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현대미술관은 개관 5주년을 맞이해 MI 재정비 계획을 세웠다. 공공기관의 일반적인 용역 계약 방식을 탈피해, 공모 과정을 거쳐 여러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제안한 MI 시안을 전시 형태로 공개할 예정이다. 4월 29일부터 7월 9일까지 진행하는 〈부산현대미술관 정체성과 디자인〉전이 바로 그것이다. 개막 후 시민 투표와 전문가 심사를 거쳐 최종 작품을 선정한다. 이러한 프로세스는 행정 절차에 익숙한 일부 기업과 디자이너들이 용역을 독점하는 구도를 탈피하기 위해 고안했다. 이는 또한 관람객 모두에게 일정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수동적 수용자를 벗어나 능동적 행위자로 거듭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실 이러한 형식의 용역은 내부적으로 은밀하게 진행한 후 간단히 그 결과만 통보하는 방식으로 진행해도 될 일이다.
하지만 전시와 미술관의 정체성, 디자인 재정비라는 주요 사업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성공 혹은 실패라는 이분법적이면서도 결과 중심적인 사고를 떠나 동시대 공공 전시기관의 기능과 역할을 재고하게 만든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미술관의 사회적 기능이 중립적으로 수행되어왔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했다. 실패할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미술관의 정체성과 디자인 재정비라는 굉장히 중요한 용역을 전시로 공개 전환함으로써 기존 공모 과정에서 배제되었던 디자이너들의 이야기에 조금 더 귀 기울이고자 한다. 이른바 ‘미술 권력’이 자격을 박탈하는 바람에 잊힌 개인의 목소리가 긍정적인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이러한 궁금증은 이번 전시 준비 과정에서 그 개인들이 매우 강력한 역할을 수행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와도 맞닿아 있다. 그들이 정말로 이 과정에 헌신한다면 결과와 별개로 전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설령 용역 결과물의 수준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부산현대미술관은 제법 가벼운 마음으로 그 위험을 감수할 것이다.
이번 전시의 표면적인 목적은 부산현대미술관의 방향성과 지향하는 가치가 담긴 용역의 결과물, 즉 MI를 디자이너로부터 납품받는 데 있다. 하지만 진정한 목적은 동시대 전시기관의 사회적 역할과 운영 방식에 대한 쟁점을 제시하고, 미술관 제도와 대중 간의 전통적인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 따르면 ‘미술관’이란 미술에 관한 자료를 수집·관리·보존·조사·연구·전시·교육하는 시설을 의미한다. 이처럼 지식을 생산하고 조직하고 구축하는 기관으로서 지식의 형성과 유포라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곳이 미술관이다. 〈부산현대미술관 정체성과 디자인〉전은 전시 기관으로서 가진 이 권력이 정당하게 행사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전시를 보러 오는 이들 중 상당수는 미술관의 활동이 만들어낸 결과물만을 일방적으로 체험할 수밖에 없다. 그저 수동적 수용자로서 오직 무언가를 배우고 감동하기 위해 방문하는 것이다. 전시는 대중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생산·조직·구조화되는 한국 사회의 지식 생산 체계를 ‘용역(혹은 그 과정)’이라는 은유를 통해 가감 없이 공개함으로써 미술관으로서 새로운 자기 감시 체계를 확립하고자 한다. 기존 미술관의 폐쇄성을 무너뜨리고 중립성을 강화하는 데 이바지하며, 궁극적으로는 부산현대미술관의 존재 이유에 대한 중요한 기반을 마련한다. 그리고 전시 기관의 주요 활동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기관 스스로 공개함으로써 미술관의 역사 속에서 드러난 편파와 왜곡을 직시하고 반성할 계기를 제공한다.
이번 전시에는 총 60팀의 디자이너가 지원했고, 두 번의 심사를 거쳐 네 팀을 선발했다(심사 과정 역시 전시 형태로 공개할 예정이다). 전시 공간은 공평하게 등분하여 디자이너들에게 배분되었다. 네 팀의 디자이너들은 각자에게 할당된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해 디자인한 뒤 그 결과물을 선보일 것이다. 전시장 내부에는 전자 투표소를 설치해 관람객들이 가장 마음에 드는 디자이너의 작품에 투표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다. 이후 최종 심사를 거쳐 한 팀을 선정해 MI를 도출할 예정이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기획자로서 광범위한 다양성의 만남이 곧 새로운 아이디어가 탄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고 믿고 있다. 비록 절차상 ‘경쟁’이라는 또 다른 권력 구조를 완벽히 탈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일련의 과정을 통해 분명 존재함에도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무언가’를 직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최상호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전시 제작부터 유통, 소비까지 모든 과정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멈추지 않고 있다.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 〈거의 정보가 없는 전시〉 〈포스트모던 어린이〉 등을 기획했고 현재 〈부산현대미술관 정체성과 디자인〉전을 준비 중이다.
- 분터카머 톺아보기 실패를 감수하는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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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목적은 동시대 전시 기관의 사회적 역할과 운영 방식에 대한 쟁점을 제시하고, 미술관 제도와 대중 간의 전통적인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다.Share +바이라인 : 글 최상호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3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