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신 아폴론은 말할 줄 아는 까마귀를 기특한 심부름꾼으로 두었다. 하루는 이 까마귀에게 아름다운 컵을 주고 물을 길어오라 했다. 하지만 심부름 도중 우연히 무화과 나무를 발견한 까마귀는 목마른 신을 제쳐둔 채 열매가 탐스럽게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배부르게 무화과를 먹어치운 후에야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까마귀는 늦은 이유를 덮어씌울 요량으로 샘 근처에서 뱀 한마리를 잡았다. 모든 정황을 알고 있던 태양신은 거짓말에 분노했고, 까마귀와 뱀, 컵까지 모두 하늘로 집어 던져버렸다. 이렇게 밤하늘의 까마귀 자리, 바다뱀자리, 컵의 자리는 나란히 붙어 있게 됐다.
2022년, 컵의 자리 첫번째 별인 ‘엘리랜드’로 방문할 수 있는 포털이 열렸다. 바로 새로운 버추얼 소셜 플랫폼 ‘피그로Figro’를 통해서다. 현재 엘리랜드와 지구의 첫 연결을 기념하는 오픈 전시 <닷과 대쉬의 모험>이 열리고 있다.
전시 <닷과 대쉬의 모험>은 10월 24일부터 12월 24일까지 버추얼 소셜 플랫폼 피그로와 서울 연남동 소재의 엘리펀트스페이스에서 동시에 열린다.
피그로는 새로운 문화 예술 경험을 고민하는 창작 그룹 ‘레벨나인’이 선보이는 버추얼 소셜 플랫폼이다. VR HMD 기기를 통해 접속할 수 있고, 데스크톱 버전(Windows, MacOS)도 함께 제공해 접속 기기가 다르더라도 동시에 즐기는 멀티플레이 콘텐츠를 경험할 수 있다. 방문자는 컵의 자리라는 플랫폼의 세계관에 맞춰 칵테일 잔이나 에스프레소 잔, 양손잡이 머그잔 등 9가지 컵 중 하나의 아바타가 된다. 이 속에서 펼쳐지는 전시 <닷과 대쉬의 모험>은 소목장세미, 이해강, 임영주 등 아티스트 세 명의 작품을 만날 수 있으며, 오프라인 공간 엘리펀트스페이스에서도 체험할 수 있다.
피그로 홈.
엘리펀트스페이스에서는 VR 기기를 통한 피그로 체험을 제공한다.
<닷과 대쉬의 모험>에서 만날 수 있는 이해강 작가는 이전까지 2D 일러스트 작업을 주로 해왔고, 소목장세미 작가의 경우 가구와 공간의 물성을 다루며, 임영주 작가는 영상을 주요 매체로 활용해왔다. 레벨나인은 평면적이거나 물성을 다루는 전통적인 예술 작품을 가상 공간으로 구현할 때 작품 뿐 아니라 가상 현실의 외연도 넓힐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작품을 단순히 복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플랫폼 내에서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멀티플레이 방식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번역했다.
'느영나영', 이해강
‘느영나영’은 지금은 문을 닫은 제주도 도깨비공원의 도깨비 탄생 비화를 담고 있다. 실제 세상과 도깨비 세상을 이어주는 불가사의의 존재인 ‘허수깨비’의 방망이 소리가 들리자 돌들이 깨어나 ‘느영나영’이 되었고, 이들이 서로 공명하며 빛과 소리를 발산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다.
도깨비공원은 이해강 작가의 아버지인 이기후 디자이너가 제주도에 지은 테마파크로, 도깨비를 주제로 한 조형 공원이었다. 이기후 디자이너가 작고한 후 운영이 중단되어 현재는 부동산 매물로 내놓은 상태다. 공원이 판매되면 600여 개의 조형물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해강 작가는 사진, 일러스트 등으로 온라인 아카이브를 구축 중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엘리랜드 속의 ‘느영나영’은 유저가 엘리랜드 속 도깨비공원에서 직접 미스테리의 존재인 ‘허수깨비’가 되어 방망이를 두드리며 돌들을 깨우는 경험을 하도록 만들었다. 동시 접속자들과 함께 돌을 두드릴 때마다 뮤지션 수민이 만든 사운드 효과도 들어볼 수 있다.
