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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Editor's letter 무너진 댐 사이로 서핑하기

작년부터 ‘결괴’라는 단어에 꽂혀 있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옥〉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는데 방죽이나 둑이 물에 밀려 터지고 무너지는 현상을 뜻하죠. 사실 십수 년 전부터 융합이니 통섭이니 하는 말이 나돌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지우기 어려운 의구심이 들곤 했습니다. 인간은 담을 치고 울타리를 두르는 게 본능인지라 “자, 이제부터 탈장르의 시대입니다”라는 말 한마디에 순순히 두 팔 벌리고 스스로 무장해제를 한다는 건 현실과 거리가 먼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죠.(제가 너무 시니컬한 걸까요?)

반면 결괴라는 단어에는 왠지 불가항력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거칠게 밀려 들어오는 거센 물살이라면 의지와 상관없이 무너질 둑은 무너지겠죠? 경계가 허물어지고 분야가 통합되는 결과는 똑같지만 그 과정은 역동적이고, 거칠며, 현실적일 것입니다. 이번 호 주제인 워케이션도 이 시대의 결괴를 보여주는 주요한 현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과 휴식, 일상과 비일상, 도심과 지역 사이를 가르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죠.

처음 담당 기자가 이 주제를 꺼내 들었을 때 솔직히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휴양지까지 일을 싸매고 가서 자괴감을 느껴가며 업무를 보는 직장인의 모습부터 떠올랐거든요. 그런데 이 주제를 탐색하고 취재할수록 생각보다 재미있는 이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빠르게 성장 중인 인디펜던트 워커 시장, 이를 뒷받침하는 협업 툴의 진화, 자유로운 업무 환경을 동경하며 조직을 떠나는 젊은 직원들, 이들을 어떻게든 끌어안아야 하는 회사…. 여기에 팬데믹 이후 공간의 의미를 되돌아본 기획자들과 스타트업, 지역 소멸의 위기에서 벗어날 탈출구를 워케이션에서 찾는 지자체까지.

이 신조어 안에 다양한 역학 관계가 작동하고 있는 셈이죠. 한국관광공사가 지난해 발표한 한 자료에 따르면 기업 인사 담당자의 63.4%가 워케이션 도입에 찬성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보고서는 워케이션의 생산 유발 효과가 4조 5000억 원 규모에 달하며 고용 유발 효과가 2만 7000여 명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죠. 우리보다 한발 앞서 워케이션에 눈길을 돌린 일본에서는 2020년 시장 규모가 699억 엔(약 6675억 원) 규모이며 2025년에는 무려 5배 이상 커질 것으로 내다보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노동 시장과 조직 시스템은 급변하고 있습니다. 워케이션은 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담아내는 새 부대인 것입니다. 근사한 휴양지 풍경이나 (월간 〈디자인〉이 늘 보여주던) 근사한 인테리어의 호텔 이미지를 기대하셨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이것은 눈에 보이는 디자인 이상의 디자인입니다. 리디 자인되어가는 노동 시장과 HR, 일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이 야기죠.

워케이션에 대해 불편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결국 팬데믹으로 떠났던 직원들을 오피스로 복귀시키기 위한 기업의 고육지책이 아니냐는 시선도 있고, 무엇보다 일과 휴식의 분리를 원하는 이들의 반발이 거셉니다. 사실 본인이 선택하지 않으면 될 일인데 왜 그렇게 뿔이 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물론 이 현상과 시스템에 구멍이 많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무엇이든 처음부터 완벽할 수 있나요? 불안정하기 때문에 더 흥미롭고 궁금한 것이죠. 어쨌든 이 다공질 같은 트렌드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언제나 새로움을 추구하는 디자이너라면 색안경을 끼기 전에 기회를 찾는 연습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둑을 뚫고 터져 나오는 물살이 어디로 흐르게 될지 아직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분주하게 허리를 놀리며 시대의 틈 사이를 유영하는 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에이터로서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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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글 최명환 편집장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2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