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스타트업 닷페이스가 해산 소식을 알렸습니다. 2018년 조소담 대표와 인터뷰 이후 줄곧 응원하던 회사였기에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온라인 퀴어 퍼레이드 ‘우리는 없던 길도 만들지’는 닷페이스가 6년간 남긴 족적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프로젝트입니다. 2020 코리아디자인어워드 커뮤니케이션 부문 위너를 수상하기도 한 이 작품은 스투키 스튜디오와 협업한 결과물로 길이 없어 선뜻 발을 내딛지 못하던 이들에게 용기와 위로, 격려가 되었죠. 이번 호 특집 ‘해킹젠더 바운더리’도 이분법에 갇힌 세상에 의문을 제기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베를린에 거주 중인 3D 디자이너 김재연은 자신을 논바이너리로 규정하고 캐릭터 디자인에 인위적으로 성별을 부여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합니다. 디자인 스튜디오 ‘굿 퀘스천’을 이끄는 우유니·신선아는 이성애와 동성애,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누는 이항 대립 구조에 의문을 던지며, ‘플락플락’ 이경민은 성소수자를 둘러싼 부조리와 불합리를 디자인으로 표현합니다.
퍼포머 정글 역시 자신의 예술 활동을 통해 편견과 맞서고 있죠. 혹자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다 언저리에서 활동하는 몇몇 별종들의 이야기일 뿐 아니냐고. 글쎄요. 메타의 트렌드 보고서 ‘페이스북IQ’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 모릅니다. 지난 2월 발표한 이 보고서에 따르면, 설문 응답자의 절반 정도가 기존 성 역할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간다고 답했습니다. 더 나아가 Z세대 응답자 중 4분의 1은 평생을 통틀어 최소 한 번은 자신의 성 정체성이 바뀔 수 있다고 예상했죠. 개인을 성 중립적 대명사 ‘they’로 표현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젠더 블렌딩gender blending 현상을 대변합니다. 이러한 시대정신의 변화는 글로벌 브랜드의 마케팅 활동에서도 드러납니다. 2019년 뉴욕 LGBTQ 프라이드 기간에 베르사체, 유튜브, 유나이티드 항공, HSBC 등 글로벌 기업들이 일제히 로고를 무지개색으로 바꾸기도 했는데, 이른바 핑크 머니에 대한 비판의 지점도 분명 존재하지만 소수자를 사회에서 꾸준히 배제해온 인류사를 떠올려봤을 때 이는 분명 의미 있는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매체 철학자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는 저서 〈디자인의 작은 철학〉에서 디자인은 자연을 속이고 선수를 쳐 우리를 포유류의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자유로운 예술가로 만들기 위해 고안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연 혹은 자연이라고 믿어왔던 관습과 편견에 맞서는 디자이너들의 ‘디자인 해방일지’가 독자 여러분께 혜안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번 특집 기사의 메인 에디터는 박슬기 기자이지만, 사실 서민경 기자와 제가 1년 전부터 고심하던 주제이기도 합니다. 당시 선뜻 진행하지 못했던 것은 당사자성이 결여된 채보내는 지지가 되레 누군가에게 상처로 돌아올까 걱정했기 때문이죠(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때 저희가 자문을 구한 이가 바로 닷페이스 조소담 대표와 디자이너 김헵시바였습니다. 1년 전 그날을 떠올려보며 그들이 가고자 했던 ‘없던 길’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누군가가 사부작 또 한 발을 내딛겠죠.
PS 존경하는 동생이자 추앙하는 후배였고, 매거진 〈뒤로〉의 발행인인 고 이도진 디자이너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 Editors letter 없던 길도 만드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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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e +바이라인 : 글 최명환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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