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olittle〉, 픽시스Pixies(1989)
〈Treasure〉, 콕토 트윈스Cocteau Twins (1984)
1980년대에 컴퓨터가 대폭 작아지며 개인·가정용으로 보급되었고 위지윅•과 DTP•• 시스템이 그래픽 디자인의 혁명을 낳았다. 마치 유화를 그리다가 수채화를 그리게 되어 채색법과 붓을 다루는 방식을 다시 배우듯 한동안 ‘컴퓨터 디자인’은 더 발굴해야 하는 세계로 인식됐다. 1990년대 초에 접어들며 디지털 표현은 또 한 번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바로 포토샵의 등장이다. 이 이미지 프로그램으로 이전에 할 수 없었던 이미지 조정, 각종 이펙트 적용, 색 보정과 교정이 가능해지면서 본격적인 디지털 디자인 시대에 접어들었다. 본 올리버 Vaughn Oliver(1957~2019)는 이러한 디지털 적응기를 순항한 디자이너다.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음반사 4AD를 알아야 한다. 영국의 4AD는 본래 베거스 뱅큇Beggars Banquet이라는 더 큰 음반사에 소속된 레이블로 당시 신인 아티스트들의 앨범을 제작했다. 1990년대에 규모와 명성이 더 커지며 독립 음악 레이블로 새 둥지를 트는데, 이것은 당시 음악 신의 지각변동과 본 올리버의 영입으로 나타난 ‘퍼펙트 스톰’이다. 1980년대는 뉴웨이브와 MTV의 거물급 가수들, 이를테면 듀란 듀란, 마이클 잭슨, 마돈나, 프린스 등이 빌보드 차트 의존형 대중음악을 만들어냈다.
거액의 자본으로 잘 다듬어진 곡과 화려한 아티스트, 대형 경기장을 가득 메운 인파의 콘서트장이 당시 음악 시장을 대변했다. 1990년대는 반대다. 허름한 옷과 외모의 밴드, 비관적이고 암울한 음악은 곧 사랑과 이별이라는 클리셰에서 벗어나려는 실험이었고 빌보드 히트는커녕 ‘나만 좋아하면 되는 음악’으로 전향했다. 당시 음악인들은 이러한 음악을 비주류라 부르지 않고 대안적 음악, 즉 ‘얼터너티브alternative’라 불렀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장르가 그런지grunge인데 헤비메탈과 펑크 음악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를 ‘Ctrl C+Ctrl V’ 하지 않고 색다른 록 음악 장르를 탄생시켰다. 모르면 간첩인 너바나, 펄 잼, 사운드가든이 이 장르의 대표적인 밴드다. 그런지 외에도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펼친 픽시스, 소닉 유스, REM, 10,000 매니악 등이 마침내 대중적 관심을 얻기 시작할 때 영국의 4AD도 함께 명성을 얻고 있었다. ‘얼터너티브 밴드’라는 단어조차 통용되기 전인 1980년대에 이미 이 레이블에서는 ‘그런 음악’, 즉 유명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음악성과 실험 정신을 시도했던 데드 캔 댄스나 콕토 트윈스 등의 앨범을 발매했기에 ‘원조’라는 평판을 얻은 것이다. 따라서 얼터너티브 밴드들이 4AD와 음반을 내고 싶어 한 것은 당연했다. 무엇보다 앨범 디자인이 달랐다. 아티스트나 밴드 멤버의 사진으로 덮인 것이 대부분인 당시 앨범 표지(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가 즐비한 레코드 숍에서 4AD의 앨범은 어딘가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내며 유독 눈에 띄었다.
