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무명가수전〉이라는 예능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원래 뭐든 쉽게 질리는 성격인데 순전히 프로그램 이름에 끌려 제법 열심히 시청했습니다. 아직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지 못했거나, 한때 인기를 끌었으나 지금은 기억 속에서 잊힌 가수들이 자기 이름을 감춘 채 출연하는 포맷이었죠.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이 있을 텐데 왜 ‘이름이 없다(無名)’고 할까요? 그건 아마 세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호명(呼名)에 높은 가치를 두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군가의 입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구전되고 기록되는 것. 수많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주장했듯 이름이란 우리가 이 세상을 이해하고 구성하는 방식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불리는 사람에게도, 부르는 사람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뜻이죠. 그런데 아쉽게도 아직 한국 사회에는 이름 없는 디자이너가 너무나 많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 이름을 찾지 못한 디자이너가 많은 거죠. 예전에 비하면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기업과 기관이 협업한 디자이너를 밝히기를 꺼립니다. 저야 한 번도 그런 조직에 몸담아본 경험이 없으니 정확한 의도는 알기 어렵습니다. 모든 공을 오롯이 자기(클라이언트) 앞으로 돌리고 싶어서인지, ‘이 디자이너는 우리만 알아야 돼’라는 일종의 소유욕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디자이너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열거해놓고 보니 세 가지 이유 모두 납득하기 어렵긴 하네요.
아무튼 취재 대상으로부터 “디자이너는 밝힐 수 없습니다” 라는 답이 돌아오는 순간 이름을 밝히려는 자와 숨기려는 자 사이에 치열한 눈치 게임이 시작됩니다. ‘디자인 회사를 밝히지 않는다면 기사로 소개할 수 없다’며 강경하게 나갈 때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타협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왠지 모를 씁쓸한 뒷맛이 남기 마련입니다. 월간 〈디자인〉은 그나마 상황이 나을 것입니다. 보통 일반 매체에서 ‘디자이너 이름 찾아주기’에 그리 많은 에너지를 쏟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디자인 프로젝트가 오늘도 양산되어 유약하게 세상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2007년 시작한 ‘월간 〈디자인〉이 주목하는 디자이너’ 시리즈는 연말에 진행하는 ‘한국 디자인 연감’과 더불어 매체 역사상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기획 기사 중 하나입니다. 지난해까지 정확히 199팀, 올해로 200팀이 넘는 디자이너를 소개하게 됐죠. 저는 이것 역시 디자이너를 호명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감각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소재와 질감,면, 색 등이 ‘누군가의 디자인’으로 새로운 의미가 더해집니다. 이 작업은 디자이너 이름을 드러낸다는 차원의 의미뿐 아니라 독자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뜻깊습니다. 이번 호에 소개한 홍성태 교수의 〈브랜드로 남는다는 것〉 역시 따져보면 이름을 남기는 것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특집 기사와 이 인터뷰 기사(124쪽)를 함께 읽어볼 것을 추천합니다. 아마 2023년도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게 이름 찾아주기를 위한 편집부의 실랑이는 계속될 것 같습니다. 벌써부터 피로감이 밀려오네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해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