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인터뷰
“내 정신은 철저히 시각적이다.”
1962년 알프레드 히치콕이 누벨바그의 기수 프랑수아 트뤼포와의 인터뷰 중 남긴 말입니다. 참 그다운 발언이죠. 광고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한 히치콕은 삽화가 들어간 자막을 디자인하며 영화계에 발을 디뎠습니다. 감독 데뷔 전에는 영국 영화계에서 아트 디렉터로도 명성이 높았고요. 히치콕에게 경도된 젊은 감독 트뤼포는 그에게 심층 인터뷰를 제안했고 장장 50시간에 걸친 릴레이 인터뷰를 진행해 4년 뒤인 1966년 〈히치콕/트뤼포Hitchcock/Truaut〉를 펴냅니다(국내에서는 출판사 한나래가 〈히치콕과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출간했습니다). 이번 호 ‘미장센을 완성하는 신의 한 수, 프로덕션 디자인’에서는 ‘시각적인 정신의 소유자’ 11명을 소개합니다. 최근 수년간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은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서 종횡무진 활약한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죠. 이번 호를 시작하면서 특집 담당 기자에게 건넨 미션은 한 가지. “근사한 인터뷰집이 됐으면 좋겠다.” 아마 그는 정확한 의도를 몰랐겠지만, 저는 주제가 선정된 순간 곧바로 이 책이 떠올랐죠.
S#2. 다른 방식으로 보기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이 된 트뤼포의 저작과 이번 호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는 줄 압니다. 전자가 한 사람의 작품 세계를 깊이 있게 들춰낸다면, 후자는 프로덕션 디자이너들의 만신전 같은 느낌이죠. 그럼에도 저는 ‘감히’ 월간 〈디자인〉이 〈히치콕/트뤼포〉에 필적할 만큼 강한 영향력을 가졌으면 합니다. 특히 프로덕션 디자이너를 꿈꾸는 수많은 시네키즈들에게 말이죠(실제로 데이비드 핀처는 아버지가 건네준 이 책이 영화로 진로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고, 웨스 앤더슨은 책이 너덜거려 끈으로 동여매야 할 정도로 천착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고 긴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디자이너나 예비 디자이너가 아니라도 충분히 월간〈디자인〉 531호를 즐길 수 있다고 봅니다. 그동안 스토리나 배우들의 연기를 중심으로 영화와 드라마를 즐긴 독자라도 이번 호를 기점으로 디자인 관점에서 영화에 접근해본다면 분명 새로운 감상 방식을 터득할 것입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이런 대사가 나오죠.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할 때 여러분은 그걸 다른 방식으로도 봐야 한다.”
S#3. 오프닝 시퀀스와 엔딩 크레디트 사이
저는 지난달 아버지가 됐습니다.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경이로웠습니다. 말과 글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직무 유기 같은 발언일 수 있지만, 이 세상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런데 산부인과 회복실에서 아내를 돌보던 중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의 별세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수십 년간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패션으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 그였기에 그날 제 소셜 미디어 피드는 전 세계 디자이너들의 추모 글로 넘실댔습니다. 어느 배우의 인상적인 시상식 수상 소감처럼 죽음은(혹은 탄생마저) 그저 존재 양식의 변화일 뿐이지만 생과 사, 시작과 끝에 관한 끝없는 상념에 젖어 들게 되더군요.
한 생명의 탄생이 강렬한 인상과 함께 등장하는 오프닝 시퀀스라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은 여운 있는 엔딩 크레디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양 끝 사이를 채우는 러닝 타임이 바로 인생이고요. ‘영화 같은 인생’이라는 클리셰한 표현을 곱씹어봅니다. 꼭 다사다난하지 않아도 우리의 인생 자체가 모두 한 편의 영화 아닐까요? 장르가 어떻든, 러닝 타임이 어떻든, 예산 규모가 어떻든, 박스오피스 성적이 어떻든 말이죠. 아무쪼록 독자 여러분의 삶이 때로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때로는 독창적인 창작물로 누군가에게 포착되길 바랍니다. 천만 관객을 흡족케 하는 인생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여러분의 삶이 ‘인생 영화’로 자리매김한다면 손익분기점은 넘긴 셈입니다. 중요한 것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그 순간, 남겨진 이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요?
Post-Credits Scene
솔직히 개인사를 늘어놓을 때마다 지면을 사유화하는 것 같아 일말의 죄책감이 듭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서 지난달만큼 극적인 순간이 없었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부디 너른 양해를 바라며.
- Editors letter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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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e +바이라인 : 글 최명환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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