인적으로 큰 고민을 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어찌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연예인 얼굴만 패키지에 넣어 판매해도 충분히 수익이 보장되었으니까. 하지만 이러한 디자인은 당장 몇 개월 동안 매출을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산업 발전을 저해한다. 앞으로는 이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한다.

팬데믹 이후 국내 뷰티업계의 변화를 어떻게 보고 있나?
최근 들어 중국 이외의 국가들에서 K-뷰티의 유행이 다시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일본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디자인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아 아쉽다. 유명 연예인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디자인과 마케팅의 패턴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다. 특히 한국만의 문화적 아이덴티티가 반영된 디자인 사례가 많지 않다. 앞으로 새로운 시도가 더 등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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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글 박종우 기자 인물 사진 윤선웅(에스플러스튜디오)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3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