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고넨epigonen’을 아시나요? 본래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베 전쟁에서 전사한 7인의 용사의 자식들을 이르는 말인데,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위대한 예술이나 사상을 모방하는 아류’라는 의미로 전용됐습니다. 또 선구자가 사라진 뒤 그에 미치지 못하는 모사꾼이 군웅할거하는 것을 ‘에피고넨의 시대’라고 부르죠. 최근 미드저니가 예술가의 화풍을 애석할 만큼 쉽게 모방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침내 우리가 에피고넨의 시대에 접어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술성만큼은 인간 고유의 능력이라는, 그래서 인간성을 지켜줄 최후의 보루라는 신념이 무너진 것 같아 절로 탄식이 나오더군요(물론 예술성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분명 경탄할 만큼 신기한 기술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모방과 모사가 범람하는 시대에 귀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어쩌다 우리는 창작의 본원을 상실한 채 이리저리 방황하는 처지가 됐을까요? 어떻게 해야 아류의 숲을 뚫고 상실한 추진 동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저는 풍부한 경험과 사유가 그 단서가 되리라 추측해봅니다. 정보의 채집을 넘어 이야기를 체득한다면, 충분한 사유를 거쳐 지성을 내재화한다면 우리는 창조의 활로를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전시장을 찾는 것도 결국 경험의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한 의식적·무의식적 행위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이 비단 벽에 걸린 작품 한 점, 기획자의 설명 글 한 줄로 충족되는 것은 아닙니다. 작가와 기획자 곁에 서 있는 전시 디자이너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실제로 전시 디자이너는 절묘한 작품 배열과 섬세한 동선 설계, 때로 적절한 테크놀로지의 활용으로 관람객을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합니다. 월간 〈디자인〉 538호 특집 ‘그 전시, 누가 디자인했을까?’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이 설계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저서 〈새로운 예술을 찾아서〉를 오디세우스와 사이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사이렌이 아름다운 노래로 항해하는 선원들을 홀려 수장시켜 버린다는 소식을 들은 영웅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에게 자신을 배 기둥에 결박하라고 지시하죠. 결국 사이렌의 미성에도 오디세우스는 안전하게 갑판 위에 살아남았다는 고대 그리스 신화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신화를 바라보는 브레히트의 시각입니다. 세상은 영웅의 지략을 칭송하지만, 그는 오히려 이성을 부여잡느라 예술에 미동조차 하지 않는 한 인간의 무지함에 통탄합니다. 사이렌이 이 ‘소심하기 짝이 없는 시골뜨기’에게 예술을 허비했다며 예술의 본질에 관해 묻죠. 오래전 이 글을 읽고 저는 오디세우스의 손에 예리하게 연마한 단도가 들려 있었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상상한 적이 있습니다. 서사로 치면 비극이 되겠지만 오디세우스 개인은 가장 황홀하게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겠죠. 지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예술과 함께.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은 빈곤한 에피고넨의 시대에서 우리 몸을 끊어내고, 예술의 세계에 한 발 더 내딛게 해줄 무언가가 아닐지요. 전시 디자인에서 어쩌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