〈Pod〉, 더 브리더스 The Breeders (1990)
〈Down Colorful Hill〉, 레드 하우스 페인터스Red House Painters(1992)
〈Polydistortion〉, 거스 거스Gus Gus (1997)
본 올리버는 대학 졸업 후 4AD의 디자이너를 첫 직업으로 시작했고 훗날 V23라는 스튜디오로 독립했지만 여전히 4AD 관련 작업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넉넉지 않은 형편으로 청년 시절을 보낸 본 올리버는 음악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내게는 앨범 표지가 항상 중요했다. 앨범 표지는 일시적이고 금방 잊히는 것이지만 그보다는 좀 더 오래 기억하도록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지금도 4AD의 일관된 디자인 언어에 버금가는 사례를 찾기 어렵다(물론 거물급 재즈 음반사인 블루 노트나 독일 음반사 ECM을 거론할 수야 있겠지만 그 둘의 디자인은 정형화된 틀이 있어 타이포그래피나 사진을 바꿔 넣는 템플릿에 가깝다고 본다). 실제로 4AD의 음반은 보자마자 그들의 앨범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 그것도 영국에서 피터 사빌Peter Saville이 디자인을 맡았던 팩토리 레코드의 앨범도 감각적이기는 했으나 4AD가 발매한 앨범은 마치 커다란 그림의 퍼즐 한 조각처럼 새로운 앨범도 기존 앨범과 함께 커다란 이미지를 형성한다는 인상이었다. 이는 전적으로 본 올리버의 공이다. 그는 치마의 레이스나 박제된 원숭이, 수영하는 남자, 음산한 침실 등 예측 불허한 사진이나 인쇄 시 퍼진 망점을 땅겨서 만들어낸 강렬한 초현실주의적 이미지를 앨범 커버로 만들었다. 이는 단순히 눈길을 끌기 위한 장치는 아니었다.
앨범의 사운드트랙을 감상하면 모두 이해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픽시스의 3집 〈Doolittle〉 앨범 커버는 앞서 언급한 박제된 원숭이가 주인공이다. 자세히 보면 기독교 전통에서 영혼을 상징하는 헤일로halo가 새겨져 있고 좌측 상단에 목활자 숫자 5, 우측 아래에 6과 7이 보인다. 곳곳에 곡명이 밴드 이름 ‘Pixies’와 앨범 제목 ‘Doolittle’과 함께 작게 들어가 있고 기하학적 그리드 위에 놓여 해독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다. 이 불가사의한 이미지는 일곱 번째 트랙 ‘Monkey Gone to Heaven(천국으로 간 원숭이)’을 들어보면 곧 해명된다. ‘5, 6, 7’은 곡 중반 즈음에 리드 싱어 블래키 프랜시스Blackie Francis가 “If man is five then the Devil is six and God is seven(인간은 5, 악마는 6, 그럼 하나님은 7이다)”이라는 가사를 절규하듯 외친 데서 따온 것이다. 사랑이나 이별 내용이 아닌 성경 구절이나 죽음, 고문, 폭력을 펑크 음악의 소음과 괴성에 덧입혀 픽시스만의 사운드를 앨범 디자인으로 승화시켰다. “나는 음악을 물화해 오브제로 즐길 수 있게 하고 싶다”는 본 올리버의 디자인 철학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사진을 담당했던 사이먼 라발레스티어 Simon Larbalestier의 역할도 중요했다.
사진을 전공한 그는 졸업을 앞둔 시점에 본 올리버의 스튜디오를 찾아가 일을 시작했는데 주로 오래되거나 녹슨 오브제를 사용하고, 음산하며 지저분한 그의 스타일도 앨범 디자인의 이미지 형성에 한몫했다. 본 올리버의 디자인이 주목받은 것은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기술을 발 빠르게 차용했기 때문이 아니다. 콘셉트를 돌출시키고 적절히 시각화하는 그의 안목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디자이너로 디지털 기술이 제공하는 표현의 가능성, ‘아날로그한’ 정교함이 본 올리버의 디자인 유산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내용(앨범 속 사운드트랙)에 충실한 디자인을 몸소 실천하지 않았는가. 30여 년이 흘렀고 디지털 기술 역시 급속도로 발전했지만 여전히 4AD의 앨범만큼 수준 높은 디자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위지윅WYSIWYG ‘What You See Is What You Get’의 약자로 스크린에 보이는 내용을 그대로 인쇄할 수 있는 시스템을 뜻한다.
••DTP(DeskTop Publishing) 출판물 제작의 모든 과정을 컴퓨터로 처리하는 편집 인쇄 시스템.
MoR(Master of Reality)
블랙 사바스에서 만나 화이트 라이온에서 갈라진 록·메탈광들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황규철과 디자인 저술가 박경식이 결성한 프로젝트 동아리. 두 사람은 서울, 인천, 경기, 오사카, 교토, 도쿄, 토론토, LA, 베를린까지 바이널을 디깅하면서 나눈 음악과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 유튜브에서 MoR(엠오알)을 검색하시오.
- MoR 본 올리버와 디지털 시대의 음악 디자인
-
Share +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2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