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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있는 그대로를 응원하는 지지와 연대의 디자인 길버트 폰트 & 길벗체, 서체로 소수자성 드러내기












길버트 폰트.




길벗체 가족과 서체를 구성하는 요소들.
기획 제람(강영훈) jeram.kr, 숲(배성우)
개발 숲(배성우), 제람(강영훈), 채지연, 신예림, 김수현, 강주연, 김민정, 임혜은
제작 비온뒤무지개재단 @beyondtherainbowfoundation, 474명의 개인 및 단체

서체만으로 사회·정치적인 메시지를 표현할 수 있을까? 길버트 폰트와 길벗체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사례다. 1978년 무지개 깃발을 최초로 디자인한 퀴어 인권 운동가 길버트 베이커Gilbert Baker 사후에 그를 기리기 위해 만든 길버트 폰트는 그가 만든 깃발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았다. 퀴어 미디어 조직 뉴페스트NewFest, NYC 프라이드, 폰트 제작 스타트업 폰트셀프Fontself, 광고 에이전시 오길비 & 매더Ogilvy & Mather의 디자인팀이 협업한 이 프로젝트는 의도를 충분히 살리면서도 심미적으로도 뛰어난 서체를 만드는 게 목표였다. 길버트 베이커가 성性, 삶, 치유, 태양, 예술, 조화, 영혼의 의미를 담아 깃발에 사용한 여섯 가지 색으로 문자의 각 획을 구성했다. 획이 겹쳐졌을 때 새로운 색이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모여 다채로운 세상을 만들어냄을 상징한다. 오길비 & 매더 디자인팀은 “우리는 LGBT 커뮤니티가 무지개 깃발을 벗어나 스스로 자신만의 배너, 포스터, 사인을 만들 수 있는 도구를 주고 싶었다”고 제작 목적을 밝혔다.

길버트 베이커가 생전에 퀴어 동료들을 위한 각종 배너와 사인을 제작했던 것처럼, 그 역할을 길버트 폰트가 계승하게 된 것이다. 길버트 베이커의 정신은 한국에서 새로운 서체 개발로 이어졌다. 길버트 폰트의 한글판 서체이자 최초로 전면 색상을 적용한 완성형 한글 서체 ‘길벗체’가 바로 그것. 시각예술 활동가 제람(강영훈)과 서체 디자이너 숲(배성우)이 책임 개발자로 참여한 이 서체의 이름은 길버트 베이커의 의지를 잇는다는 의미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향한 ‘길’을 함께하는 ‘벗’이 되겠다는 뜻을 모두 담고 있다. 한글의 특성상 3000자에 가까운 글자를 그려야 하고 여기에 일일이 색상을 더해야 했기에 길벗체 완성은 지난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또 글자의 형태마다 다른 구성으로 여러 색상을 입혀야 했기에 부단한 실험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디자인에서 특히 신경 쓴 것은 가독성과 조화로움이었다. 특별한 기준 없이 다양한 색을 혼합해 사용할 경우 오히려 글자 자체가 읽히지 않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획이 맞물리고 교차하는 지점에서 주변 획과 어울리는 색상을 도입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완성된 길벗체는 현재도 업그레이드 중이다. 다양한 소프트웨어에서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신경 쓰는 한편, 소수자 대상 혐오 표현 입력 시 색상이 사라지는 기능을 추가했다. 그 외에도 제주어에서만 쓰이는 옛 한글,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한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의 입말 표기 등 한글을 사용하는 모든 이들이 불편함 없이 길벗체를 쓸 수 있도록 꾸준히 개발을 이어가고 있다. rainbowfoundation.co.kr/gilbeot


웹·앱 개발자 신교수가 길벗체 프로젝트에 참여해 만든 길벗체 온라인 생성기 ‘길벗과 함께’.


제주도립미술관에서 2021년 진행한 미술 전시 〈우리 시대에_At the Same Time〉 홍보 배너.


제람(강영훈)

시각예술 활동가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제 몫을 갖지 못한 이들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 두루 활용하는 서체다.”

길벗체 프로젝트는 2020년에 열린 〈차별과 혐오를 넘어 자부심으로!〉전에서 사용한 무지개색 서체에서 비롯됐다.
2018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 사회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성소수자를 혐오한 사례를 보도한 미디어 생산물을 모아 아카이브로 만드는 연구 작업이었다. 무겁고 어두운 실상을 드러내지만, 작업의 궁극적인 바람은 희망과 자부심이었기 때문에 서체 디자인으로 이를 나타내고자 했다. 이 전시를 방문하는 많은 소수자들이 무지개색 서체를 보고 안전하다고 느끼길 바랐다. 당시 많은 관람객들이 서체가 꼭 정식 출시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해 함께 개발할 인원을 모집해 비온뒤무지개재단과 개발에 나섰다.

길벗체 제작을 위해 474명이 후원에 참여했다. 모두 공동 제작자로 기재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서체 개발과 후원이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전 동의를 거쳐 후원자들의 이름과 단체명을 먼저 길벗체로 만들어 테스트를 진행했고, 후원자들로부터 피드백을 받았다. 먼저 만든 글자를 기준 삼아 색상 작업을 진행하면서 더욱 안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공식 출시 전 서체를 먼저 사용할 수 있는 길벗체 스페셜 에디션을 제공했고, 이들이 길벗체로 자신의 이름을 쓴 인증샷을 소셜 미디어에 올린 덕분에 많은 관심과 지지를 받았다. 그렇기에 ‘공동 제작자’라는 명칭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길벗체 출시 이후에는 트랜스젠더와 바이섹슈얼의 상징 색을 반영한 또 다른 길벗체를 공개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핍박받는 성소수자가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했다. 많은 트랜스젠더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바이섹슈얼은 자신의 선택으로 소수성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성소수자 사이에서 충분히 존중받기 어려운 상황에 있다. 또 다른 소외가 발생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들을 지지하기 위해 만들었다. 무지개 길벗체와 달리 색상 조합을 구성하는 경우의 수가 적기 때문에 최대한 덜 단조로워 보이도록 디자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앞으로 길벗체가 어떻게 활용되길 바라나?
길벗체는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제 몫을 갖지 못한 이들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 두루 활용하는 서체다. 성소수자, 이주민과 난민, 사회적 재난과 기후 위기 등 다양한 현장에서 쓰이고 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꾸준히 다양한 곳에서 취지에 맞게 활용되길 바란다. 또 2020년대 한국 사회의 시각 문화와 시민운동 역사의 일부로 기억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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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글 박종우 기자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2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