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적응이 될 만도 하건만, 여전히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뒷머리가 쭈뼛 섭니다. 관리자라면 아마 공감하겠죠. 아니나 다를까, 기자 한 명이 퇴사의 뜻을 밝힙니다. ‘愛’까지 붙이는 건 과분하지만 나름대로 아끼는 팀원이었기에 그 결정이 야속하다 싶어 눈을 흘겨봅니다. 물론 소심하게 뒤통수에 대고 흘긴 탓인지 별 효력은 없습니다. 그러다 다시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길이라는 건 원래 머물던 이가 떠나가고 다시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순간 비로소 희미하게나마 흔적이 드러나는 법이라고. 최근의 이 일은 모빌리티와 도시의 상관관계를 통시적으로 상고하게 만드는 기묘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처음 사람들은 차 자체에 열광했습니다. 매연과 배기음을 황소처럼 뿜어대며 질주하는 기술의 마법은 필시 사람들을 황홀경에 빠뜨렸을 것입니다. “달리는 경주용 자동차는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보다 더 아름답다”고 했던 필리포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은 아드레날린 넘치던 20세기 초의 흥분 상태를 잘 드러내는 말입니다. 자동차가 공공 영역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자동차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죠. 변한 건 차만이 아닙니다. 모빌리티의 성장에 따라 도시의 성격과 모습도 급격히 달라졌습니다. 이른바 닫힌 교통 체계라고 부르는 대중교통 시스템을 착근시켜 안정적으로 도시의 몸집을 키우려던 도시계획가들의 야심은 이 횡단하는 부품들 때문에 맥없이 수그러졌습니다. 시공의 제약에서 벗어난 인류가 삶의 범주를 게걸스럽게 확장해나갔기 때문이죠.
일터와 일상이 분리됐고, 칼집을 내듯 도로가 도시를 후벼 파면서 도시의 수용력을 축소해나갔습니다. 확장과 밀집의 무한 반복. 도시의 진화 막후에는 눈을 홉뜬 채 도로를 오가는 자동차 무리가 있었습니다. “20세기 후반의 도시 개발은 디트로이트에서 시작한 기계공학이 결정했다”는 뉴욕시의 전 교통국장 재닛 사디칸의 말도 모빌리티가 현대 도시인의 삶을 지배해왔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모빌리티는 물리적 변화와 더불어 우리의 감각도 ‘리디자인’했습니다. 폴 비릴리오 같은 사상가들은 기술에 의한 속도의 가속화를 현대의 특징으로 규정지었는데 모빌리티가 여기에 상당한 지분이 있습니다. 이처럼 모빌리티의 성장은 현대사회로의 이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사이 포드 시스템의 안착, 카로체리아(이탈리아의 자동차 공방)의 흥망성쇠, 스타자동차 디자이너들의 등장 등이 자동차의 연대기를 수놓았습니다.
그런데 일련의 역사적 현상에 기초한다면 다음과 같은 추론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모빌리티가 변하면 도시도 삶도 변한다. 뉴 모빌리티 산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디자인은 달라진(혹은 달라질) 기술, 개념, 시장과 공진화를 이룰 것입니다. 다 지나간 낡은 이야기를 장광설로 늘어놓은 건 제게 새로운 모빌리티의 망망대해가 어디로 향할지 가늠하는 더듬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운전대를 생략한 자동차가, 디젤기관을 드러낸 버스가, 하늘을 나는 택시가 우리를 피안의 세계로 데려갈지, 아니면 또 다른 디스토피아로 인도할지 좀 더 지켜볼 일입니다.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 것이겠죠. 어찌 되었거나 정주해 있다면 기술이든 사람이든 조직이든 아무런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할 테니까요. 그래서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아꼈던 기자가 퇴직 신청서를 기안하는 순간 쿨하게 결재 버튼을 누를 생각입니다.