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시장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건물을 부수고 다시 짓는 일은 일상이자 상식이 되어버린다. 이런 속도전으로 인해 눈앞의 풍경이 매일같이 변하고 과거의 기억은 저 너머로 떠밀려가버린다. 그래서 혹자는 서울을 ‘집단 기억상실에 걸린 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옛것을 보존하자는 논리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서울이란 도시는 옛 기억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두려운 듯 송두리째 뿌리뽑고 그 위에 새로움을 덧발라버린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서울의 이런 현상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들은 오래된 기억과 새로운 기억의 조화를 강조한다.
지난해 11월 열린 ‘다시 만나는 세운상가’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 서울문화재단 금천예술공장이 주관한 이 행사는 근대화의 상징이자 ‘제조업 코리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세운상가에 메이커 플랫폼이라는 의미를 포개어 낸 점이 돋보였으며 디자이너, 건축가, 메이커, 현대미술가, 시인 등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이 전방위로 참여한 것 역시 특징이었다. 세운상가 5층 실내 광장을 중심으로 진행한 ‘다시 만나는 세 운상가’는 크게 전시, 워크숍, 토크쇼, 레코드 컬렉션으로 구성됐다. 이 중 전시 <멋진 신세계>는 아티스트 양아치가 큐레이터를 맡은 가운데 예술가 김구림, 건축 그룹 SoA(강예린ㆍ이재원)와 건축가 최춘웅, 디자인 평론가 박해천, 시인 심보선 등 11명의 작가들이 작품과 퍼포먼스로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옥상 정원’, ‘김수근’, ‘프로복싱전용체육관’, ‘CCTV’, ‘석유곤로’ 등 세운상가와 관련된 153개 키워드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특별히 이 전시에는 세운상가 입점 업체도 다수 참여해 그 의미를 더했다. 워크숍은 ‘세운상가의 새로운 기억’과 멋지게 맞물렸다. 제2의 제조업 혁명이라 불리는 메이커 무브먼트의 기류를 타고 DIY 스피커, 추억 속의 오락기, 소리 탐지기, 테크 액세서리 등 다양한 만들기 워크숍이 이어졌다. 이 밖에도 행사 첫날인 13일에는 세운상가 장인들과 뮤지션 남궁연, 방송 작가 이재국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토크쇼가 열리기도 했다. 또 아날로그 감성의 상징적인 매체인 턴테이블 레 코드판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행사도 열렸다.
이런 행사는 “반세기에 이르는 기술력과 장소가 지닌 특유의 상징성을 되살려 세운상가가 음악, 현대미술, 미디어 아트와 만나 메이커 플랫폼으로 거듭날 것”이라는 서울문화재단 조선희 대표의 말을 고스란히 대변했다. 물론 아무리 좋은 취지의 행사라도 단발성에 그친다면 그것은 잠시 잠깐의 이벤트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만나는 세운상가’를 기점으로 지역의 가치와 잠재력을 조망하는 행사가 이어진다면, 서울의 취약점인 헤리티지 쌓기가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이렇게 탄탄하게 쌓아 올린 시간의 지층은 세운상가와 을지로 일대에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것이다. seoulpowerstation.org
‘다시 만나는 세운상가’ 포스터. 창의적 콘텐츠의 기획과 개발을 통해 사회문제의 해결책을 찾고자 2014년부터 진행한 프로젝트 ‘서울상상력발전소’의 두 번째 행사였다.
정성윤 작가의 이클립스(Eclipse). 지름 2m 크기의 두 원이 레일 위를 쉼 없이 오가는 설치 작품으로 관계의 불가능성을 형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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