‘환대의 재개장’, 소목장세미
엘리펀트스페이스에 설치된 미니골프 코스
거액을 들여 세운 올림픽 경기장은 일회적인 행사용으로만 사용되고 방치된다. 소목장세미 작가는 이 곳을 메타버스 아바타의 체력증진을 위한 놀이 시설로 탈바꿈해 재개장했다. ‘환대의 재개장’에서 체험할 수 있는 미니골프는 작가가 속초의 보광 미니 골프장(한국 최초의 미니골프장)에서 매력을 발견했고, 이후 2019년에 앰네스티와 진행했던 전시를 시작으로 여러 가지 버전으로 만들고 있다. ‘환대의 재개장’은 2022년 봄, 리움미술관의 전시에서 선보인 ‘체력단련활동장’의 모티프를 살리며 골프 코스로 재설계하고, 실제 현실에서 시도해보지 못했던 볼륨감이나 질감, 조형적인 시도를 했다. 오프라인 공간인 엘리펀트스페이스에도 실제 미니골프가 마련되어 있다. 이는 가상 현실이 그동안 실제보다 훨씬 자유로운 세계로 여겨지던 오산을 깬다. 환대의 재개장의 미니골프는 가상현실이든 실제든 우리가 물리적인 제약 속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빙’, 임영주
임영주 작가의 ‘빙’은 크게 세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청력 테스트처럼 보이는 검사실, 기묘한 조각상들이 잔뜩 있는 기도실, 숨겨진 비밀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조각상의 경우 가까이 다가가면 영상으로 변화하며, 흐물흐물한 질감으로 변한다. 조각상 안으로 들어갈 경우 투명해지며, 각기 다른 사운드를 들을 수 있다. 이는 현실의 물리법칙과는 전혀 다른 물리 법칙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상 현실의 특징으로, 신체적인 한계를 극복함과 동시에 또 다른 제약이 주어지는 상황이다. 임영주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지금까지의 작업은 사운드나 그래픽 등 관련 작업자와 협업을 할지라도 그 소스들을 받아 최종파일을 만들었던 것은 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플랫폼의 규칙 안에서 움직임이 가능하도록 3D 모델러에게 내가 파일을 넘겨야 했다. 나 역시 뷰어로 기다려야 하는 과정이 새로웠다.”고 전했다.
피그로를 체험할 수 있는 엘리펀트스페이스 전경.
피그로의 콘텐츠에서 거듭 강조되는 점은 ‘규칙’과 ‘소셜’이다. 특정한 물리적인 법칙이 언제나 적용되고, 여러 사회적인 활동이 가능한 공간은 얼핏 현실의 공간과 다르지 않게 들린다. 메타버스의 개념에서 출발해 다음 가상 현실로의 도약을 준비한 레벨나인에게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Interview
레벨나인
전시 <닷과 대쉬의 모험>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1879년에 출간된 엘라 테이어Ella Thayer의 소설 <와이어드 러브Wired Love>에서 착안했다. ‘닷과 대쉬의 로맨스’라는 부제를 가진 소설로, 전신 기술이 이제 막 발명된 시대를 바탕으로 등장인물 N과 C가 전신 기사로 등장한다. 두 인물이 모스 부호를 통해 우정을 나누는 부분이 이진법의 세계에서 생성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즉 가상현실에서의 경험과 유사하다고 보고 붙인 이름이다.
가상 현실에서의 전시가 단순히 실제 전시의 복사만은 아니라고 한 점이 흥미롭다. 실제 전시와 어떻게 다를까?
전시를 만드는 과정이 훨씬 복잡하다. 실제 전시 과정을 아주 단순히 말하면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완성된 작품을 운송해서 오프라인 공간에 설치하는 것이다. 가상 현실에서는 스튜디오라는 개념이 없고, 작품 제작부터 설치까지가 하나의 프로덕션 과정이 된다. 작품과 전시 공간이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작품의 위치를 바꾸는 단순한 문제조차 전체적인 수정이 들어간다. 아마 온라인 작업을 경험한 작가들이라면 공감할텐데, 작품이 온전히 작가의 손 안에만 있지도 않다. 이번 <닷과 대쉬의 모험>도 작가마다 3D 모델러가 함께 팀이 되어 작업했다.
피그로가 다른 메타버스와 차별화된 점이 있다면?
굳이 메타버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지는 않다. 피그로가 친구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계기이자 하나의 공간, 커뮤니티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실시간 기능과 동시 접속을 기본적으로 갖추었더라도 이러한 가상 현실이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플랫폼에서 얻을 수 있는 사회적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과 똑같은 아바타나 더 멋진 3D를 만들어내는 등의 하드웨어적인 문제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모이도록 만드는 콘텐츠가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피그로는 사람이 아닌 컵의 아바타를 선택했고, 스토리텔링을 집어넣을 수 있는 세계관을 만들고, 작가들만의 이야기가 담긴 콘텐츠를 선보였다. 감각의 몰입만큼이나 사회적 몰입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휴대폰으로 접속할 수 있도록 확장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나?
베타 서비스 단계에서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까지 제공하려고 한다. 모바일 접속은 커스텀 기능이 더 강화되고, 구매 및 결제할 수 있는 콘텐츠까지 마련되었을 때 더 의미있다고 봤다. 우선 VR 기기 또는 데스크톱을 통해 유저가 비교적 큰 스크린 사이즈로 피그로를 체험하는 것이 먼저다.
엘리랜드에 준비된 또 다른 이벤트는?
앞으로 ‘피그로 투어’와 ‘피그로 토크’ 등을 진행해보려고 한다. 플랫폼 내의 공간을 충분히 소개하면서 사람들과 계속 소셜 활동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피그로 토크'는 11월부터 격주 월요일 저녁 7시 30분에, '피그로 투어'는 매주 수요일 오후 4시에 플랫폼 안에서 진행된다.
<닷과 대쉬의 모험>
기간 10월 24일~12월 24일
장소 엘리펀트스페이스, 버추얼 소셜 플랫폼 피그로Figro
자료 제공 레벨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