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은 케이팝의 분기점이라 할 만합니다.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전 세계를 뒤흔들었고 비슷한 시기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K-pop’이 정식 등재되었습니다. 이듬해 월간 〈디자인〉은 ‘디자인이 없으면 K팝은 빛나지 않는다’(2013년 3월호)라는 기획 기사를 실었습니다. 소위 3대 기획사라고 부르던 SM·YG·JYP 엔터테인먼트를 중심으로 시장의 디자인 전략을 살펴보는 기사였죠. 그런데 당시 편집부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저는 솔직히 너무 부풀려진 제목이 아닌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케이팝에 열광하는 현상이 얼마나 갈지도 미심쩍었지만, 무엇보다 디자인이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그때는 너무나 미미해 보였던 탓이죠.
하지만 그로부터 꼭 1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니 꽤 묵시록 같은 제목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사이 케이팝은 거의 모든 문화 산업 영역에서 변방에 머물던 한국에 최초로 종주국이라는 타이틀을 안겨줬고 디자인은 종합예술인 케이팝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됐으니까요. 이처럼 예지력도, 식견도 부족한 편집장이라 ‘케이팝 디자인 아나토미’라는 거창한 제목을 성마르게 지어놓고도 과연 이 난마 같은 문화와 산업을 얼마나 제대로 짚어냈는지 스스로 의심하게 됩니다.
그나마 BTS와 SF9 로운을 좋아하는 아내 덕에 귀동냥이라도 해두었으니 망정이죠(일단 책은 나와야 하니 시대의 공기 한 숨을 기록했다는 데 의미를 두기로 합니다). 꿀꿀한 고해성사는 여기까지. 지난해 스페이스오디티 김홍기 대표의 요청으로 케이팝 레이더 온라인 콘퍼런스 ‘올해의 앨범 디자인’ 심사에 참여하며 이 산업을 르네상스에 비견해도 무방할 만큼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소 양극화가 심했지만, 디자인 수준이 전반적으로 상향 평준화된건 확실했고 기획사의 브랜딩 전략이 초고도화되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앨범과 영상, 의상과 무대 등 아이돌을 둘러싼 모든 엔터테인먼트 관련 디자인 수준이 절정에 이르렀고, 다양한 실험과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진짜 관심 있었던 건 팬덤이 자생적으로 생산하는 시각 문화였습니다. 이들은 공급자(기획사)와 공조하고, 대립하고, 수렴하고, 반발하면서 산업이자 시장이었던 케이팝을 기어코 문화로 만들어냈습니다.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반사적으로 ‘왜?’라는 질문이 뒤따르죠. 그 어떤 현실적 소득도 없는데 왜 이들은 ‘나의 최애’를 팬픽으로, 비공식 굿즈로, 밈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걸까요? 여기에 그들 스스로 감지하지 못하는 시대의 우울이 담겨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섣부르고 위험한 상상을 더해봅니다. 성공과 성취 이전에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세대. 이들의 상처와 울적함을 저는 감히 헤아리지도 못합니다. 그렇기에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 건네는 위로(설령 그것이 연출이나 기획, 심지어 가상이라 할지라도)가 이들을 열광하게 만든다고 봅니다. 여기에 선망의 대상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형성된 타인과의 동질감은 팬데믹 시대를 맞아 더욱 유효하고 강력하게 작동합니다.
198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엘리아스 카네티는 저서 〈군중과 권력〉 서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접촉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군중 속에 있을 때뿐이다. 이때는 두려움이 오히려 정반대의 감정으로 변한다.” “군중 속에 놓이는 순간 인간은 닿는 게 두렵지 않게 된다. 이상적인 경우에 거기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군중을 물리적 차원에 국한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팬덤을 심리적 군중이라는 말로 치환한다면 오늘날 케이팝 문화를 둘러싼 한 단면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 Editors letter 케이팝 르네상스의 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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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e +바이라인 : 글 최명환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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