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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 Essay Mix 3 앨범깡의 기쁨과 슬픔
“앨범깡이라는 놀이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은 확률과 운이다. 앨범깡의 즐거움은 도박의 원초적인 쾌락에서 비롯한다는 뜻이다.”

팬데믹은 케이팝 아이돌 팬덤 문화를 뒤흔들어놓았다. 국경이 차단되고 대면 행사가 어려워지자 콘서트는 온라인으로 전세계에 생중계되고 팬 사인회는 영상통화로 대체되었다. 스타와 팬 사이를 매개하는 방식만큼이나 팬과 팬 사이를 매개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내가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팬데믹을 거치며 케이팝 아이돌 팬덤의 놀이 문화로 자리 잡은 ‘앨범깡’이다. 앨범깡이란 앨범의 포장을 ‘까서’ 내용물을 확인하는 일련의 행위를 가리킨다. 이는 촬영과 편집을 거쳐 유튜브, 틱톡, 인스타그램 등의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공유된다. 팬 브이로그의 일부를 이루던 앨범깡은 이제 하나의 독립된 콘텐츠가 되었다. 앨범깡 영상은 적게는 한두 장에서 많게는 수십 장의 앨범을 개봉하는 반복적인 과정을 보여준다.

먼저 케이팝 아이돌 팬덤은 결코 앨범을 한 장만 구매하지 않는다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들이 앨범을 여러장 구매하는 목적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아이돌의 성공을 수치화하기 위해서다. 케이팝 팬덤 문화에서 아이돌 성공의 척도는 앨범 판매량이다. 다른 아이돌과의 경쟁에서 비교 우위를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번 컴백 앨범의 초동 판매량(발매 후 첫 일주일 동안의 판매량)이 자체 최고 기록을 달성하는 것이다. 수치로 가시화된 성장은 아이돌과 팬덤이 공유하는 지상의 목표이기에, 팬들은 여러 버전으로 발매된 동일한 앨범을 여러 장씩 구매하는 데 거리낌 없다.

둘째, 팬 사인회에 응모하기 위해서다. 팬 사인회는 아이돌 스타와 가까이 대면하고 소통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공식 이벤트로, 2010년대 들어 본격적인 친밀성 거래의 장이 되었다. 팬들은 팬 사인회의 높은 경쟁률을 뚫기 위해 수십 장에서 수백 장에 이르는 앨범을 구매한다. 팬 사인회에 당첨되기 위해 구매해야 하는 최소한의 앨범 수를 가리키는 ‘팬싸 컷’은 아이돌 인기의 척도이기도 하다. 셋째, 포토카드를 모으기 위해서다. 케이팝 아이돌 앨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구성품인 포토카드는 아이돌 스타의 셀피가 인쇄된 신용카드 사이즈의 종이다. 앨범 한 장당 한 장 또는 두 장의 포토카드가 들어 있는데, 앨범 버전별로 사진이 다른 데다 랜덤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원하는 포토카드를 얻기란 쉽지 않다. 팬들은 ‘최애’의 포토카드 또는 ‘갈망’하는 포토카드를 모두 갖게 될 때까지 앨범을 사고 또 산다.

본래 포토카드 수집은 부차적인 목적에 불과했다. 애초에 팬 사인회와 포토카드는 앨범 판매량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한 것인 데다 아이돌 스타와의 정서적 연결이라는 측면에서 포토카드 수집은 팬 사인회 참여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초동 판매량 집계 기간이 지나고 팬 사인회 일정이 마무리된 후에도 케이팝 팬덤은 앨범을 끊임없이 구매한다. 앨범깡을 위해서다. 이 앨범깡의 목적은 대체로 포토카드를 수집하기 위해서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앨범깡 과정을 담은 영상들을 보면 그 목적이 단순히 ‘포카 수집’에 국한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상에서 앨범깡 과정은 철저하게 양식화되어 있다. 우선 앨범을 ‘까기’ 전에 최애 포토카드나 최애를 상징하는 캐릭터 인형을 앨범 표면에 대고 문지르며 최애의 이름을 부른다. 최애 포토카드가 나와주길 기원하는 일종의 종교적 의식이다(팬덤은 이를 위한 부적을 따로 제작해 판매하기도 한다). 기도가 끝나면 앨범의 비닐 포장을 벗기고 소책자 안을 더듬어 포토카드를 찾아 조심스레 손에 쥔다.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잠시 동안의 정적 후에 포토카드를 뒤집어 결과를 확인한다. 결과에 따라 반응은 격정적인 환희와 노골적인 실망, 마지못한 긍정 사이를 오간다.

특히 오프라인 음반 매장은 앨범깡이라는 의례를 치르는 사원으로 탈바꿈한 지 오래다. 음반 매장 가운데에 놓인 테이블에 모여 앉은 팬들은 서로의 앨범깡을 차례로 지켜보며 그의 최애가 나오길 함께 기도한다. 결과에 따라 함께 기뻐하고 서로 위로한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앨범을 추가로 구매하기도 한다. 팬데믹으로 인해 공개방송, 팬 사인회, 콘서트에서 서로 만날 수 없게 되자 음반 매장이 팬들의 사교를 위한 오프라인 플랫폼으로 부상한 것이다. ‘오프깡(오프라인 앨범깡)’ 영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들의 흥분과 열기는 앨범깡의 목적이 일정한 규칙을 따름으로써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 즉 놀이에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앨범깡이라는 놀이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은 확률과 운이다. 앨범깡의 즐거움은 도박의 원초적인 쾌락에서 비롯한다는 뜻이다. 앨범깡이 지금처럼 의례화된 이유도 도박이 가져다주는 필연적인 좌절을 양식화된 행위로 상쇄하기 위함일 테다. 무엇보다 앨범깡의 전 과정은 온라인에서 동영상으로 공유되어 팬들의 구매 욕구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소비의 되먹임 회로를 형성한다. 이렇게 케이팝 아이돌 팬덤이 팬데믹을 거치며 발전시킨 앨범깡이라는 놀이 문화는 구매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소비이며, 이를 통해 다른 이들의 구매를 촉진하여 이윤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노동이다. 놀이와 소비, 놀이와 노동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케이팝 팬덤 문화는 현재 앨범깡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화여대 여성학과에서 ‘페미니스트 세계만들기(worlding)로서 듀나의 SF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논문 ‘케이팝 아이돌의 자필 사과문99: 손글씨의 진정성과 팬덤의 소비자 정체성’을 썼다. 동료들과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Fwd〉를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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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글 강은교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3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